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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다.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안중근의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도장을 잘 살펴보면, 그가 왜 일찍 죽었는지 알 수 있다는 거다. 말이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짧은 생명선이 문제였다.
그 친구가 손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도 웃겼다. 몸이 불편해 대중교통을 타는 것이 어려운 어머니가 구청의 문화강좌에서 꽃꽂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토 일 오전마다 어머니를 데려다주어야 했다. 꽃꽂이 강좌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할 게 없었던 그 친구는 시간이 겹치는 강좌 중 자리가 비어있는 것에 자기를 넣어달라고 직원에게 요청했다. 그렇게 들어간 것이 손금 강좌라고 했다.
“진짜 웃긴 건 뭔지 알아?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내가 갑자기 깨달았거든. 선생님이 한 번도 우리에게 자기 손바닥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을 말이야. 지금까지 수업하면서 PPT랑 다른 사람들 손바닥 사진만 보여준 거야. 자신의 손바닥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편했을 순간이 자주 있었을 건데, 기를 쓰고 보여주지 않았던 거라고. 자신의 운명선, 감정선, 지능선, 생명선의 길이와 모양을 말이야. 뭐 그건 그렇고, 이 나이 먹고 어디 술집 같은 데서 처음 보는 여자에게 손금 봐주겠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아쉬운 김에 네 거나 한 번 봐줄게.”
손금을 통해 해 돈을 잘 버는지 못 버는지, 오래 사는지 일찍 죽는지 정도로만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생각보다 디테일한 친구의 말에 놀랐다. 나는 이성이 감정보다 강하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성의 유혹에는 쉽게 굴하고, 또 인생에 세 번의 큰 위기가 찾아온다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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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을 봐주는 모습을 나는 사실 자주 본다. 대학가의 술집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다. 2025년인 지금도 남자들은 손금을 봐주겠다며 마음에 드는 여성의 손을 덥석 덥석 잡아댄다. 잡히는 여성의 표정은 보통 영 좋지 않고,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고, 모두가 말없이 안주를 집어먹고 술잔을 비워대다가 결국엔 하나둘씩 사라져 버린다.
동창과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나는 오픈 준비를 했다. 주방에서 일하는 형은 언제나처럼 일찍 와서 재료를 손질해 두었다. 오늘은 월요일. 일주일 중 제일 한산한 날이다. 자리는 거의 비어있다. 하지만 뭐, 주말에는 너무 바빠서 보통 때는 가게 일에 신경도 안 쓰는 사장님까지 나와 일해야 할 정도니까. 이렇게 세계는 알아서 균형을 맞추며 굴러간다.
“그래서- 오빠도 손금을 볼 수 있어? 나도 봐줄 수 있는 거야?”
맥주잔에 맺혀있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닦으면서 단골손님이 말한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대체 왜 자꾸 오빠라고 부르는 겁니까” 하고 내가 툴툴거리자 손님은
“그거야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쪽은 생맥을 기가 막히게 잘 따른다고. 난 마음에 들면 오빠라고 부른다고. 그러니까 주방에 계신 분은 아직 아저씨인 것으로” 하고 말한다.
“부담스러우니까 우리는 친해지지 않는 것으로” 하고, 주방 쪽에서 형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답했다.
라디오에서는 조 빔의 보사노바 노래가 나오고 있다. 나는 맥주잔의 남은 물기를 행주로 닦고 있고, 단골손님은 바에 앉아있다.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다는 말이다. 길쭉하고 높은 테이블은 구색 맞추기 용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이 손님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애당초 이 사람은, 대학생들을 타깃으로 삼는, 맛없음을 저렴한 가격으로 퉁치는 우리 술집에 오기에는 인생을 좀 오래 살았다. 크림생맥에 노가리보다는, 치즈와 와인과 좀 더 어울릴 것만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주일에 두세 번, 꼭 평일에만 이곳에 와서, 맥주를 두 잔 정도 마시고 간다. 언제나 혼자서.
“사실은 말이야. 내 전 남편도 손금 봐주겠다고 하면서 접근했거든. “
“결혼하셨던 적이 있었는 줄은 몰랐네요.”
