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솔 선배
솔 선배는 우리 회사에서 내가 가장 애정하는 사람이다. 일을 잘하기도 하지만 사람도 좋다. 펌을 한 어깨너머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도, 웃을 때의 특이한 소리도 좋다.
선배는 출근하기 전에 향수를 뿌리고 나온다. 오전에 회의시간에 솔 선배 옆에 앉아있으면 종종 선배 쪽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내쪽으로 퍼져 나온다. 나는 향수를 즐겨 뿌리는 편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한 번도 없고, 다른 누군가에서 나는 향수의 향에 감탄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솔 선배가 사용하는 향수들은 과하지 않으면서도 또렷한 캐릭터가 있었다. 어떨 때는 달콤한 꽃 향기가 나는 향수를, 어떨 때는 묵직한 머스크 향이 나는 향수를 뿌렸는데, 그 향이 선배를 각각 조금 다른 느낌으로 완성시켰다.
한 번은 어떤 기준으로 선배가 그날의 향수를 고르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나는 궁금한 모든 것을 물어볼 만큼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닌데, 또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내가 찾은 해결책은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조합해서 제일 그럴듯한 가설을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물론 언제나 스스로가 감탄할 만할 만큼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솔 선배가 뿌릴 향수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서너 개의 가설들이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경쟁하고 있는데, 모두가 영 마뜩잖고, 더 그럴듯한 가설은 아무리 노력해봐도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최근에 솔 선배는 항상 머스크 향을 뿌리고 나온다. 플로랄 향의 향수는 다 써버린 걸까?
오늘은 출근길에 솔 선배와 401번 버스 안에서 마주쳤다.
나는 금호동에 살고 솔 선배는 홍대 쪽에 산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내려 401번 버스를 타는 것으로 기나긴 출근 대장정을 마무리하지만, 버스를 타는 정류장도 다르고 타고 오는 방향도 반대이다. 그래서 선배와 같은 버스를 타고 출근할 일은 보통 잘 일어나지 않는다. 선배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나는 집순이에 술도 즐기지 않는 선배가 자신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근할 만한 곳을 한 곳 알고 있었다. 선배는 마장동에서 오는 길이다.
„그 표정 좀 저리 치워줄래“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에 서서, 버스 천장에 달려있는 손잡이를 잡고 있는 정장 차림의 팔들 밑으로 솔 선배가 표정을 찌푸리며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나는 버스의 중간쯤에, 솔 선배는 거의 맨 뒤쪽에 서 있는지라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3년 가까이 함께 그래픽 디자인을 해오다 보면 나처럼 상대방의 입모양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솔 선배에게는 오래 사귄 남친이 있었다. 족히 5년은 사귄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아무리 보아도 좋은 남친이라고 할 수 없었다. 우선 남자를 별 볼일 없게 만드는 3대장인 술, 게임, 그리고 SNS를 너무 좋아했다. 무엇보다 회사도 다니면서 하루에 스토리만 열개 이상 올릴 정도로 인스타그램 중독이었다. 그렇다고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이 또 흥미로운 거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신발을 사거나,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거나, 새로 산 신발을 신고 술을 마시면서 게임을 하거나. 어쩜 이렇게 남자들이란 지루한지. 맛있는 디저트도 안 먹고, 재밌는 책도 안 사읽고, 여행을 다니지도 않는다.
