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훌쩍 떠나는 게 쉽지 않다. 여행지가 해외이거나 장거리일 경우 더욱 그렇다. 로드무비 속, 길을 떠난 주인공의 시선으로 여행지를 감상한다. 카메라 감독이 잡아내는 그림 같은 배경에 마음을 홀랑 뺏긴다.
좋아하는 독일 영화가 몇 개 있다. 독일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은, 현실적인 묘사, 등장인물이었다. 머리카락은 엉클어져 있고, 웃지도 않고 차갑게 말한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고, 가릴 것 없이 본성 다 보이는 인물.
달큰한 한국 로코에 길들여진 나는 공감 보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다시 본다는 기분이 들었었다.
직장 생활할 때 좋아했던 독일인 상사가 있었다. SNS 소통 시, 재미있는 이모티콘 리액션, 항상 생글생글 웃고, 본인을 우습게 만드는 농담을 달고 사는. 긍정의 에너지가 뿜뿜 느껴지는 분이었다. 직장생활 중 고민이 생겨 힘들어하던 내게, “좋은 독일 영화가 있어 ‘나의 산티아고’ (독일어명 Ich bin dann mal weg) 한번 봐!”를 권했다.
주인공은 36세의 성공한 코미디언, 희극인, 명예와 부를 다 가진 사람이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까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던 주인공. ‘이제 쉬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한 대가로 큰 수술을 받게 된다.
그는 아무것도 안 하기 선수 반려묘 베아트릭스와 잡담을 주고받는 소파 죽돌이였다. 텔레비전이 그에게 말을 건다. 편안히 앉아서 답을 찾으라고, 먼 곳으로 떠날 시간이 어딨 느냐고. 그는 결심한다. ‘산티아고’에 가야겠다고.
이 길을 무심히 걷다 보면 언젠가 답을 알게 되겠지. 너무 열망하지도 않아야 한다.
그저 마음을 열고 하루를 껴안아 보자.
그 길에서 그는 무너지고 다시 일어난다. 일상에서 나 역시 수없이 무너지고 스스로를 일으키지만, 산티아고의 나는 어떨까. 수많은 동행자는 부르튼 발, 불편한 취사, 잠자리를 견디며 걷는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누구도 ‘이 길의 힘’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800km 40일 안에 달려가며 각자의 사연을 무겁게 짊어진 동행자 스텔라 그리고 기자 레나를 만난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다른 순례자들에게 빌어주는 말. 오늘의 순례길에 행복과 평안이 깃들기를.
하페는 끝장나기 직전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어릴 적 어머니를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간 하느님을 찾는다. 아니, 답을 찾기 전 질문을 찾기로 한다. 가장 처음으로 돌아간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여행도 순탄하지 않다. 첫날부터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침대, 제멋대로인 날씨.
부서진 내 삶의 끝에서 하느님께 묻는다. 나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지. 믿어지지 않았던 그의 신을 만난다.
산티아고, 모든 것을 앗아갔다가 몇 배로 돌려받는 곳. 예상치 못한 여행의 순간마다 그는 단 하나를 발견한다. 바로 나 자신.
그 자신이 변하면서 그를 둘러싼 세계가 변함을 느낀다.
산티아고 순례길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나는 햇살, 짙푸른 들판에 서 있는 장난감 같은 빨간색 집. 풍광에 취했다. 그 길 위에 멈춰 서 있는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산티아고에 당장 갈 수 없지만,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