“그거야 뭐-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튼 들어봐 봐. 나는 타로도 사주도 믿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운명선과 수명선이 중간에 꼬여있어서서 큰 사고가 한 번 날 거라고. 그런데 살아남으면 운명이 좋은 쪽으로 바뀔 거라고.”
“사고가 났나요?”
“아니, 자연재해나 교통사고나 그런 일은 없었어. 그래서 봐라- 다 뻥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알겠어. 그 사람을 만나고 결혼했던 게 큰 사고였던 거야. 살아남았으니 이제 좋은 날만 남은 거지.”
어른의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가 오면 알게 될 수밖에 없겠지. 일단은 할 수 있는 리액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좋은 날들을 위하여 건배“
단골손님의 맥주잔과 내 물컵잔이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아무리 손님이 없는 월요일이라지만, 일하는 중에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혼자서 술 마시게 내버려두는 것은 정이 없는 일이라며 이 손님이 타박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꿈쩍도 하지 않으니 이제는 포기한 듯하다.
2
라디오에서는 이제 시끌시끌한 케이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에 앉은 단골손님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폰을 집어 들고 인스타그램을 훑어보고 있다. 창가 쪽 테이블에는 누가 봐도 체대생인 것 같은 옷차림에 머리스타일을 한 남자 세 명이 치킨 한 마리를 시켜놓고 생맥주를 마시고 있다. 손님은 이 네 명이 전부다.
그런데 체대생 세 명이 정말 시끄럽다.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정확히 들을 수는 없지만, 말투며 종종 터져 나오는 웃음 하며 박수를 치고 다리를 떨고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학교 사람들에 대해 서로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교환해 가며 퍼즐을 맞춰가고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어떤 선배며 어떤 후배며 강사나 교수며, 누가 누구랑 사귀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기타 등등. 새로 주문한 생맥주 세 잔을 가져다주러 그 사람들이 앉은자리에 갔는데, 이 친구들이 내기에 졌으니 벌칙을 해야 한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거 불안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종류의 예감은 보통 현실이 된다.
세 체대생 중 제일 덩치가 작은, 그러나 나보다는 어깨너비가 두 배, 흉곽의 앞뒤 길이도 1.5배는 족히 될 것 같은, 반삭에 피부가 검붉은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더니 여전히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스크롤하고 있었던 단골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누님”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을 확인한 단골손님은,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누군가가 있는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다. 단골손님이 한 박자 늦게 “… 나?” 하고 말했다.
“네. 그렇게 둘러보셔도 그쪽밖에 없는데.”
“왜, 여기 이 바텐더 분도 있잖아.” 단골손님이 눈짓으로 나를 가리킨다.
체대생 친구가 나를 바라본다. 어이없다는 듯이.
“저 그런 취향 아니거든요.”
참나- 나도 너 같은 사람 취향 아니거든. 나는 설거지를 끝낸 수저의 물기를 닦으면서 말했다. 물론 속으로.
“아무튼, 번호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체대생 친구가 자신의 폰을 단골손님에게 불쑥 내밀며 말한다.
“어머 뭐야. 이거 뭐 그런 거야? 헌팅?”
창가 쪽 자리를 바라보니, 두 명의 체대생 친구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킥킥대고 있었다. 내가 직원이 아닌 사장이었다면 이 무례한 멍청이들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을 텐데.
폰에 숫자를 입력하던 단골손님이 갑자기 폰을 들고 있던 체대생의 손을 덥석 잡더니 말했다.
“얘 좀 봐라. 손금이 재밌네”
“손금이요?”
“감정선이 갈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위로 치솟은 모습을 보니 한 가지에 집중을 잘하는 친구네. 이거 봐”
단골손님은 체대생의 손에서 폰을 뺏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음, 손을 잡아끌어 나에게 보여준다.
나는 감정선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본다.
“거기다 운명선도 뚜렷해. 자신의 삶을 진취적으로 개척해나가게 되겠어.”
“에이 구라 치지 말아요. 손금으로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요? 점도 아니고” 체대생은 바 위로 뻗어진 손을 다시 내리려 하지만 단골손님이 손을 놔주지 않자 당황한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거든. 예를 들어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연애를 길게 하지 못한다던지, 지능이 높지 않아서 함께 지내는 무리의 친구들이 사실은 자신을 아랫사람처럼 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던지- 혹시 높은 확률로 네가 내기에서 진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어? 아, 그렇게 바보일 수는 없으니까, 남의 밑에 있을 때 안정감을 느끼는 타입일지도?”
