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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rnard Street Mar 21. 2024

20억의 선(先)인세를 받는 작가

그리고 epiphany


삼십여 년 전 봄날 오후에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내 손에 하늘하늘 떨어져 내려온 것의 감촉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그 일 년 뒤의 오후에 센다가야 초등학교 옆에서 주운 상처 입은 비둘기의 온기를 똑같이 내 손바닥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항상 그 감촉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런 기억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안에 있을 터인 뭔가를 믿는 것이고, 그것이 키워낼 가능성을 꿈꾸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감촉이 나의 내부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무라카미 하루키


몇 년 전, 하루키의 신작 소설이 한국 출판과 함께 20억의 선 인세를 받게 됐다는 소식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손에 꼽히는 한국의 중견 작가도 고작 수백만원의 선인세를 받는 어려운 출판업계의 현실 속에서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키는 왜 특별한가?


조금 억지스러운 이야기 같기도 하고조금 허무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지만하루키는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오후야쿠르트 야구경기를 보러 간 도쿄 진구 구장에서 우연히 홈런볼을 두 손으로 캐치하게 되었고그 순간 문득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곧장 문방구에 들러 만년필과 원고지를 샀고그날 밤부터 부엌의 식탁 위에서 소설쓰기를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그 하나의 사건이 하루키 개인에게는 epiphany, 일종의 계시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쉽게 말하자면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 앞에 쓱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뀌게 된 것이다.


사실무엇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홈런볼을 잡는 일은 어느 경기장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 일을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였고그로 인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정작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사람들에게서는 이러한 epiphany의 순간들이 꽤 자주 관찰된다.


스스로가 강한 운명의 힘이랄까, 혹은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을 느끼는 순간을 겪게 되고그러한 원동력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항로가 크게 바뀌는 패턴인 것이다이유 없는 자신감자기 확신 같은 것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윈스턴 처칠이 참가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도성공과 실패로 점철된 스티브 잡스의 인생역경 속에도홈런볼을 캐치한 하루키의 개인적 체험 속에도 이러한 순간들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어쩌면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도 문득문득 이러한 순간들은 휙휙 소리없이 스쳐지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보면결국 깨달음의 순간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루쯤 기분 좋았을 홈런볼이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30년이 넘도록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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