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수도라고 하면 아마 다들 그런 곳을 떠올릴 것이다. 지어진 지 오래된, 어둡고 축축한 지하 수로. 바닥에는 더러운 물들이 흐르고 길은 미로처럼 복잡해서 길을 잃기에 십상이다. 쥐들을 마주치는 것은 일상이고, 하수도에 기거하는 괴물에 대한 도시 괴담도 한가득이다. 다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보셨다. 그건 다 유럽이나 미국, 그중에서도 역사가 오래된 도시들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하수도는 대부분 관으로 매립되어 있다. 서울은 여러분의 부엌이나 세면대, 변기에서 내려오는 물은 하수처리장에 도달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관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물론 우수가 합류하는 지점이 종종 있으니까 온전히 바깥과 격리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수관의 지름은 커봤자 워터파크의 튜브형 슬라이드 정도고, 따라서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더라도 서울에서는 하수도를 탈출 루트로 삼을 수 없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어서, 서울에도 몇몇 곳에는 지하도처럼 만들어진 하수도가 존재하긴 한다. 80년대에 대대적인 상하수도 개량 사업이 진행되기 전에 시범사업으로 만들어 두었던 곳 말이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처럼 규모가 크고 복잡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하수도’의 이미지에 들어맞는 공간이긴 하다. 어둡고 축축하고, 들리는 것으로는 물이 흐르는 소리와 첨벙거리는 내 발소리뿐인 이곳. 바로 나의 일터다.
가끔 중요한 물건들이 하수구로 흘러들어 가는 경우가 있다. 상당한 금액의 돈을 내고서라도 꼭 찾아야 하는 것들 말이다. 의뢰를 받고 하수도를 뒤져서 그런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일이다. 사람들은 이런 직업이 있는지도 모른다. 결혼반지가 세면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면 사람들은 먼저 배관공을 불러보지만, 배관공이 세면대 밑의 하수관을 열어보곤 반지가 이미 흘러내려간 것 같다고 말하면 포기하고 배우자에게 혼날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합리적인 생각이다. 내 작업비용은 비싸다고 하는 반지보다 몇 배 더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꽤 바쁜 편이다. 한국에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는 비싼 보수를 턱턱 지급할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고, 그들 중에 중요한 것을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능력에 맞지 않게 덤벙대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종종 나에게 연락을 했다가 보수가 너무 비싸다고 황당해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나는 그들에게 친절히 몇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 번째로 이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유럽의 협회에서 정한 기준 단가보다 나의 보수는 매우 낮은 편이라는 것. 두 번째로 하수도를 뒤지는 일이, 극한 직업 프로그램에 나온 그 어떤 직업보다 더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 세 번째로는 나의 의뢰 성공률이 92퍼센트에 달한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는 자기가 직접 내려와서 찾아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하수도 안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한국의 모든 대형 상하수도 시설은 국가 기반시설로 지정되어 삼엄하게 경비되고 있다. 공무원, 경비원들과 안면을 트고 친분을 쌓지 않으면 하수도 안에 들어갈 수 없다. 어찌어찌 들어간다고 해도, 하수도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한다. 물론 서울의 경우 하수 처리장을 통과하지 않은 하수라고 하더라도 이미 소규모의 정화조를 거쳐온 물들이기 때문에 분변이 떠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썩 좋은 냄새가 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직업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 보통 정화통이 달린 마스크를 쓰고 일한다. 나는 쓰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나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러니 이 일이 나에게는 천직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2