체대생의 얼굴이 웃음과 당황 사이에서 몇 번이나 모양을 바꾸다가, 결국에는 화가 나서 폭발한다.
“이 아줌마가 진짜, 뭐라고요?”
체대생이 손을 뿌리친 다음 큰 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단골손님은 돌아보지도 않고,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아줌마가 아니야. 이혼해서 싱글이거든” 하고 쿨하게 대답한다. 나는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아서 이쪽을 주시하던 친구들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형도 바 쪽으로 나와서, 무슨 일이냐고 내게 눈빛으로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하고 눈빛으로 답했다.
체대생 손님들은 금방 자리를 떴다. 라디오에서는 분위기를 정리하기라도 하려는 듯 차분한 재즈가 흘러나왔다. 단골손님이 새로 시킨 맥주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나는 손님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예요?”
“뭐가?”
“손금으로 그런 거까지 알 수 있어요?”
“나도 몰라. 어쩌면 그럴지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본 거야.”
“그런 것 치고는 꽤 그럴듯하게 들리던데요.”
“예전에 그 이가 하도 이야기했었어서. 그리고 말로 애기 한 명 울리는 거야 어려울 것도 없지.”
이런 말을 뻐기는 느낌 없이 할 수 있는 어른의 삶에 대해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이번에는 조금 일찍 알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가게의 문이 열렸다. 손님인가 했는데 사장님이었다.
“엇, 무슨 일이세요? 오늘 나오시는 날 아니잖아요.”
“내가 불렀어. 아까 무슨 싸움이라도 일어날까 싶어서.” 주방 쪽 문가에 기대어 서있던 형이 대신 답했다.
그런데, 단골손님의 표정이 영 이상하다. 사장님의 표정 역시.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사장님이 말한다.
“술집에 술 마시러 왔다. 왜!” 단골손님이 대답한다.
3
사장님이 결혼했었던 것도, 이혼했었던 것도 나는 몰랐다. 그 상대가 단골손님이었다는 것도. 큰 덩치에 수염마저 북실북실 나있는 산적 같고 말수가 적은 사장님이, 손금을 봐주겠다며 누군가의 손을 잡아끄는 모습이 영 그려지지 않았다. 전 남편의 가게에 자주 홀로 와서 맥주를 마시고 가면서, 그럼에도 전 남편이 출근하는 주말은 피하는 단골손님의 모습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역시 어른의 삶이란 되도록이면 늦게까지 모르고 싶다.
사장님과 단골손님은 함께 나갔고 가게는 한산하다. 손님은 더 오지 않고, 라디오에서는 가사에서 덕수궁 돌담길이 언급되는 옛날 가요가 나오고 있다. 좀 전까지 단골손님이 앉아있던 바 자리에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한 형이 주방을 버려두고 나와 앉았다. 우리 앞에는 생맥 한 잔씩이 놓여 있다.
나는 문득 안중근의 손금이 궁금해서 폰을 꺼내 인터넷을 찾아봤다. 동창의 말처럼, 손도장에는 안중근의 손금이 무척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서 무엇이 생명선이고, 무엇이 감정선이고, 무엇이 두뇌선인지를 구분해보려 했지만, 선들이 서로 엉켜있고 끊어져 있어서 쉽지 않았다. 나는 폰을 바닥에 놓고, 그 옆에 내 손바닥을 가져다 대 보았다. 왠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형의 손바닥까지 가져다 두었다. 그러니까 이 선들이, 우리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살이 접히고 접히다가 우연히 겹쳐지며 생긴 주름들에 불과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우리를 찾아올 것인지를 말해준다는 거지? 그래서 누군가는 손금을 용하게 본다는 소문만으로 강남에 있는 빌딩을 사고, 누군가는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며 생명선의 끝을 칼로 긁는단 말이지?
“다 봤지? “ 형이 자신의 손을 걷어가며 말했다. “맥주 한잔이나 더 따라봐. 이상하게 네가 따라주는 생맥이 진짜 맛있더라”
나는 내 손바닥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여기 어딘가에 생맥주 선이 있는데, 그 선이 깨끗하고 올곧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