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난 이후에도 남는 것

그림자 같은 사랑이 예술이 되는 순간들의 기록

by 삶을 읽는 조직문화연구자 이지연

비난 이후에도 남는 것

―그림자 같은 사랑이 예술이 되는 순간



사랑은 때때로 ‘감정’보다 먼저 ‘죄목’이 된다. 상대가 혼인한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마음은 바로 재판대에 오른다. 누군가의 삶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세운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흔들릴 때 상처 입는 사람이 생긴다. 그래서 비난은 필요하다.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우리는 끝내 어떤 작품들 앞에서 멈춘다. 그 사랑을 옹호하려는 마음이 아니라―그 사랑이 낳아버린 예술을, 너무 쉽게 ‘같이’ 지워버릴 수 없어서.


나는 종종 이런 장면을 떠올린다. 비난의 말이 먼저 도착하고, 작품은 늦게 도착한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작품이, 오히려 오래 남는다. 우리는 결국 불편함을 품은 채로 읽고, 듣고, 바라보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이 면죄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인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절제, 사랑과 책임, 침묵과 고백이 한 사람 안에서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형식이 되는지—그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네 작품을 ‘다 읽고 다 이해한 사람’의 얼굴로 소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작품을 통째로 소유하지 못한 채로, 다만 여러 번의 인용과 해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이 이름들을 건너서 알게 된 사람으로서—그 ‘건너 앎’의 불완전함까지 포함해, 글을 남기고 싶다.


그럼에도 이 네 개의 장면은 오래 남았다.
단테의 베아트리체, 페트라르카의 라우라, 베르크의 《서정 모음곡》, 그리고 카미유 클로델의 조각들.

이것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이 현실에서 완성되지 못한 자리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예술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우리를 계속 불편하게 만든다.


나는 이 작품들을 ‘불륜’이라는 한 단어로 단순화하고 싶지도, 반대로 ‘예술이니까 괜찮다’는 말로 덮고 싶지도 않다.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그 그 중간의 자리다.


감정이 타인을 침범할 때 생기는 윤리적 상처와, 그 상처가 남긴 형식의 힘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리.

어쩌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만 인간을 조금 더 정확히 본다. 연민과 경계, 찬미와 혐오가 한 문장 안에서 충돌하는 것을 견디면서.


영화 카미유 클로델.jpg 1988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의 장면


그래서 아래에서는 네 작품을 ‘정답’으로 호출하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네 개의 서로 다른 방식으로, 넘지 않으려는 마음이 어떻게 형식이 되는지를 더듬어 보려 한다. 소유하지 못한 사랑이 언어가 되는 과정, 절제가 리듬이 되는 순간, 말하지 않기 위해 더 촘촘해진 기록, 예쁘지 않아서 더 정확해진 조각. 이것들은 변명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함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 글은 하나를 주장하려는 글이 아니다. 오히려 질문을 끝까지 붙들려는 글이다.
비난이 정당할 때조차, 우리는 왜 작품을 놓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 놓지 못함은 윤리의 실패인가, 인간 이해의 성실함인가.






1) [단테] 소유하지 않은 사랑이, 빛이 되는 과정


단테의 사랑은 ‘관계’로 완성되는 이야기로 전해지지 않는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단테와 베아트리체를 둘러싼 유명한 서사—그가 한 여인을 사랑했고, 그 사랑이 현실의 결말보다 문학의 구조로 남았다는 이야기를—여러 번 전해 들어왔다.


베아트리체는 역사적으로도 ‘누구였는가’를 둘러싼 논의가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 단테의 삶을 어떻게 정리해 놓았는지보다, 단테가 작품 안에서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는 지다. 단테는 사랑을 사건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언어 속에서 다시 배치한다. 삶의 소유가 아니라, 내면의 변형으로.


《새로운 삶(La vita nuova)》에서 베아트리체는 “얻어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나를 바꾸는 존재”로 자리한다. 사랑은 성취의 기록이 아니라, 감정이 윤리와 부딪히며 어떤 사람을 새로 빚어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이 남기는 인상은 달콤한 연애담보다, 한 인간이 자기 마음을 어떻게 다루며 단련하는지에 더 가깝다—적어도 많은 해설과 인용이 그렇게 말해 왔다.


그리고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연인의 자리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인도자처럼 등장한다. 어둠을 건너게 하고, 방향을 다시 잡게 하고, 끝내 빛을 향해 올려 보낸다. 여기서 사랑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로 새어 나가 누군가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문학은 더 큰 세계를 만들고, 사랑은 ‘불가능’에서 멈추지 않고 ‘구원’이라는 언어로 옮겨 간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삶을 읽는 조직문화···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일터와 삶을 지나며 흔들리는 마음의 온도를 기록합니다. 사람과 조직이 남긴 결을 오래 바라보며 글을 씁니다.

83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5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