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같은 기적을 기다리며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을 보고

by 송동섭

26년 1월 초, 현재 ‘이란’은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출국을 권고하는 국가에 해당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란은 대규모 시위와 유혈 진압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끊기지 않고 있다. 지난 나의 학창 시절인 8~90년대에 중동의 화약고라고 해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연일 국제뉴스에 반복해서 등장하여 국가의 이름과 지구상 어딘가에 있다고 아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역만리라는 가름도 어려운 거리에 있는 그들은 뿌연 사막을 가로지르며 터번을 두르고 하얀색 천으로 된 옷을 입고 총을 들고 있는 무리의 이미지가 전부였다. 강렬한 투쟁의 이미지가 전부일 때, 내가 막 20대 중반을 지날 즈음 국내에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라는 이란 영화가 개봉되었다. 마냥 공격적이면서 전투적일 것 같았던 그들의 문화가 (최소한) 영화는 전혀 그 정반대편에서 아주 멀리 그들의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란 영화는 어느 다른 나라의 영화와는 또 다른 영상과 감성으로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란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는 우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아스가르 파르하디, 마지드 마지디, 자파르 파나히가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체리향기> 등으로 이란 영화를 세계에 알린 이란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시적인 영상미를 보여준 감독이다.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세일즈맨>으로 현대 도시 중산층의 심리를 긴장감 있게 연출하는 감독으로 2011,201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마지드 마지디 감독은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영화로 알려진 감독으로 가난한 서민과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서정적인 영상으로 연출하는 감독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위에서 언급한 3명의 감독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3명의 감독이 서정적 영상으로 감성적인 것과 인간의 보편 심리를 묘사한 드라마를 보여주었다면, 파나히 감독은 이란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담아 내는데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이란 정부로부터 제한 받는 관리 대상이 되었고, 정부로부터 가택연금, 영화 제작 금지, 감옥에 구속되는 등의 제재를 받았다. 그럼에도 감독은 영화를 꾸준히 연출하고 국제 영화제를 통해 공개하므로 이란 정부가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고발하듯 외부 세계에 알린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은 25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 역시 영화 제작이 제한된 상태에서 정부 몰래 출품하여 최고의 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번 상으로 파나히 감독은 <써클>로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과 <택시>로 베를린 영화제의 황금곰상을 수상하여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역대 4번째(앙리 조르주 클루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버트 알트만)이면서 현존하는 유일한 감독이다. 영화는 어느날 주인공 바히드가 근무하는 정비소에 자신을 고문했던 사람으로 추정되는 에그발을 발견하고 그의 소재를 확인하고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전개된다. 바히드는 자신을 고문한 에그발을 매장하여 죽이려 하지만 자신이 에그발이 아니라고 주장하자 혼란스러운 바히드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을 청하게 된다. 바히드와 주변 인물들이 에그발에게 고문을 받을 당시에 모두 눈이 가리어진 채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에그발의 외모로 확증할 수 없었다. 심지어 에그발은 시리아에서 한 쪽다리를 읾고 의족을 사용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여기서 바히드는 에그발이 걸을 때 나는 의족 소리로, 시바는 에그발의 체취(냄새)로, 하미드는 에그발의 다리를 주물렀던 촉감으로 고문의 기억을 연상하여 에그발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고문 가해자 에그발을 응징하기 위한 고민에 빠진 이들에게 에그발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쓰러졌다는 그의 딸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는다. 이에 이들은 에그발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아내가 출산할 수 있도록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친인척 행세까지 한다.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고 바히드와 시바는 한적한 곳에서 에그발에게 고문 가해자라는 자백과 울부짖는 사과를 받고 스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도구를 남겨두고 떠나게 된다.


