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버거 감독의 <콘클라베>을 보고
“확신은 일치의 가장 큰 적입니다. 확신은 인내의 치명적인 적입니다.(중략)
우리의 신앙은 의심과 함께 걸을 때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고 믿음도 필요치 않습니다.”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의 대사 중)
영화 <콘클라베>는 영국 작가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의 2016년 소설 『콘클라베』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가 열리고 그에 따른 추기경 간의 권력 투쟁, 음모, 부패를 다루고 있다. 위에 대사는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에 앞선 주인공 로렌스 추기경의 설교 일부다. 설교의 핵심 되는 단어는 확신과 의심이다. 일반적으로 단어의 어감상 ‘확신’은 긍정의 의미를 ‘의심’은 부정의 의미로 인식된다. 하지만 로렌스 추기경은 이것을 뒤집어 확신을 일치의 치명적인 적으로 의심을 신앙의 필요충분의 조건으로 설교하고 있다.
확신(確信)의 뜻풀이가 굳은 믿음으로 기독교에서 주로 믿음과 같이 사용해서 믿음의 확신이라던가 확신 있는 믿음이라든가 할 때 주로 사용는데 여기서의 확신은 믿음의 대상자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런데 로렌스 추기경이 자신의 설교에서 표현한 확신은 일치와 인내의 적이라고 한 것에서 그가 말한 확신은 믿음의 대상자에 대한 신뢰 보다는 개인적인 신념으로의 확신에 가깝다.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해 전 세계 118명의 추기경이 모인 자리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개인의 신념이라는 확신이 추기경 간의 단합을 해치는 것이며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교로 선언한 것이다. 그가 말하고 있는 확신은 개인의 신념으로 오류와 불완전성을 내포한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콘클라베>에서 개인적인 신념으로의 확신이 갖는 오류와 불완전성으로 인한 불일치와 인내하지 못해 발생하는 분쟁은 여러 장면에서 표현된다. 추기경의 개인적인 성품의 연약함에서부터 정치적인 이념에 이르는 것은 물론이고 피부색이나 사는 국가에 따라 추기경들은 구분되고 구별한다. 이런 다름으로 인한 신념의 오류는 차별로 드러나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충돌로도 나타난다. 서로 다름으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언행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인가를 의심하게 하는데 로렌스가 설교한 일치와 인내의 적으로 확신의 오류와 불완전성을 적확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이런 확신의 오류와 불완전성에 로렌스 추기경은 의심을 답으로 제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로렌스 추기경의 전체 이름은 토마스 로렌스다. 여기서 토마스는 성경의 인물 도마의 영어 이름이다. 도마는 예수가 부활한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자기 손으로 그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한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도마를 의심의 대명사로 부른다. 영화 <콘클라베>의 원작자는 로렌스의 이름을 토마스 로렌스라고 하여 성경의 의심 많은 도마의 이미지를 이름과 함께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도마의 의심에 대해 양가의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크다는 점과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거든 보고서라도 믿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로렌스가 말하는 의심은 확신에 이르는 자양분으로의 의심이고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의심이다. 믿음에 있어서 의심은 회의가 아닌 확신을 위한 의심으로 확신에 이르기 위한 질문이면서 해답을 찾는 고민의 시작으로 의심이다. 그 의심은 질문을 만들고 답을 찾게 하며 믿음의 대상자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 의심은 확신의 자양분이 되고 또 다른 차원의 확신의 경지로 이끈다.
영화 <콘클라베>에서는 거듭되는 투표에서 교황이 결정되지 않고 선출 가능성이 높은 추기경에 대한 의심과 검증이 반복된다. 여기서 의심은 신앙이나 믿음의 확신으로 가는 방법이라기보다 검증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은 추기경이 검증 수준의 의심으로 낙마가 반복되면서 그 의심은 확신보다는 공허함만 가득할 뿐이다. 그렇다고 영화는 검증의 수준의 의심에 멈춰 서있지 않다. 최종으로 교황에 베네티스가 선출 되지만 로렌스는 그가 간성(Inter Sex)이라는 정보를 듣게 되는데, 로렌스는 베네티스가 교황으로서의 치명적인 결격을 갖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로렌스의 성 정체가 간성이기 때문에 교황이 될 수 없다는 로렌스 개인의 신념으로 확신과 검증의 수준에서의 의심의 한계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네티스는 자신이 간성이라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성 정체 역시 신이 허락한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간성을 교정하는 수술을 하지 않고 자신의 신체적 성 정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베네티스의 성 정체에 대한 답변에 로렌스의 의심의 한계는 무너진다.
‘콘클라베’는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비밀회의로 ‘열쇠로 잠긴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되어야 하기에 조명은 제한적으로 사용되어 전반적으로 영화는 어둡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콘클라베’가 세상과 단절하고 구별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보다 ‘더 어두운’ 선택의 장(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폭탄 테러로 구멍난 천장으로 비추는 빛은 그 어둠_선택의 한계_을 걷어내는 것이면서 빛으로 먼지 즉 더러움의 움직임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그들의 공간 혹은 역할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 후반에 분수대를 벗어난 거북이를 다시 분수대로 옮겨 놓는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는 비밀투표를 앞두고 확신과 의심이라는 설교를 강론하였음에도 자기 스스로 그 한계에 매몰되어 있던 자가 한계를 벗어나는 체험을 하게 되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또 다시 분수대에 머물게 되는 상황) 확신과 의심의 지난한 순환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것 같지만 어쩌면 조금씩 깊어지는 의심의 고민 속에서 성숙한 확신으로 길어 올려지는 것은 아닐까? 라고 영화 <콘클라베>는 진지하게 물어본다.
PS
확신과 의심은 둘 다 명사다. 하지만 두 명사의 어감상 차이는 확신 보다는 의심은 움직이는 동사와 같다는 점이다. 확신은 고정이 되어 있다면 의심은 활동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확신은 고정되어 있다면 의심은 변화를 요구하는 듯하다. 확신은 채워져 있다면 의심은 비워내고 싶은 힘을 내포한다. 의심은 확신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말과 같다고 할까? 비워야 채워지는 것처럼 의심은 비워내고 싶은 힘이 강하다. 하지만 채우기 전에 비워내기만 한다면 그 의심의 말이 이끄는 수레는 요란할 뿐이다. 채웠으면 비워야 하고 비웠으면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 반복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성장과 성숙의 조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