금색의 반지가 끼워져 있는 손가락을 나는 점심을 먹다가 발견했다. 나는 며칠째 어느 기업의 연구소에서 분실한 마이크로 칩을 찾는 중이었다. 하수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지역의 정화조에서부터 하수종말 처리장까지 이르는 길을 모두 훑어보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작은 로봇을 사용해서 하수관 속까지도 훑어봐야 할까 생각 중이었다. 물건이 작을수록 하수관에 퇴적된 이물질에 껴 있을 확률이 높아진다. 낚시 의자에 앉아서 장화를 신은 신발을 흐르는 물에 담근 채로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고 일어서려는데, (여러분의 비위를 걱정해서 말하자면, 종말 처리까지 마친 하수라서 맑고 깨끗하다. 이론적으로는 마셔도 문제가 없는 물이다) 물길 저편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마이크로 칩이라기엔 너무 큰 반짝임이었지만, 나는 우선 그쪽으로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남자의 손가락 하나가 콘크리트로 된 물길의 가장자리 틈새에 끼어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주워 들어 살펴보았다. 손톱은 잘 다듬어져 있었고, 손가락의 세 번째 마디에는 털도 조금 있었다. 금색의 반지가 껴져 있는 것으로 봐서는 네 번째 손가락인 듯했다.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단면 부분에 약간의 변색이 일어나고 있는 것 말고는 부패하여 있지 않았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난 하수도에서 별별 물건들을 다 주워봤지만, 사람의 신체 일부를 본 것은 또 처음이었던 지라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장식이 별로 없는 금반지에는, 그리 크지 않은 큐빅이 하나 박혀있었다. 디자인이나 마감으로 봤을 때는 비싸지 않은 반지였다. 금도금이거나 14K 정도일 것 같았다. 어쩌면 금반지의 안쪽에는 머리글자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겠지만, 벗겨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품속에서 마른 천을 꺼내서 손가락을 닦아낸 뒤, 허리춤에 찬 힙쌕에서 지퍼백을 꺼내 그 안에 손가락을 넣고 꼼꼼히 닫았다. 오늘 일은 이것으로 접어야 한다. 사람의 주검이나, 신체 일부를 하수도에서 발견했다면 그날은 일하지 않아야 한다는, 업계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룰이 있었다. 나는 낚시 의자를 접고 짐을 챙겼다.
하수 처리장의 백 씨 아저씨는 내가 들이민 지퍼백을 보고는 기겁했다.
"아니 이런 거를 주우면 어떻게 해!"
"제가 줍고 싶어서 주운 것도 아닌걸요. 어떻게 이런 큰 물건이 안 걸러지고 종말 단계까지 넘어올 수 있나요"
"그게 원래는 있으면 안 되는 일인데, 어딘가에서 흘러넘쳤나 보지. 아 제발 저리 좀 치워줘"
나는 지퍼백을 다시 품속에 넣고 말했다.
"그럼 제가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백 씨 아저씨는 아까보다 더 기겁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야 경찰이라니 절대 안 돼! 누구 직장에서 잘리는 것 보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사람의 손가락인걸요. 부패도 안 된 것으로 봐서는 막 방금 잘렸다고요. 손가락의 주인이 지금 집에 갇혀서 죽어가고 있을 수도 있어요."
"아 참, 말을 못 알아듣네. 경찰이 수사하면, 내가 당신 들여보내 준 것도 알게 될 것 아니야. 내가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그 푼돈 받고 당신이 허구한 날 여기 들락거리는 것 눈감아준 건 줄 알아? 그리고 손가락 하나 잘렸다고 사람 죽고 그러지 않아"
백 씨 아저씨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수도도 종말 처리장도 엄연히 국가가 지정한 보안시설이다. 법을 어기고 침입했을 때 내려질 수 있는 처벌은 수위가 꽤 높았다. 무엇보다 경찰이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기자들까지 모여든다면 최악이다.
"그럼 이거는 어떻게 하지요?"
