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는 삶의 이야기

<레버넌트><새벽의 모든><기차의 꿈>을 보고

by 송동섭

2005년 발간된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박찬욱 감독은 자신이 본 영화 편수를 19,283편이라 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니 최소한 그가 본 영화의 편수는 20,000편은 넘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감상한 영화 편수에 놀랍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본 영화의 수를 세어볼 수 있도록 일일이 기록했다는 것이 남달라 보였다. 꼭 박찬욱 감독을 따라 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나면 그날 다이어리에 제목과 감독, 출연 배우의 이름을 기록했던 적이 있다. 당시 관람했던 영화를 일일이 적었던 종이 다이어리는 겉표지가 훼손되어 폐기했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에는 2016년부터 본 영화 제목이 기록되어 있다. 대략 보면 일 년에 최소 50편에서 100편 가까이 되는 영화 제목이 기록되어 있다. 25년에는 66편의 영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해 7월부터 10월까지 독서 공모전에 도전해 보겠다고 책을 읽는 데 집중하느라 그 동안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당시에 열심을 냈다면 감상 목록이 좀 더 많아지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25년은 영화 목록을 기록하는 것 외에 가급적 관람한 영화에 대해 감상 글을 작성해 보는 것을 시도한 해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글로 끄적거려 본 것이 <메모리>(미셜 프랑코), <미키 17>(봉준호), <서브스턴스>(코랄리 파르자), <아노라>(션 베이커), <승부>(김형주), <콘클라베>(에드워드 버거),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홍상수), <어쩔수가없다>(박찬욱), <세계의 주인>(윤가은)이다. 글을 쓸 때는 몰랐는데 돌아보니 적지 않은 감상의 기록이 컴퓨터 파일 목록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올해도 되도록 감상한 영화는 기록의 흔적을 남겨보려 해서 첫 번째로 선택한 영화가 <헤어질 결심>(박찬욱)이다. 아마 이 영화는 최소 3번 이상은 본 것 같다. 처음 <헤어질 결심>을 보게 된 것은 박찬욱 감독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고(무언가 있을 거라는 기대), 두 번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해 읽어 내지 못한 부분이 있는지 재확인하기 위해서 보았는데(무언가 찾지 못했을 거라는 자책에 따른 재시도), 두 번 모두 미술적 감각 혹은 미장센에 대한 인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 다시 보게 된 것은 25년 연말에 히치콕의 <현기증>을 보면서(물론 이 영화도 2, 3번 이상은 본 것 같은데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동의하는 데까지도 이르지 못했다) 영화적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것도 있고, 박찬욱 감독이 영화감독이 될 것을 결심하도록 이끈 영화라고 한 점과 <헤어질 결심>이 <현기증>에 대한 오마주라는 평도 있고 해서다. <현기증>과 <헤어질 결심>을 이어 보게 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를 덧붙이자면, 박 감독의 최근작 <어쩔수가없다>라는 영화에 대해 나름의 해석과 평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해석과 평에 대한 만족은 오롯이 주관적 자기만족이다) 숙제처럼 남겨진 영화에 대해 나만의 이해를 위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서 도전해 보았지만, 결과는 첫 번째나 두 번째나 다르지 않았다. <헤어질 결심>은 내게 무언가 반사되어 표현할 일말의 지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 이 영화와는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이어 올해 영화 감상 후 흔적을 남기려는 첫 번째 시도의 실패로 헤어질 ‘결심’이 굳어지려 할 때, 두 번째 선택한 영화는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다. 영화 <버드맨>으로 알려진 감독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절절한 연기가 어우러진 2015년 작품이다. 간혹 영화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만지작거리는 작품이 있는데 내게는 <레버넌트>가 그런 영화다. 개봉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볼까 말까 망설이다 선택한 올해 두 번째 영화다.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글래스(디카프리오)가 아들 호크와 동료들과 사냥하던 중 곰의 습격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되고, 아들 호크와 일부 동료만이 글래스와 남게 된다. 함께 남겨진 동료 제럴드는 글래스의 회복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그를 죽이고 떠나려 하자 이를 말리던 아들 호크를 격투 끝에 살해하고 글래스를 흙으로 덮고 도망치듯 떠난다.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글래스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제럴드를 추적한다. 영화 배경이 되는 계절이 겨울이고 장소는 강가 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광활한 벌판으로 주인공 글래스는 추위와 굶주림에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인디언의 추격으로 낭떠러지에 말과 같이 추락하고 눈 폭풍이 몰려오자 글래스는 죽은 말의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내 그 속으로 들어가 눈 폭풍을 피하는 장면이다. 오직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살아야만 하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세 번째 본 영화는 일본에서 작가주의 감독으로 주목 받고 있는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여행과 나날>의 감독 작품으로 OTT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찾은 것이 <새벽의 모든>이다. 영화는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매달 월경증후군에 시달리는 후지사와와 공황장애로 발작 증세가 있는 야먀조에가 아동용 과학 키트를 만드는 회사, ‘쿠리타 과학’에서 함께 근무하며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두 남녀의 로맨스나 직장 내 티키타카나 극적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두 남녀가 회사 프로젝트 이동식 플라네타리움(천체투영기)을 준비하는 과정과 행사를 통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단점 또는 약점에 대해 이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 제목에서 ‘새벽’은 가장 아프고 감추고 싶은 각자의 무엇이면서 그것을 바라봐 주고 함께 견뎌 주는 것으로 밝아 오는 ‘새벽’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영화 제목은 ‘새벽의 모든’ 이지만 ‘모두의 새벽’으로 읽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는 일상의 삶 속에서 각자가 갖고 있는 아픔과 그 아픔을 안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특별하지 않지만 소중한 존재임을 말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선택한 영화는 <기차의 꿈>이다. 데니스 존슨의 중편 소설 『기차의 꿈』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원작 소설의 서정적 느낌과 같이 영화 역시 이야기 중심 보다는 영상과 나레이션으로 전개된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벌목공이 결혼하고 4년 만에 아내와 딸을 잃고 남은 40여 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아내와 딸을 잃기 전과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내와 딸을 잃기 전을 ‘죽음’이라 한다면 그 이후를 죽음을 마주했던 이의 남겨진 ‘삶’이라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그레이니어가 마주한 죽음은 네 차례이면서 네 가지인데 그 죽음이 모두 제각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주인공과 함께 벌목공으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를 백인 무리가 건설 중인 교각에서 떨어뜨려 죽이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왜 그들이 중국인을 죽이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두 번째는 자기 동생을 죽인 살인자를 추적하여 작업자들이 쉬는 시간에 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이다. 동생을 살인한 자는 백인이고 그를 추적하고 총을 쏜 자는 흑인이다. 앞선 두 사건은 즉결 처형처럼 보인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가 무법 하며 야만의 시대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옆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높은 곳에서 사람을 떨어뜨려 죽여도 바로 옆에서 총 맞아 사람이 죽어도 주위 사람들은 단지 풍경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세 번째는 벌목 작업 중에 발생한 압사 사고다. 아무리 숙련 작업자라 하더라도 나무가 쓰러지는 방향을 오판하여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인공 그레이니어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죽음은 아내와 딸의 ‘실종’이다. 벌목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거대한 화재가 발생한 것을 보고 그레이니어는 불길이 일렁이고 있는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집은 전소 되고 그의 아내와 딸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 상태로 남는다.

