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프랑코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 <메모리>를 보고
영화감독 미셸 프랑코는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2009년 <다니엘&아나>라는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주간에 소개되었고 2012년 같은 영화제에서 <애프터 루시아>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감독으로 데뷔했을 때 그는 작품 외에 30대 초반이라는 나이가 주목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품은 <에이프릴의 딸>(2017)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였고 <뉴 오더>(2020)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아 멕시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그의 영화를 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2009년에 발표되어 약 10여 년을 훌쩍 넘은 <다니엘&아나>는 OTT(Over the top)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2016년 작품인 <크로닉> 역시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나마 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애프터 루시아>는 왓챠에서 <에이프릴의 딸> <썬 다운>은 구글플레이에서 <뉴 오더>는 웨이브에서만 가능하다.
미셸 프랑코 감독을 알게 된 것은 2019년 5월 12일에(2019년 영화 감상 목록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크로닉>을 감상하면서부터다. 아마도 그때 당시에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주요한 상을 받은 것과 감독의 젊은 나이가 주목되어 찾아보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영화 <크로닉>에 대한 감상의 여운은 영화의 결말에서 보여 주는 충격과 같이 묵직했다. 이후 그의 다른 작품을 접하는 것이 쉽지 않아 잠시 그의 이름도 잊히는가 했으나 최근에 <메모리>가 개봉되면서 이전에 <크로닉>에서 느꼈던 감상의 기억을 되새기려고 OTT에서 찾아본 것이 <애프터 루시아>였고 이어서 <메모리>를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작가와 그의 작품이 가진 세계관에 대한 작가론은 물론이고 하나의 작품에 대한 평을 하게 될 때도 감독이 연출한 전체 작품을 감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평을 하는 것이 작품 또는 작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을 전부 감상하지 못하고 평을 써 간다는 것이 무슨 원칙을 어기는 것 같지만 그의 세 편의 영화를 보고 나름의 기록 혹은 감상의 어느 지점을 표시해 두는 것이 의미 있다는 생각에(이렇게라도 핑계를 대고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조촐하고 소소한 평을 써 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미셸 프랑코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감상한 영화는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 <메모리>다. 2019년 5월에 감상한 영화 <크로닉>은 작지 않은 충격의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2024년에 <애프터 루시아>를 보았을 때도 그의 영화는 <크로닉>에서 느꼈던 충격과 다르지 않았다. 두 작품 <애프터 루시아>(2012)와 <크로닉>(2016)에서 감독은 이야기를 풀어가고 마무리하는 데 있어 영화 후반부에 무겁고 불편한 여운을 남기는데 연출의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듯했다. 이런 연출 방식의 같은 느낌 다른 이야기의 두 편의 작품이 전해주는 깊은 인상 탓에 최근 개봉한 <메모리>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는 이번의 영화에서는 어떤 임팩트가 어느 순간에 전개될 것 인가였다. 하지만 감독은 이전의 영화에서 보여준 연출의 특징을 반복하고 있으면서도 영화가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는 이전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과는 적지 않게 달랐다. 감독은 이전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 <메모리>에서 보여 준 미셸 프랑코 감독의 연출은 시작은 느리고 길지만 끝은 빠르고 짧다. 영화 초반을 한 장면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여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애프터 루시아>에서는 정비소에 있는 차 안에서 밖을 주시하는 화면 속에서 인물의 긴 대화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런 영화의 시작에 감독은 만족했는지 <크로닉>의 시작 역시 카메라가 차 안에서 밖을 응시하는 화면으로 <애프터 루시아>에서 보여준 각도와 동일한 위치에서 긴 화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시작을 길게 보여 주지만 영화 초반이라 이야기에 대한 정보는 제한되어 있고 느리고 긴 영화 시작은 관객에게 궁금증과 상상력을 유도한다. <애프터 루시아>에서 정비소의 장면을 통해 사고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어떤 사고였을까라는 상상하게 하고, <크로닉>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어느 젊은 여성의 차량을 따라가는 장면은 그 이유가 궁금하게 한다. <메모리>에서는 주인공 여성이 알콜 중독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장면에서 대화를 길게 연출하면서 이 여성이 이전에 심각한 알콜 중독자였다는 정보이면서 왜 알콜 중독자가 되었을까? 라는 물음을 갖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 시작이 느리고 길었다면 미셸 프랑코 감독의 영화의 끝은 빠르고 짧다. 심지어 영화의 끝이 너무 급작스러워 당혹스러운 충격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3편의 영화에서 감독은 이야기의 완결을 위해 사건을 늘어뜨리거나 종결을 위한 어떤 봉합도 없다. 3편 모두 영화 초반에 느리게 천천히 진행되다가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에 급작스럽기도 하고 과격하면서 파격적이다. 