"동작 그만, 그거 다시 꺼내지 말랬지." 백 씨 아저씨는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그냥 집에 들고 가. 집 근처 어디서 물고기 밥으로 주던, 땅에 파묻던, 아니.. 그냥 집 어딘가에 처박아 놔. 그냥 발견되지만 않게 해"
3
천변의 공터에서 나는 작업복과 작업화를 벗고, 약품으로 소독한 뒤에 검은 김장용 비닐봉지에 쑤셔 담고 비닐봉지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 그 봉지를 65리터짜리 등산용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직접 제조한 탈취제를 내 옷과 살에 꼼꼼히 뿌렸다. 머리카락에는 탈취용 파우더를 뿌렸다. 오늘은 냄새가 비교적 심하지 않은 곳들만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다. 냄새를 맡지 못하는 나로서는 내 몸에서 하수도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같은 지하철 칸에 탄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아는 수밖에 없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몇 번 그런 일을 겪었다. 분명히 꼼꼼히 씻고 닦고, 냄새날만한 것들을 밀봉했다고 생각했었는데도 내 몸 어딘가에서 하수도의 냄새가 풍겨왔던 것이다. 일이 익숙해진 지금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짐들을 챙긴 뒤 지하철을 타고 신림동의 내 집으로 돌아왔다.
작업복과 신발, 장갑 등을 약품을 탄 물에 담그고, 사용했던 물건들을 잘 닦아서 정리한 다음에 나는 책상에 앉았다. 스탠드를 켜고는 품속에서 지퍼백을 꺼내서, 담겨있던 내용물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은 차갑고 가벼웠다. 물에 담겨있었던 터라 불어났다는 사실을 나는 마치 살을 파고든 것처럼 조여져 있는 금반지를 보고 알았다. 잘린 단면은 깨끗했다. 잘 모르겠지만, 날이 잘 드는 칼로, 망설임 없이 한 번에 자른 것 같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나에게 물어봤다.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었다. 내가 돈을 쥐여주었던 전국의 많은 공무원이 줄줄이 조사를 받게 될 것이고, 나의 "직업" 역시 언론에 오르내릴 것이었다. 그것은 협회에서 제일 꺼리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제명될 것이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징역형을 살게 될 것이 확실했다. 확실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 손가락은 점점 부패할 것이었다. 냄새야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썩어가는 손가락을 내 집에 두고 싶지 않았다. 또한 무슨 이유에선지 이 손가락을 잘 보존해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나에게는 신체의 일부를 부패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처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 처리를 하는데 필요한 도구, 약품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4
협회의 가이드라인은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한 대응 예시들을 꼼꼼하게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손가락을 주웠는데 경찰에 신고할 수 없을 때 어떻게 하라는 내용은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하수도를 뒤지며 직접 조사해본다는 식으로 적혀있지는 않았었겠지만. 나는 우선 의뢰받은 일을 끝내는 데 주력했다. 마이크로 칩은 회사 연구소 건물의 정화조에도 시의 하수 처리장에도 없었다. 그 말은, 마이크로 칩은 분명 연구소의 정화조에서 처리장까지 이르는 하수관 어딘가에 껴있다는 말이었다. 인적이 드문 시간에 재개발 건축이 진행되고 있던 공사장 한 편의 맨홀을 열고 들어간 나는, 하수관에 구멍을 내어서 작은 로봇을 밀어 넣었다. 한 시간 만에 나는 마이크로 칩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내게 오는 의뢰를 모두 거절했다. 나에게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은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중개인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난감해했다. 지금까지 나는 내게 들어온 의뢰를 거절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중개인들에게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며 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었지만 다들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언제 다시 의뢰를 받으실 생각이신가요" 그중 한 명이 나에게 물어봤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집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보다 키가 더 큰 서울시 지도 위에는 빨간색 플러스펜으로 하수도관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느 지역의 하수도들이 어디서 우수관과 모이고, 어디서 더 큰 하수관으로 합쳐지고, 어느 하수 처리장과 종말 처리장을 거쳐서 어느 천으로 방류되는지에 대한 정보들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우선 내가 손가락을 주운 종말 처리장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곳을 기점으로 거꾸로 하수도들을 따라 올라가 봤다. 하수관은 마포구의 전체, 서대문구와 은평구 일부까지 뻗어있었다. 범위가 너무 넓었다. 보통은 내가 의뢰받는 일은 물건을 흘려보낸 지점이 명확했고, 일은 시작점부터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내려가면서 수색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수색 범위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넓어지긴 했지만, 다른 곳에서 내려와서 합류되는 수도관들은 홍수가 나서 물이 역류라도 하지 않은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사를 해야 하다 보니 이론적으로는 이 종말처리장과 연결된 수도관들을 전부 확인해야 했다. 어림잡아 계산해도 반년은 소요되는 일이었다.
