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아이가 찍어주는 점(비밀)

[오늘의 단어] 비밀(혼자 감추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고르는 마음)

[오늘의 단어] 비밀(혼자 감추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을 고르는 마음)


“엄마, 이건 오빠한테는 비밀인데…”


어느 날 저녁, 딸아이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아이 얼굴이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 오빠 초콜릿 하나 몰래 먹었어.”

말끝에 살짝 올라가는 억양,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굳이 고백하러 온 사람만의 얼굴이었다.


잠시 뒤 딸아이는 덧붙였다.

“근데 엄마, 나 칭찬 스티커 다 모았잖아. 그걸로… 오빠 초콜릿 다시 사주면 안 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자기가 저지른 작은 잘못을 그대로 숨기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반짝이는 걸 꺼내 “이걸로 대신 갚을게”라고 내미는 마음.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이렇게 순수하게 비밀을 다뤘던 때가 언제였더라 잠깐 멍해졌다.


사전에서 ‘비밀’을 찾아보면 “남에게 알리지 아니하거나 알려서는 안 될 일”이라고 되어 있다.

어른이 떠올리는 비밀은 대개 말 못 할 속사정, 티 내지 못하는 불안, 누군가를 실망시킬까 봐 숨기는 마음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비밀은 점점 무겁고, 진지하고, 어딘가 어두운 단어가 되어 간다.


어른이 되고 나면 비밀은 종종 ‘약점’이라는 얼굴을 하기도 한다.

어떤 관계에서는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언젠가 농담의 소재가 되거나, 소문이 되거나, 회의실 어딘가에서는 ‘리스크’라는 단어로 불리기도 한다.

“괜히 말했다가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닐까”, “이 얘길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내 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한 번 들고 나면, 입은 더 단단히 닫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카톡창에 썼다가 지운 문장들, 보내지 못하고 저장만 해 둔 메모, ‘이런 얘기까지 털어놔도 될까’ 망설이다 결국 삼켜 버린 말들을 하나씩 늘려 간다.

어느 순간부터 비밀을 갖는다는 것이 나와 세상 사이에 벽을 세우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의 비밀은 조금 다르다.

책상 서랍에 숨겨 둔 사탕, 엄마 몰래 쓰고 있는 일기장, 친구와 둘이서만 쓰는 암호 같은 것들.

아이에게 비밀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숨기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이건 너한테만 보여 줄게”라고 한 사람을 찍어 주는 표시에 가깝다.


딸아이의 비밀도 그랬다.

오빠에게는 미안해서 말할 수 없고, 다른 이들에게는 조금 부끄럽고,

그래도 엄마라면 같이 고민해 줄 것 같은 마음.

그래서 비밀은 아무에게도 말 못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만은 말할 수 있는 이야기에 더 가깝다는 걸 아이가 먼저 보여 준 셈이다.


어른의 비밀이 때로는 약점이 되기 쉬운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 비밀을 누구에게 건넬 지를 고르는 일 자체가 중요해진다.

나를 판단하거나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잠깐이라도 같이 앉아 있어 줄 사람에게.


딸아이가 내게 와서 “엄마, 오빠한테는 비밀인데…”라고 말하던 그 순간, 아이는 단지 잘못을 숨기려던 게 아니라 나를 자기편으로 초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일은 엄마랑 나만 알고 있자. 그리고 같이 해결해 보자.”

초콜릿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엄마와 딸이 맺은 작은 공모.

그 안에 들어 있던 건 달콤한 죄책감과 함께 “엄마를 믿는다”는 마음이었다.


점심시간에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오늘 당신의 마음속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 하나쯤은 조용히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비밀을 꼭 꺼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어떤 비밀은 끝까지 나만 알고 있어도 되는 권리이기도 하니까.


다만 그 안에 “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쯤 떠올려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반대로 누군가가 당신에게 “이건 조금 비밀인데요…”라고 말을 꺼낸다면,

그건 당신을 자기편으로 초대하는 마음일지 모른다.

그 순간만큼은 그 사람의 비밀이 약점이 아니라,

당신에게 맡겨진 신뢰라는 것을 조용히 기억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의 비밀을 이렇게 적어 두고 싶다.

비밀.

혼자 감추어 두는 어두운 서랍이 아니라,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누구에게 건넬지 조심스럽게 고르는 시간.

때로는 약점이 되기도 하지만,

잘 건네졌을 때는 두 사람 사이를 잇는 작은 다리가 되기도 하는 것.


아이의 “비밀이야”처럼,

어른의 비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안전하게 나눠질 수 있기를.


그렇게 나눠진 비밀 하나가 당신과 누군가의 마음 사이에 작은 점 하나로 남아,

오늘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조용히 알려 주기를 바라며.



이전 10화제1장 나에게 쉬어가는 점(연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