이야기가 극도의 절정에 이르러 고도의 긴장감이 팽팽하여 끊어질 듯한 순간에 느닷없이 긴장된 줄을 끊어 버리는 것 같은 연출을 보여 준다. 그 팽팽한 긴장에서 해방되는 해방감과 동시에 가슴이 철렁하는 무언가 공중에서 떨어져 지면에 부딪히는 충격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비극적 결말과 희망적 결말의 충격의 정도 차이다. 과연 비극이 전해주는 아픔의 크기와 희망이 주는 평안의 크기와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크고 깊은 여운을 남기냐는 점이다. 이 질문의 대답으로 미셸 프랑코의 3편의 이야기의 종결을 비교하자면 희망이 주는 평안은 비극이 전해주는 아픔의 크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다.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이 전해 준 급작스럽고 묵직한 결말이 주는 충격에 <메모리>의 결말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마치 동화 속 공주가 우여곡절 끝에 멋진 왕자를 만나 잘 살았다는 동화의 결말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지점이 감독 미셸 프랑코가 영화로 보여 주고자 하는 전환의 지점이라 생각된다. 이전에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에서 보여준 삶의 잔혹함을 극단적으로 보여 주었다면 <메모리>에서는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두 인물의 사랑을 통해 희망의 가능을 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미셸 프랑코 감독의 또 다른 연출의 특징은 인물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원인 또는 단서가 되는 사건을 각각의 영화에서 생략하거나 감추었다가 슬쩍 흘리듯이 배치한다는 데 있다. <애프터 루시아>에서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상황을 생략하여 주요 인물들이 처한 상실의 현실을 전제로 시작한다. 심지어 <애프터 루시아>는 영화 제목에서 ‘루시아’는 영화 주인공인 중학생 정도의 여자아이 엄마의 이름으로 영화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주인공 여자아이의 엄마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며칠이 지난 이후부터 영화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 애프터(이후) ‘루시아’인 것이다. <크로닉>에서도 영화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정보를 영화가 중반 즈음에 인물의 대화를 통해서 슬쩍 전달하고 있다. <크로닉>에서는 호스피스로 일하는 남자가 치명적인 고질병에 걸린 아들을 안락사시켰다는 것을 영화 중반 이후에 알려주면서 그가 단지 중증 환자를 간호하는 역할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안락사에 관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을 영화 중반이 지나서야 알게 한다.
감독 미셸 프랑코는 자신의 영화를 풀어감에 있어 대립하는 구도를 설정하여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애프터 루시아>에서는 아내와 엄마를 잃은 아빠와 딸의 동일한 처지에서 아빠가 일상으로의 복귀가 어려울 때 딸은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이 대비되다가 아빠가 일상을 회복할 때 즈음에 딸은 학교에서 학교 폭력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게 된다. 이후에도 두 사람의 사정은 교차되고 대립된다. <크로닉>에서는 중증의 환자를 돌보는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남자가 주인공으로 그가 간호하는 대상은 중증의 환자로 죽음을 자신의 코끝 앞에 놓고 사는 삶을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 남자는 타인의 죽음을 최전선에서 막고 있는 최종 저항선이면서 안전하게 죽음으로 안내하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그가 돌보는 중증의 환자들은 마치 죽음이 예고되어 임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대비하듯 간호하는 그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은 타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환자와 주인공 호스피스를 대비하기 위해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환자와 시간이 날 때마다 러닝 하는 장면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주인공 호스피스가 선명하게 대립된다. 하지만 그것도 그에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죽음의 결말이 있기 전까지일 뿐이다. <메모리>에서도 이러한 대립 구조의 설정은 선명하다. 제목이 말해 주는 것과 같이 여자 주인공은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메모리)이 있는 반면에 남자 주인공은 계속해서 기억(메모리)이 지워지는 치매를 앓고 있고 설정이다. 여기에 여자는 가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과거의 경험을 갖고 있다면 남자는 치매로 인해 가족으로 하여금 통제에 가까운 보호를 받고 있는 현재를 살고 있는 인물이다. 여자와 남자, 잊고 싶은 기억과 잊혀지는 기억, 가족으로부터의 폭력과 보호 또는 통제 그리고 여자의 과거와 남자의 현재가 다층적으로 대립되어 있다.
아픔은 현실이고 평안은 비현실인가? <메모리> 이전의 영화 <애프터 루시아>에서 현실의 잔혹함의 끝으로 밀어붙여 그 절박한 절절함으로 <크로닉>에서는 실낱같은 생과 사의 경계의 희미함이 주는 막연함이었다면 영화 <메모리>는 감독 미셸 프랑코의 이전 작품에서 일정 정도 새로운 지점으로의 도전이며 하나의 기점과도 같아 보인다. <메모리>에서 보여준 사랑에 대한 희망은 그가 영화로 말하고자 하는 끝일까? 새로운 시작일까? <애프터 루시아> <크로닉>은 매웠다면 <메모리>는 간이 필요해 보였다. 다만 <메모리>가 새로운 시작이 아닌 새로운 시도의 끝이라면 아쉬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다음을 작품을 기대해 본다. 비현실적인 매콤한 평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