이쯤 되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왜 이 일에 관심이 있단 말인가. 경찰에 신고할 수 없다면, 그냥 집 어딘가에 조용히 숨겨놓고 잊으면 될 것을. 반년을 들여서 모든 하수도관을 다 확인해 본다고 해도 별다른 게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손가락의 주인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병원에서 잘 치료를 받았을 수도 있다. 왜 자른 손가락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해답이 하수도의 어딘가에 숨어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나는 다른 아홉 개의 손가락이 발견되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구해내서 영웅이라도 되고 싶은 것일까? 나는 무엇을 바라고 이 모든 게 희미한 일에 덤벼든 것일까.
하지만 나는 사람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고, 잠을 자거나 배설을 하는 생존 욕구와 직결되어있는 행동이 아닌 이상, 그 행동을 유발한 진짜 동기를 명확하게 판별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상수도관, 하수도관, 전력선, 가스관, 통신관 같은 수많은 네트워크들이 촘촘히 매설된 이 도시의 지하처럼 사람 역시 수많은 레이어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무도 그 전체 레이어를 한 번에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보고 판단하고 행동할 따름이다. 그 범위 안에 무엇인가가 포착된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지퍼백에 담겨있는 손가락을 바라봤다. 방부처리는 잘 되었고, 손가락은 앞으로 백 년은 너끈하게 썩지 않고 이 모양을 유지할 것이다. 나는 손가락이 담긴 지퍼백을 작업복 주머니 속에 담았다. 생각은 이쯤에서 접고, 나 역시 내가 볼 수 있는 범위를 확인해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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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온전히 기술적인 판단에 의한, 기술적인 절차들이 진행되었다. 나는 능숙하게 확인이 필요한 하수관들의 번호를 매기고, 어떤 순서로 하수관들을 확인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일지를 따져서 계획을 세웠다. 작업에 필요한 소모품들을 새로 샀다. 여러 벌의 작업복을 새로 샀다. 로봇 세 대와 여분의 배터리와 충전기들도 샀다. 그리곤 세운 계획대로, 발견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부터, 종말 처리장에 가까운 지하도식 하수도들부터 차례로 조사를 시작했다.
찾아야 하는 명확한 물건이 없다 보니까 시간은 보통 때보다 두 배는 더 걸렸다. 빗물이 흐르는 길이 이미 합쳐진 뒤였기에 거리의 온갖 쓰레기들이 떠내려와서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대부분은 크기가 작은 물건들이었다. 라이터, 과자의 낱개 포장지, 찌라시, 낙엽, 병뚜껑, 담배꽁초. 모텔의 변기를 통해 흘러들어왔을 콘돔들, 양말과 속옷들. 찢기고 불어 터진 종이, 영수증, 명함, 증명사진, 향수병, 신용카드, 에어팟, SD카드, USB 스틱, 인주와 도장, 개똥이 들어있을 게 뻔한 묶인 검은 비닐봉지, 내용물이 녹아 없어졌을 가루약 봉지, 오락실에서 사용되는 작고 가벼운 코인들, 볼펜 뚜껑. 어느 한 곳에서는 포장지가 손상되지 않은 하리보 젤리를 다섯 개나 주웠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나는 점점 더 당황스러워졌다. 내가 줍는 모든 물건이 손가락의 주인과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어느 물건도 손가락의 주인과 확실하게 연결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나이프를 주우면, 이 나이프로는 사람의 손가락을 자를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이 플라스틱 나이프로 자르는 것을 시도하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서 변기에 버려버린 것일 수도 있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피인 것처럼 보이는 얼룩이 묻은 수건을 주웠을 때에는, 바로 이거다! 손가락을 자르고 지혈하는 데 사용한 수건임이 틀림없어,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곧이어서는 손가락이 잘린 것치고는 피가 너무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충분한 경력을 쌓았고, 나의 직업적 능력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가락의 주인과 연관된 무엇인가가 내 뜰채에 건져진다면, 나는 곧바로 그 물건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 5일가량 하수도를 뒤져본 뒤에 나의 자신감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연관이 조금이라도 있을 것처럼 보여서 일단 챙겨 온 물건들이 내 집의 곳곳에 놓인 큰 대야 안 약품들 위에 산더미같이 쌓여있었다. 