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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르고트 Apr 18. 2017

가을이 시작되는 장소

이 집을 잠시 빌렸을 뿐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니콜의 집은 삼 층에 있었다. 집을 빌린 첫날, 우리는 거리로 곧장 이어진 현관문 앞에서 문 열기와 문 잠그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일 층으로 연결된 옆문 앞으로 다가온 한 동양 남자가 열쇠를 꺼냈다. 중국 유학생이거나 중국계 캐나다인인 듯한 그는 새로 이사를 왔느냐며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이사를 온 건 아니었지만, 몇 주를 위해 새로 온 건 맞으니까 나 역시 반갑다는 말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니콜의 집을 떠나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완벽하게 현관문을 마스터한 후 삼 층으로 돌아오자 이곳이 몬트리올에서 내가 빌리고 머무는 첫 집이라는 실감이 났다. 현관으로 들어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우리 집과 이 층 집을 나누는 문이 하나씩 더 나왔다. 그 중간 문을 따고 좁은 계단을 한 층 더 올라야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침실은 꽤나 넓었다. 침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다. 화장실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주방에는 4구짜리 전기 레인지가 있어 M이 마음껏 요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쓰고 싶을 만큼 전기레인지는 안전하고 실용적이었으며, 그것과 상관없이 이국적인 멋이 있었다. 거실은 침실의 두 배는 될 정도로 넓었으나 난방이 잘 들지 않았다. 해가 조금만 기울어도 어둑어둑한 정적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거실이 넓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내 캐리어를 펼쳐놓은 채로 두어도 거치적거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발코니, 발코니가 있었다. 그곳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면 건너편 사무실 건물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직원들이 시시때때로 1층으로 내려와 음료수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동료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았다. 발코니는 철제 비상계단도 연결돼 있었다. 나선형 계단에서 뒤를 돌아보면 부엌에 난 창을 통해 요리를 하는 M을 볼 수도 있었다.


 니콜은 집에 잘 있지 않나 봐. 아니면 집을 빌려주기 위해 가구도 거의 없고 심지어 커튼조차 없는 상태로 집을 방치하는지도 모르지. 대부분의 시간을 길 건너편에 사는 남자친구의 방에서 보내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끔은 스산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집안을 의미 없이 걸어 다니기도 했다. 집안엔 주인의 삶을 드러내는 증거가 별로 없었다. 니콜의 사진 한두 장, 남자친구가 강력히 추천한 태국 배달음식점의 브로슈어, 그리고 그녀가 다녀왔으리라고 예상되는 다른 나라의 가이드북과 그녀의 전공을 가늠케 하는 바바라 런던을 비롯한 사진 교재 몇 권.


 그래서 나는 이 집을 잠시 빌렸을 뿐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이곳이 온전하게 나와 M의 집인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유난히 조용하고, 이웃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이 나와 M의 숨소리임을 퍼뜩 깨닫곤 하는 이 집을 내 것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니콜의 집은 약자로만 보면 쇼핑몰 같은 이름의 대학교 UQAM(Université du Québec à Montréal) 근처에 있었다. 웅장한 규모의 도서관도 근저였고, 그 도서관에서 골목을 빠져나가면 젊은이들이 자주 모이는 라탱 지구가 나왔다.


 하지만 서너 블록 떨어진 집으로 걸어갈수록 공기조차 한가해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어슬렁거리는 노숙자들, 몸을 꼭 죄는 코트를 입은 젊은이들,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지하철 계단을 날듯이 달려가는 직장인들을 지나쳤다. 건물 전면의 계단이 매력적인 주택가를 따라 무료 주차 도로를 꽉 채운 자동차들, 단풍이 들다 만 나이 많은 가로수들, 이파리 아래로 덩어리진 만물의 쓸쓸한 그림자들을 보았다. 두 블록 안에 두 군데나 있어 우리를 기쁘게 했던 서점들, 그중 더 낡고 더 먼지가 쌓였으며 그래서 더 정이 갔던 곳에서 맡았던 퀴퀴한 책 냄새들, 바닥을 기어가는 담배꽁초들, 바닥을 끌어안고 우는 낙엽들, 작은 공원에서 이상한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들, 경적을 울리는 대신 방귀를 뀌고 달아나는 자동차들,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아 잘 보이지도 않는 끝내주는 커피숍들, 소액을 받고 빌려주는 날씬한 자전거들, 쓰레기가 없는 외로운 쓰레기통들은 기억에 남기기로 했다.


 그런데 라탱 지구에선 웃던 이들조차 이 동네는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으니, 번잡한 건 내 눈과 마음뿐이었다. 나는 집을 나설 때마다 거리의 소실점을 눈으로 따라가며 한 번도 그러지 않은 것처럼 감탄했다.



 홀로 다닐 때도 있었다. M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며 지하철을 타거나 자전거를 빌려서 그녀의 학원이 있는 구시가지로 가기도 했고, 그녀가 추천한 카페를 찾아 한두 시간 뭔가를 끼적이기도 했다.


 M이 옆에 없으면, 이 도시를 걷고 달린다는 게 이상하리만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를 보기 위해 이 도시에 왔다는 선언과 이 도시를 여행하고 싶어서 이 도시에 왔다는 선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 왜 왔는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언제 여기에 왔지, 어느새 여기에 온 거지,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눈을 뜨고 보니 이국의 아름다운 가을 한복판에 있었고, 고개를 돌리고 보니 대학생으로 꽉 찬 복층 구조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전과 후가 없는 사람, 가끔은 그렇게 파편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에 마음이 놓였다.



 니콜에게 빌린 우리의 집이 마법처럼 여겨졌던 것은 그 집을 나서자마자 아주 멀리 와버렸다고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집은 진짜 우리 집처럼 익숙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날 알던 사람들로부터 잊힌다는 일, 맑은 외로움에 몸을 담근다는 일, 그렇지만 나를 기억해 줄 단 한 사람인 M이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존재한다고 안심하는 일.


 몬트리올에서 보낸 가을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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