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내 오랜 친구...안녕

by 김삐끗

우리 집에 고무냄새가 진동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이 고무 따는 부업을 하던 때였다. 엄마아빠는 퇴근 후 새벽까지 고무를 따셨다.


그렇게 번 돈으로 피아노를 마련했다.

외할머니도 값을 보태 주셔서 우리 집에는 근사한 피아노가 한켠에 자리 잡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아기였을 때 검은색 광이 번쩍이는 피아노를 가지고 계셨다. 어린 나에게 자주 피아노를 쳐주셨다. 어렸지만 엄마가 불러 주시던 동요와 나를 안고 띵동 띵동 피아노를 치던 따뜻한 엄마품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새로 산 피아노는 따뜻한 갈색이었다.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밀크초콜릿색 피아노.

피아노는 놀이도구이기도 했고 조금 더 커서는 취미로 자리 잡았다. 바이엘까지는 엄마에게 배웠고 체르니부터는 학원에 다녔다. 친구가 피아노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부러워 나도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라서 가게 된 학원이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찬송가나 CCM 반주를 혼자 익혀서 쳤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 치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그걸 아는 나는 엄마가 요청하면 "나 바쁜데"라고 툴툴댔지만 그래도 엄마가 좋아하는 찬양을 피아노로 쳐드렸다. 그러면 엄마는 반주에 맞춰 찬양을 불렀고 어떨 때는 청소하면서, 또 어떨 때는 빨래를 개며 찬양을 흥얼거리셨다.


하루는 아침에 피아노로 찬송가를 치는데 우리 아파트를 청소하시는 분이 청소를 하시며 내 반주에 맞춰 찬송가를 흥얼거리셨다. 너무 단순하고 실수투성이인 내 반주에 맞춰 누군가 즐겁게 일하는 경험을 했다. 그분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순간 당황해서 반주를 멈추고 말았다. 지금도 그 순간이 참 아쉽다. 그분에게 소소한 평안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을 멈춰버린 게. 피아노도 아쉬운 듯 울림을 길게 뺐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가깝게 지내서인지 한 번도 학교 음악시간이 지루했던 적이 없었다. 늘 즐거웠고 시험을 보면 힘들이지 않고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았다.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봤을 때, OST 악보를 찾아서 피아노로 연주하며 오랫동안 감동을 몸으로 느꼈다. 악보가 없을 때는 음악을 계속 들으며 악보를 만들었다. 이럴 때마다 음악 천재가 아닌가 싶었지만 만든 악보가 엉망인 걸 보고 음악인의 길은 일찌감치 단념했다.


언젠가는 아침 일찍부터 피아노 연주에 꽂혀서 마구 쳐댔다. 엄마아빠까지 합세해서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다가 아랫집 아저씨에게 항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큭큭대며 반주와 노래를 멈추고 한껏 들뜬 기분으로 아침식사를 먹은 기억이 있다.

이대로 좋다는 행복감을 느꼈던 날이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게 너무 감사했던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의 결과가 나오는 날.

피아노로 찬송가를 치며 엉엉 울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었다. 내 아픔을 나누면 그 사람에게 아픔이 전염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께 이 고통을 쏟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도는 나오지 않았다. 끄윽거리는 울음을 담아 손가락으로 꾸욱꾸욱 건반을 눌렀다. 피아노가 대신 기도했다.


결혼하고 피아노를 본가에서 가져왔다. 꾸준히 레슨도 받으며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임신했을 때 피아노를 치며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야, 세상에 나오면 엄마랑 피아노 치면서 놀자~ 엄마가 도레미파솔라시도도 알려주고, 반짝반짝 작은 별도 쳐줄게"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와 함께 피아노를 치면서 선율 속에서 함께 행복하고 싶었다.


이제 피아노와 작별인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사 가는 집에는 피아노를 놓기가 어려웠다. 그냥 악기라는 물건일 뿐이지만 몇 십 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 묵직하게 한켠에서 날 지켜보며 언제든지 날 위로할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빨래를 쌓아 놓기도 하고, 책상으로 쓰기도 했다. 무겁고 습했을 텐데 불평 없이 오랜 친구로 남아줬다. 이사 다니며 여기저기 상처 난 피아노의 몸과 다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헤어지기 섭섭했다. 그저 물건일 뿐인데 이렇게까지 감정이입 할 일인가 싶지만 어쩌겠나 자꾸만 피아노가 친구 같은데..


바라는 건 이 피아노를 데려가는 누군가에게 피아노가 위로와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거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잔뜩 머금고 있는 피아노다. 이사 갈 때 애물단지가 아니라 조금 무거운, 그치만 그만큼 든든한 반려악기로 앞으로를 살았으면 좋겠다.


피아노 치는 사진은 많은데 피아노와 한 곳을 보며 찍은 사진은 없네. 보내기 전 같은 곳을 보며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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