마치 내가 환경미화원 아니면 재활용품 처리업자라도 된 것 같았다. 문제는 간단했다. 내가 찾고 있는 물건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나는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꺼내 들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작업용 확대경을 끼고는 반지를 가까이 들여다봤다. 색과 경도로 봐서는 14K. 박힌 큐빅은 다이아몬드 같은 비싼 보석이 아닌 저렴한 크리스탈. 그 외에는 별 다른 특이한 점이 없었다. 조금 꺼려졌지만, 반지를 빼서 안쪽 면을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니셜이라도 새겨져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에 불어버린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기가 쉽지 않았다. 반지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손상하지 않고 반지를 뺄 방법이 필요했다. 금속 공예용 줄톱으로 조심스럽게 나는 반지의 위와 아래를 톱질했다. 오래 걸리는 섬세한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손가락에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반지를 반으로 자를 수 있었다.
기대했던 대로, 반지의 안쪽 면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 이름의 머리글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P-1A-251라는, 코드명 같은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이 안쪽 면에 꽉 찰 만큼 큰 글씨로 적혀있었다. 마치 재고 관리를 위해 부여한 일련번호처럼 들렸다. 노트북을 열어서 구글과 네이버에 저 코드를 넣고 검색해봤지만, 뜨는 내용이라곤 하나같이 쓸데없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혹시 제조한 곳이나 판매한 곳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하고 다시 한번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반지에는 다른 글자라고는 적혀 있지 않았다. 소득이라곤 없는 셈이었다. 괜히 망자의 결혼반지나 두 동강 낸 샘이 되어 버렸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무엇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먼저 메모지에 반지에 적혀있던 알파벳과 숫자를 메모한 뒤에, 반지의 자른 부분을 먼저 때워 붙였다. 그다음엔 반지에 토치로 골고루 열을 가했다. 반지가 적당히 뜨거워진 다음에 나는 반지의 구멍 지름보다 조금 더 두꺼운 금속 봉에 반지를 늘려서 끼운 다음에 상온에 두고 천천히 식혔다. 커진 반지는 이제 손가락에 잘 맞았다. 나는 반지에 손가락을 끼우곤 다시 지퍼백 안에 넣었다.
6
탐색해야 하는 범위 중 뚫려있는 지하도를 흐르는 하수도를 모두 확인해 보는 데만 족히 일주일이 걸렸다. 건져 올린 것은 산더미였지만, 집에 들어와서 살펴보면 대부분이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하수도로 들어가기 위해 종말 처리장에 올 때마다 문을 열어주러 나오던 백 씨 아저씨가 한 번은 그 물건 어떻게 했느냐고 물어봤다. 혹시라도 내가 경찰에 신고했을까 봐 걱정인 눈치였다.
"썩지 않게 처리해서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래그래 잘했어. 오늘은 뭐를 찾으러 왔나?"
"뭔가를 찾으러 왔는데, 그게 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백 씨 아저씨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 저번에 발견한 손가락과 관련 있는 것들을 찾고 있거든요." 내가 대답했다.
"엥? 그런 의뢰가 들어왔다고?"
"의뢰가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그냥 제가 찾아보고 싶어서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처음 내가 백 씨 아저씨에게 내 직업에 대해 설명했을 때도 백 씨 아저씨는 정확히 이렇게 반응했었다.
"그냥, 뭐 해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것보다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다.
"나 원 참... 이제는 무슨 탐정놀이라도 하는 겨? 세상에서 냄새가 제일 고약한 탐정이겠구만!"