아무튼, 솔 선배랑 헤어지게 된 일도 바로 그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로 올린 한 장의 사진이 시작이었다. 선배가 말해주기를, 선배의 남자친구가 이자까야에서 친구들이랑 술을 먹는 사진을 스토리에 올렸는데, 그 사진의 프레임에 누군가의 한쪽 팔이 걸려있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술자리에 같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사진에 같이 찍히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솔 선배는 직감했다. 선배는 우선 스토리의 그 사진을 저장한 다음에 포토샵으로 열었다. 술집의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이런저런 술들 중에는 어느 북유럽 나라의 프리미엄 보드카도 있었는데, 고 광택 알루미늄 재질이라 주변의 모든 것을 반사하고 있었다. 솔 선배는 6년 차 프로 디자이너의 솜씨로 보드카 병을 확대하고, 디스토트와 워프 툴을 사용해서 병에 맺힌 상을 평평하게 폈다. 그리곤 사진에 한쪽 팔만 등장했던 사람의 정체를 밝혀냈다. 솔 선배가 아는 사람이었다. 남자친구가 대학을 다닐 때 잠깐 만났었던 4학번 아래 후배. 선배의 남자친구는 그 술자리에 누가 있었냐고 솔 선배가 물어봤을 때 그 후배의 존재에 대해서는 함구했었다. 그 „말하지 않음“ 이 거짓말인지 아닌지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갈렸다. 비슷한 논쟁이 이미 여러번 있었었다. 이런 저런 날들 끝에 결국 솔 선배가 헤어지자고 했다. 바로 저번 달 쯤이었다. 마장동이 그 사람의 집이었다. 언젠가의 크리스마스이브 때 나는 솔 선배랑 함께 퇴근길에 와인을 사들고 402번 버스를 타고 그 집에 가서 함께 파티를 했던 적도 있었다.
사람들을 헤치고 우리는 겨우 버스에서 내렸다.
„참 또 이런 걸 들키네.“ 보행자 신호를 기다리며 솔 선배가 멋쩍게 말했다.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선배에게서 달콤한 꽃 향기가 났다. 순간 내게 선배가 그날 뿌릴 향수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새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하지만 가설을 검증하거나 설득력을 따져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선배에게 씩 웃어 보였다.
„뭘 들켜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신호가 바뀌었고,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솔 선배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맞다, 어제 팀장님이랑 미팅 다녀온 건 뭐였어? 킥오프 미팅이었다더니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고. 오후 내내 회의였던 거야?“
„아, 네. 무슨.. 그러니까 신발 회사였는데, 왠지 모르게 내부 의사결정이 안 되어 있는 상태로 미팅을 잡는 바람에, 저희를 앉혀놓고 자기들끼리 엄청 싸우더라구요.“ 나는 순간 머리를 열심히 짜내서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었다. 어제 만난 사람들이 자신들이 말해준 이야기들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누구에게든 말한다면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은 확실했다.
„신발회사? 나이키? 아디다스?“ 선배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저도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였어요.“
„하긴, 그런 큰 회사들이 일을 그렇게 엉망으로 할 리가 없지.“
***
„잘 들어요. 은우 씨. 은우 씨의 회사 컴퓨터에 에어박스라는 클라우드 백업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죠? 대답 안 해줘도 괜찮아요. 다 알고 있으니까. 아무튼 몇 달쯤 전에 처음으로 에어박스 본사에서 이상한 에러를 발견했어요. 서버에 특정 사용자의 파일이 백업될 때 생성 날짜가 오늘이 아닌 내일이나 모레, 혹은 몇 년 뒤의 미래로 기록되는 문제였는데요. 회사의 기술팀이 여러 번 들어다 봤지만, 프로그램이나 서비스에 오류는 없었어요. 그러다 조사 과정에서, 클라우드 서버에 생성된 백업 파일과 같은 내용을 가진, 같은 이름의 파일이 그 특정한 사용자의 로컬 컴퓨터에서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했죠. 그것도 백업 파일에 기록된 생성 날짜와 시간에 말이죠. 네. 말하자면 클라우드 서버에 미래의 파일이 백업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컴퓨터의 주인이 바로 은우 씨고요.„
실장님은 정말 진지한 표정이었다. 나는 내용을 모두 이해했음에도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저희가 이미 한 달가량 은우 씨를 지켜봤어요. 컴퓨터를 수거해서 조사해보기도 했고요. “
„네? 하지만 저 계속 제 맥북을 쓰고 있었는데…“
실장님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 같은 모델을 새로 사서 파일이랑 세팅 등등을 모두 다 옮겼죠. 스티커도 같은 것들 구해서 같은 자리에 붙이고.“
„구하기 힘든 스티커들도 있었을 텐데…“
„저희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게, 당신들 대체 누구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은우 씨는 한 달쯤 전부터 새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클라우드 서버에는 계속 미래의 파일들이 동기화되고 있더군요. 그 말인즉슨 이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컴퓨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우씨 당신에게 있다는 거죠. 그게 정확히 어떤 건지는 저희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내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보고 읽었던 시간여행과 관련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백 투 더 퓨쳐, 닥터후, 시간을 달리는 소녀… 모두 다 주인공이 시간을 넘나들며 모험스러운 모험을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나는 그냥 회사에서 디자인 시안이나 만들고 있고, 시간 여행을 하는 것은 내 허접한 시안 PDF 파일이나 회의록 파일이나, 사다리 타기로 점심 메뉴를 고른 결과 같은 것들이라고? 아니 아니 그것보다, 그 파일들이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원인이 나에게 있다고?