고문에 따른 트라우마, 납치와 감금 그리고 응징이라는 손톱 밑 가시처럼 불편하고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날 것 같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예상됨에도 영화는 그 날카로운 치명성을 유연하게 비껴간다. 영화 속 피해자들이 고문의 상처로 인해 가해자에 대한 폭력적인 응징이 예상되면서도 가해자로 확신할 수 없는 에그발에 대한 행동과 그의 딸 전화에 그들이 보인 행동은 예전의 이란 영화에서 보였던 어린이들의 순수함과 같아 보인다. 마치 이전의 이란 영화에서 보았던 어린아이들이 성인이 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나히 감독은 이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상징을 빼놓지 않는다. 우선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상징은 ‘가리어진 눈’이다. 고문의 피해자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문받았을 때 눈이 가리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자신들을 고문한 가해자 에그발이 누구였는지 확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소리, 냄새 혹은 촉감 뿐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가해자로 붙잡힌 에그발 역시 눈을 가리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피해자들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영화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눈을 가림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일시 하는 것이면서 이란 사회가 권력에 의한 시민의 눈이 가리어진 상태를 상징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하나의 권력에 의한 피해자로 감독은 묶어 놓은 것이다. 이것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것으로 고문 가해자 에그발을 한쪽 다리가 없는 절름발이로 설정한 점이다. 이것은 그 가해 폭력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신체적 약자라는 취약점을 이용한 국가 권력의 비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기도 하다. 에그발은 자신이 가해자로 확인이 되자 ‘나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야. 먹고 살려고 했어’라는 대사 뱉는다. 가해자 에그발은 국가 권력의 또 다른 피해자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피해자로 하여금 연대할 수 있거나 용서의 대상일 수 있음을 열어둔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의 소재로 ‘고문’과 ‘납치’를 사용한 것에서 이란의 정치, 사회적 환경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영화에서 ‘고문’과 ‘납치’라는 소재는 대개 군사정권시대에 있었던 과거의 한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라면,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은 현재 이란에서는 진행 중이라는 점이 놀랍다. AI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아직도 고문과 납치가 있을까라고 하지만 세상은 넓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은 이 지구상에는 일어나는 법. 영화에서는 이란 체제를 반대하거나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을 감금하고 고문하며 자백받았던 일들이 있었던 것을 전재로 한다.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는 유혈 진압에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듣노라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감금이나 고문은 가벼운 회초리에 불과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의 시작은 에그발이 밤에 차량으로 아내와 딸과 함께 이동 중, 유기견을 차로 치어 죽게 한다. 이에 그의 아내는 그저 사고일 뿐이라며 신의 뜻이라고 하고, 딸은 아빠가 죽였잖아요 그게 무슨 신의 뜻이야라고 한다. 여기서 감독은 이란 사회가 갖고 있는 정치적 상황을 단지 사고라고 판단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권력자들은 자신의 기득권 환경을 지속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시민에게 가하는 일종의 고문과 억압에 의한 상처 또는 죽음을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에 감독은 그건 ‘그저 사고가 아닌’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야라고 말하고 있다. 눈이 가리어진 채 받은 상처에 그들의 상처의 실제 가해자를 확증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며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알 수 없는 혼란에 소동이 일어난다. 파나히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실체를 바라보세요! 절룩거렸던 가해자가 아닌 그 이상의 누군가를 우리의 눈을 가려 스스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게 하려는 그 무엇을 바라볼 것을 이란 사회와 자신의 영화를 보는 세계인에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히드가 에그발을 매장하려는 허허벌판 한 곳에 줄기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영화 중반에 한 인물의 대사에서 그 나무를 보며 자신들이 보았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 난다고 했다. 실체를 특정할 수 없는 한정된 인생에서 무한히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는 연극도 영화도 알려 주지는 않지만, 지금 분명한 것은 유혈 진압으로 생명이 쓰러지는 그 곳에 하루 속히 평안이 임하는 것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도는 아닐까? 지금 그곳에는 막연한 기다림이 아닌 간절하고도 실현 되어야할 고도임이 분명하다. 더 이상 무고한 희생이 발생하지 않기를. 그 소망이 허망이 되지 않기를. 투쟁의 피가 멈추고 아이들의 순수함을 그린 영화처럼. 지금 그곳에 영화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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