"뭐 그렇겠죠" 냄새를 맡아본 적이 한번도 없는 나로서는 조금 전 백 씨 아저씨의 말이 얼마큼의 모욕인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 그렇다면, 내가 하나 알려주지. 그 손가락은 아마 다-3번 하수관 쪽에서 나왔을 거야."
"다- 3번 하수관이라면, 상암동 쪽에서 오는 관이죠? "
"그래. 형씨가 손가락을 찾았다고 나한테 온 그날 아침에 상암동 쪽 중간 처리장에서 거름망 교체를 했거든. 근데 바보같이 기존의 거름망을 빼고 새로운 거름망을 끼려는 순간에 수위 경보가 울린 거야. 위쪽 하수관 격문을 닫고 작업을 해야 했는데 누군가가 깜빡한 거지. 뭐 하수관 물이 좀 내려온다고 거기가 다 잠겨서 사람이 죽고 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냄새도 나고 더럽잖아.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일단 거름망을 달지 않은 채로 제어실로 돌아와서는 격문을 닫고 다시 돌아가서 작업을 완료했다고. 손가락 크기로 봤을 때는, 그 거름망을 통과하지 못해. 그 순간에 흘러 들어온 게 분명해."
맞는 말이었다. 상암 중간 처리장은 내가 다음으로 수색하려고 생각하고 있던 몇몇 중간 처리장 중 하나였다. 중간 처리장에 가면 제일 먼저 확인해보는 것이 바로 그 거름망들이었다. 백 씨 아저씨의 말이 정확하다면 수색해야 할 범위가 갑자기 1/100으로 좁혀진 것이었다. 나는 품속에서 방수 필름 안에 껴진 지도를 꺼내곤 다-3번 하수관을 찾았다. 그리곤 그곳으로 흘러드는 하수관들을 훑어보았다. 상암동, 올림픽 경기장, 하늘공원, 디지털 미디어 시티, 그리고 방송국들의 사옥과 촬영 스튜디오가 몇 개. 그리고 서울 어디가 그렇듯 많은 수의 아파트 단지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다-3번 하수관은 전국에서 악명이 높은 난지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었다.
"아 잠깐, 하나만요. 그게 왜 작업일지에는 적혀있지 않는 거죠?" 내가 물었다.
"누가 그런 걸 작업일지에 있는 족족 다 쓰겠어. 다 인사고과에 반영되는데. "
백 씨 아저씨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 뭐야. 작업일지를 다 보고 있어? 그건 누가 보여주는 거야!"
7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와 갈대 때문에 데이트의 성지가 되어버린 듯한 하늘공원 밑에, 수십 년 동안 서울에서 배출된 쓰레기들이 묻혀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안다. 하지만 막상 하늘공원에 가보면 그 사실은 어디에서도 티가 나지 않는다. 밑에 묻힌 쓰레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불쾌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공학의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밑에 파묻힌 쓰레기들은 지금도 썩고 있고, 100년이 지나서도 계속 썩어갈 예정이다. 쓰레기들이 분해되면서 배출되는 메탄가스들은, 보이지 않게 심어진 관들을 통해 모여 처리된다. 쓰레기들에서 나오는 오염된 물들도 마찬가지로, 매립장 지하 제일 밑바닥에 설치된 배수 시설을 통해 배출된다. 그 하수들은 오염상태가 심각해서, 일반 하수들과는 다른 처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관리 주체도 상하수도 공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 배수시설이 처리하지 못하는 오염된 하수들이 계속해서 하늘 공원 밑에서 흘러나오고 있고, 그 하수들을 처리하기 위해 추가로 하늘공원 인근 지하에 만들어진 것이 난지 하수도이다. 이 곳의 냄새에 대한 악명이 얼마나 높으냐 하면, 이 시설을 담당하는 상하수도 공사 마포 지사가 전국의 상하수도 공사 지사 중에서 제일 발령받기 싫은 곳으로 매년 꼽힐 정도이다. 일하면서 나 역시 난지 하수도를 두 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나에게는 다른 하수도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난지 하수도로 흘러드는 하수 중에는 매립지에서 나오는 물 뿐만 아니라 상암동의 상업시설과 방송국들에서 배출되는 물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바로 짐을 챙긴 뒤 택시를 잡아타고 난지 하수도로 향했다.