앞서 본 바와 같이 네 가지의 죽음을 영화는 각기 다른 사건과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중국인을 떨어뜨려 죽게 한다던가, 흑인이 백인을 총살하는 것으로 동생의 죽음을 복수한다던가, 위험한 벌목 현장에서 작업자가 압사한다던가, 산불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음을 실종으로 처리한 점은 ‘죽음’에 대한 각기 다른 의미를 담아내고자 하는 의도처럼 보인다. 특히 죽음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아내와 딸의 죽음을 ‘실종’으로 표현하므로 주인공에게는 죽음이 종결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게 하여 아내와 딸을 찾고 꿈에 그리며 헛것을 보고 착각하는 모습을 영화는 담아내고 있다. 그렇게 영화 후반부는 그 죽음을 마주한 주인공의 남은 삶에 대한 소소하고 헛헛한 일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올해 두 번째 본 영화 <레버넌트>는 죽음의 순간을 극복하고 살아낸 자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 <새벽의 모든>은 보편적이고 평범한 인물들의 소소한 연대의 삶을 보여 준 것이라면, 네 번째 <기차의 꿈>은 앞선 두 편을 붙여 놓은 듯, 전반부는 죽음을 마주한 상황을 보여주고 후반부는 일상의 삶을 담아낸다. 영화 <기차의 꿈>은 <레버넌트>나 <새벽의 모든>이 가진 이야기의 에너지와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각각의 영화가 갖고 있는 의미를 <기차의 꿈>에 일부 투영된 듯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되지 않은 올해, ‘죽음과 삶’에 관한 영화로 시작했다. 죽음과 삶이라고 하지만 이 모두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죽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삶이고 일상의 민숭민숭한 삶도 삶이다.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는 것처럼 다이나믹한 것도 삶이고 지리멸렬한 우리의 일상도 삶이다.


올해로 50대 중반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진시황이 그리던 불로초를 먹지 않는 한 살았던 날보다 살아갈 날은 분명 짧다. 게다가 정신 말짱하고 건강하게 사는 해수는 살 수 있는 나이에서 몇 해는 더 빼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새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 그리 여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올해 시작하면서 본 영화 3편은 살아야 한다는 삶의 이야기이다. 내게 남은 삶이란, 거칠고 치열한 환경에서 살아나는 영웅적인 서사일 수도 있고(그럴 일은 별로 없지만)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의 수필일 수 있지만(이렇게라도 되면 다행이지), 그 어느 것도 아닐지라도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한다고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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