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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Jun 30. 2017

그녀의 습관이었어

나중에야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거실에 홀로 남아 코코볼에 우유를 부었다. 코코볼의 이름은 코코볼이 아니었다. 우유도 1A등급이라는 딱지가 붙어있지 않았다. 처음 보는 이국의 시리얼, 처음 보는 이국의 우유였다. 흰 우유가 초코 우유로 변하자 으레 먹던 맛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가방 안에 노트북을 넣고 어깨에 카메라를 걸쳤다.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가방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방 안에 쓸데없는 물건 하나까지 족족 챙겨 다니는 사람이 있다. M이 메고 다니던 배낭도 늘 가볍지 않았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짐을 지고 다니는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했다. 이것이 단순히 가방을 채우는 습관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나는 곰곰 생각해 보았다.


 니콜에게 빌린 집은 여전히 누군가 이사를 오다 만 것 같은 분위기였다. 커다란 가구를 먼저 옮겨놓고 트럭으로 돌아가 보니 자잘한 짐이 든 상자들은 어디선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집 같기도 했다. 체념이랄까. 삶의 소중한 부분은 전부 잃어버린 상자 안에 들어있는데, 그 한 마디로 하릴없이 정리를 끝내 버린 현장이었다.


 하지만 상실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므로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불편하진 않았다. 그저 집주인이 잃어버린 양만큼 내가 지워지는 듯한 적적함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이대로는 잠겨버릴지도. 나는 외출을 하기로 했다.





 M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이미 학원에 있었다. 오늘 나의 할 일은 점심시간에 맞춰 M의 학원이 있는 구시가지에 가는 것이었다. 몬트리올에서 처음으로 혼자 하는 산책이 될 터였다. 문득 이 도시에 온 지 한 주가 다 되어가는데도 이곳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M이 옆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눈치껏, 그냥 다른 도시에서도 으레 하는 그대로 지하철을 타고 출구를 찾고 방향을 가늠해서 걸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과정이 습관 같았다. 이런 걸 습관이라 부를 수 있을까? 습관이라 함은 오랜 시간 동안 시나브로 내 몸에 배는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아니었던가?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우산을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 여럿이 그 비를 나눠 맞은 덕분에 누구도 흠뻑 젖지는 않았다. 이 도시에서 혼자 보낼 시간을 위해 굳이 노트북과 책 한 권, 여타 잡동사니를 짊어지고 온 것이라고 나는 M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런 유형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만큼 자명한 명제였다.



 한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길을 건너왔다. 안경을 쓴 남자가 내가 등진 컨벤션 센터의 출구로 나와 여자가 왔던 방향으로 줄달음질 쳤다. 여기 서 있으면 약속 장소로 걸어오는 M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다른 쪽 입구에 있다고 했다. 나는 엉뚱한 문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이 방향이라고 믿고 있었다. 습관처럼 매번 여기서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점심은 M이 한두 번 간 적 있다는 컨벤션 센터 안의 일식집에서 해결했다. 우리가 주문한 메뉴는 롤보다는 소를 올린 김밥이 더 많았다. 말다가 옆구리가 터져 반찬을 올렸다며 머쓱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맛은 아주 좋았다.





 비는 그쳐 있었다. M은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자주 갔던 카페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학원과 5분 거리에 있는 '타미Tommy'란 곳이었다. 이 층짜리였고, 길모퉁이 카페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컸다. 문을 열면 위층 테이블 위 커피잔까지 눈에 들어올 만큼 확 트인 전면도 매력적이었다. M은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다가 오후 수업을 들으러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되었고, 나는 애써 들고 온 노트북을 펼쳤다. 문장을 쓰다 보면 혼자라는 사실을 잊기도 했다.


 손님들은 대체로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웹서핑을 하거나 리포트를 쓰거나 책을 읽었다. 글 쓰는 데 진척이 없으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수염을 기른 남자들, 제스처가 큰 여자들, 자기 음악에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추는 대학생들과 늘씬한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을 보았다. 허둥지둥 들어와 빵과 커피를 끝장내고 돌아나가는 사람도 여럿 있었는데, 얼마나 빠르던지 내가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사라지고는 했다. 갑자기 드나드는 사람이 없고, 있던 사람도 자기 일에 침잠해 움직이지 않으면, 역시 애써 들고 온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펼쳤다. 나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읽지 못했다. 이 시집은 지금도 책장에 꽂혀 읽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한두 문단 정도 억지로 짜냈을 때 요의를 느꼈다. 마침 M의 오후 휴식시간이 코앞이었다. 어쩌면 그 시간에 맞춰 나의 방광이 긴장을 풀었다는 표현이 바르겠다. 짐을 놔두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는 께름칙했으니 아예 짐을 챙겨서 카페를 나섰다. 그리고 며칠 전에 한 번 지나간 게 전부인 M의 학원으로 향했다. 처음 걷는 길인데, 어쩐지 이미 알고 있는 길을 걷는 듯했다. 붉은 벽돌이 발린 건물도, 누군가 스프레이로 벽에 그린 알아볼 수 없는 기호도, 차가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는지 모를 주차장 입구도 눈에 익은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골목을 두 번이나 잘못 든 주제에 내가 길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 원래 이 도시에 있던 습관처럼 나는 걷고 있었다. 휘파람을 부는 습관까지 있었다면, 분명 휘파람도 불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이 모든 것이 실은 M의 습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오늘은 몇 개월 동안 수업을 들으러 다니고 두세 시간씩 산책하며 단골을 만들었던, 그녀의 하루였던 것이다.



 어쩐지 낭만적인, 쉬는 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이 끝날 즈음 M은 '플라이 진Fly Jin'이라는 두 번째 카페를 추천해 주었다. 카페 이름에 내 이름 한 자가 들어가 있어 나더러 날아오르라고 권하는 듯한 곳이었다. 어느 사무실 건물 일 층, 꽃집을 맞은편에 둔 아담한 공간이었다. 나는 카페 플라이 진을 굉장히 맛있는 커피와 오렌지가 가득 든 착즙 기계로 기억한다. 밖에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이곳에도 단골은 많았다. 앉으러 온다기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들러 커피나 주스를 픽업해 가는 사람들이었다. 주인도 손님도 전부 서로 알고 지내는 듯하니, 뜨내기인 나조차도 그들의 허물없는 대화에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필시 M 또한 이곳에 들러 차 한 잔 마시고 사진 몇 장을 찍다가 자리를 떴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찍었을지 모를 구도 그대로 셔터를 누르고 나서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 그러고는 앞서 카페에서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녀의 마지막 수업은 한 시간이 넘었고, 나는 그 시간만큼 꼬박 자리를 지켰다. 가끔 부끄러움도 모르고 카푸치노 잔에 들러붙은 우유 거품을 혀로 핥기도 했다. 달큼한 맛이었다.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수업이 끝난 M과 (세 번째로) 만나자 나는 구시가의 모든 것을 다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흐린 날의 몬트리올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체감하기 시작했다. 내가 몬트리올에 오기 전 M이 수업을 마치고 이 도시를 산책하던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으며, 어떤 생경한 골목을 만나면 입구에 서서 한참 동안 저 건너편을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내게 존재했던 습관 같다는 착각은 어느덧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원래 주인인 M에게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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