하수도 입구에 들어서서 첫 번째 거름망에 걸러져 있는 덩어리들을 봉투에 털어 넣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최 씨였다.
" 바쁘시죠" 하고 내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형씨, 왜 일을 안하신다는 거죠? 덕분에 일이 너무 많이 몰린다구요. 벌써 은퇴라도 하시나요? 아니면 갑자기 후각이 돌아오셨나?"
이 사람은 깐죽거리는 게 특징이다.
"개인적으로 찾아야 할 게 있어서요."
"찾아? 찾는 거야 우리가 맨날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뭔데요."
"그걸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막걸리인가요."
나는 한숨을 쉬고,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단 한 명 뿐인 동종 업종 종사자라는 특수한 관계다. 직업적인 부분에서 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잠깐만, 지금 손가락이라고 했어요?"
"네"
"금반지가 껴져 있고요. 상암동 쪽에서 내려온 것 같구."
"맞아요"
최 씨가 침을 꿀떡 삼키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선명히 들려왔다.
그리곤 곧이어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하 아이고 하하하 이거 참... 아무래도 그거 제 클라이언트가 찾는 물건인 것 같네요."
8
"잠깐, 혹시 난지 하수도에서 오셨어요?"
방송국 건물 로비에서 나를 만난 최 씨가 코를 부여잡고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입구까지만 갔다 들어가지도 않고 왔는데요. 냄새가 심하다면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요." 하고 최 씨는 가방을 뒤적거린 뒤 페브리즈를 꺼냈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리곤 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스프레이를 뿌려댔다.
"이제 좀 낫네."
어깨를 으쓱하며 최 씨가 말했다. " 어디 한번 먼저 봅시다. 그 손가락이라는 거"
나는 품속에서 지퍼백에 담긴 손가락을 꺼냈다.
" 와, 이거 진짜 그럴듯하네. 나라도 진짜 손가락이라고 믿었겠어요."
최 씨는 지퍼백에 담긴 손가락을 꺼내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살펴보곤, 코를 킁킁거렸다.
"약품 냄새가 나네"
"방부 처리를 했으니까 나겠죠"
"봐요, 형씨. 이게 다 형씨가 냄새를 맡지 못해서 그래. 진짜 손가락이었다면, 살이 썩는 냄새 같은 게 났을 거 아니요. 냄새가 안 난다면 가짜인 거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쪽 말이 맞네요. "
최 씨는 지퍼백을 잡고 한 손으로 빙빙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 그래서, 5:5?"
"그건 말이 안 되지. 내가 찾았는데"
"하지만 형씨가 거절한 의뢰를 내가 받아서, 그 덕분에 우리가 돈을 벌게 된 건데?"
" 7:3. 내가 7"
" 6 :4. 내가 6"
나는 벌떡 일어섰다. "아무리 봐도 나는 이거 진짜 손가락 같은데. 나는 내가 찾는 걸 계속 찾을 테니, 형씨도 계속 찾아보쇼. "
"아 정말 왜 이러시나..." 최 씨는 입맛을 다신 뒤, 잠깐 고민하다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7:3으로 하죠. "
"내가 7인 겁니다."