„아… 혹시 저 이제 잡혀가는 건가요.. 어디 실험실 같은 곳으로…?“
„그런 옵션도 염두에 두고 있었죠.“ 실장님은 마치 시리에게 오늘 날씨에 대해 묻는 것 마냥 말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왜 은우 씨가 만드는 파일이 자꾸 시간을 거슬러 동기화되는지를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거든요. 은우 씨가 저희를 위해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실장님의 말을 되새겨 보며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벌컥 하고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팀장님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커피 핑계로 나를 쫓아내더니 그 새 회의를 하고 있었죠? 다들 하나같이 왜 그러는 겁니까 대체. 여기 이 사람은 그냥 디자이너고 나는 팀장이에요 팀장! 내가 회의에 참가하는 것이 일의 수월한 진행을 위해서도 좋단 말입니다!“
팀장님을 데리고 커피를 마시러 나갔던 주현이란 사람도 곧바로 들어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실장님은 고개를 젓더니 팀장님을 바라봤다.
„박현 팀장님이시죠.“
„아, 네 저 박현입니다. „ 실장님의 차분한 말투가 팀장님을 당황시켰다.
„실례지만, 성함이….“
„김실장이라고 해두죠.“ 실장님은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서 은색의 금속으로 된 명함지갑을 꺼내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반사적으로 팀장님도 자신의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실장님에게로 넘겼다. 팀장님이 명함을 받아서 앞 뒤를 살피는 것을 나는 곁눈질로 보았다. 하얀색 210G 두께의 백상지 명함 왼쪽 위에는 옛날의 버디버디를 떠올리게 하는 날개 달린 신발 모양의 심벌이 있었다. 밑에는 영어로 타임레스 슈즈라고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위장회사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로고와 명함 디자인 새로 할 생각은 없나, 나한테 맡겨준다면 회사 견적의 반 값으로 잘해줄 텐데.
실장님은 일어나서 자신이 앉았던 의자를 책상 밑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회사에서 조금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원래 저는 오늘 프로디자인의 여러분들에게 같이 할 프로젝트를 제안드리고 싶었는데, 저희 내부적으로 정리가 아직 안되어 있었나 봅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헛걸음하게 되셨네요.“
실장님은 당황해하는 팀장님을 스쳐 지나가며, 정확히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리가 되는대로 다시 곧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 그리곤 회의실 밖을 빠져나갔다.
***
어떤 정리가 필요하다는 걸까. 준다는 연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일러스트레이터로 카탈로그에 들어갈 아이콘을 그리면서 나는 이런저런 가능성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지만,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보이스 피싱, 아니 면전에 대고 사기를 치는 것이니 페이스 피싱 같은 것이 아닐까.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어제 실장님이 말한 것처럼, 오늘의 식사 메뉴 정하기 당번은 나였다. 나는 에어박스에 회사 근처의 식당들을 다 모아서 사다리 타기를 만들어놓았는데, 항상 그 식당들 중 최근 3일 이내에 점심을 먹은 곳을 제외하고 돌렸다. 사다리 타기에서 나온 식당을 나는 거의 예외 없이 오늘의 점심 식당으로 제안했었다. 왕돈까스와 왕냉면은 그 리스트에 있었고, 최근 3일 이내에 방문하지도 않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나는 마우스 커서를 옮겨서 실행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알았는지 솔 선배와 제임스, 그리고 AE님이 내 뒤에 서서 오전의 직장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관심사가 결정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빨간 라인이 쭉쭉 좌로 우로 왔다 갔다 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오늘의 점심 식당은 왕돈가스와 왕냉면이었다.
이럴 리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