최 씨의 말은 이랬다. 상암동에 있는 한 방송국에서 제작 중인 리얼리티 TV쇼가 있었다. 범죄 현장을 재현하여 꾸민 다음 게스트들을 부르면, 그 게스트들이 주어진 상황과 증거들을 참고해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하는 내용이었다. 파일럿 회에서는 영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사건을 소재로 삼았는데, 현장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엄지손가락밖에 없었고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추리소설과 퀴즈 애호가였던 신입 피디가 이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맡게 되었는데 어떻게든 성공해 보이겠다는 마음이 커서, 극의 제일 중요한 소품인 잘린 손가락만은 정말 좋은 퀄리티로 만고 싶었다. 때마침 한국 로케이션을 와 있던 할리우드의 호러 영화 프로덕션 매니저로 자신의 지인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피디가, 지인에게 부탁해서 특수 분장팀의 소품 중 하나였던 손가락을 힘들게 대여했는데, 박봉에 지치고, 험한 언행에 치인 막내 스텝이 그 손가락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려버린 다음에 잠적을 해버렸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촬영은 코앞이고,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는 제대로 된 절차 없이 소품을 빌린 프로덕션 매니저를 고소하겠다고 으르렁거렸다. 피디는 이리저리 수소문하다 하수도로 떠내려간 물건들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중개인들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내된 층의 회의실로 갔다. 불쌍한 피디님은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품에서 지퍼백을 꺼내서 보여줬더니 그제야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일인데요. 뭐"
"와 그런데, 역시 할리우드 사람들은 정말 수준이 다르네요. 어디서 봤으면 그냥 진짜 사람 손가락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이 뼈 하며 힘줄 하며, 잘린 부분들까지."
피디는 안경을 고쳐 쓰고 지퍼백을 열어서 손가락 모형을 꺼낸 뒤에, 이리저리 돌려 가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피디님은 처음 보시나 보네요"
"네, 워낙 바빠서요. 생방 시작이 금방인데, 선생님들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네~ 네. 작업비는요?" 최 씨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물었다.
"아, 여깄습니다." 피디가 품에서 갈색의 돈 봉투를 꺼냈다. 오만원권으로 이 정도 두께. 중개인에게 들었던 금액이 맞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와 최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피디님이 말했다.
"잠깐만요, 제 아는 피디가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아니요."
"아니, 그렇다면 극한 직업 피디가 또 제 지인인데..."
"피디님, 이 일은 비밀 엄수가 조건이라는 것, 분명히 전달받으셨을 텐데요."
"네, 맞아요. 그랬죠.. 죄송합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좋은 방송 아이템이 보이면 참 그걸 포기하기가 쉽지 않아서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저는 방송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한 손에 모형 손가락을 들고 피디님은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복도에서 보니, 그 피디님은 손가락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고 있었다.
9
집에 들어온 나는, 욕조에 물을 받아서 천천히 목욕했다. 저녁으로는 피자를 시켰다. 집은 하수도에서 건져 올린 잡동사니들 때문에 난장판이어서 나는 티브이를 틀어놓고는 피자가 오기 전까지 정리를 좀 할 생각이었다. 티브이에서는 방금 봤던 피디가 제작하는 리얼리티 추리 프로그램이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 예쁘고 잘생긴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과 덕력이 높다는 래퍼 한 명, 말을 조리 있게 잘하기로 유명한 변호사와 꿋꿋하게도 매번 안 먹히는 아재 개그를 시전하는 중년의 남자 방송인이 나와서 자기소개를 하고, 서로의 역할을 정하고 있었다.
모든 잡동사니를 다 쓰레기봉투에 넣고 나니, 피자가 배달되었다. 나는 소파 앞의 낮은 테이블에 피자를 올려놓고, 마지막으로 오늘 난지 하수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둬갔던 덩어리들이 담겨있는 봉투를 열었다. 마치 진흙이나 펄 같은 덩어리들이 한가득이었다. 쓰레기봉투 안에 그대로 봉지째로 넣어서 버릴 생각이었지만, 남은 쓰레기봉투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봉투를 들고 그대로 화장실로 갔다. 변기를 열고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그리고는 물을 내렸다.
소용돌이를 따라 원을 그리며 빨려 내려가는 진흙 덩어리들 사이로 나는 사람의 손가락을 보았다. 손가락은 순식간에 다른 덩어리들과 함께 빨려 내려갔다.
나는 멍하게 고개를 돌려 티브이를 보았다. 티브이 속에선 잘생긴 남자 아이돌 멤버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들고 너무 진짜 같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