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 <깊은 강> 책 리뷰
1. 앤도 슈사쿠 삶의 집약체이자 완성작
<깊은 강>은 일본의 대작가 앤도 슈사쿠의 삶이 녹아 있는 소설입니다. 슈사쿠 본인의 인생 여정을 대략 살펴본 다음 이 소설을 읽으면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상당한 울림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신의 존재에 대한 저자의 구도자적 여정이 사뭇 진지하고 치열하며 처절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설 속에 드러난 저자의 구도적 모습에 공명할 수 있다면 큰 울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의 기본 골격은 이렇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충분히 겪은 서로 다른 4명의 인물이 인도 여행을 떠납니다. 그들이 인도 여행에 참여하는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암 선고를 받은 아내가 다시 태어날 테니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을 들은 남성 이소베, 죽을 병에 걸렸다가 신비로운 힘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하고 그때 힘이 되어준 구관조에 꽂힌 동화 작가 누마다, 전쟁에 참전에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왔지만 당시 생존을 위해 인육까지 먹어야 했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기구치, 젊은 시절 장난으로 남자를 유혹했다가 버렸지만 그의 존재를 잊지 못해 다른 남성과의 신혼여행차 도착한 인도에서 카톨릭 사제가 된 오쓰를 찾아가는 미쓰코까지 등장합니다.
이 네 명의 여행자 뿐 아니라 이들을 이끌어 여행을 돕는 가이드, 기구치의 죄의식을 덜도록 도움 외국인 가스통, 끊임없이 진정한 구도를 위해 신과 동행한 오쓰까지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강렬한 개성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쓰코의 과거 이야기에서 스쳐 지나가는 존재로 생각되던 오쓰의 경우는 점점 비중이 커져 결과적으로 소설 전체에서 가장 비중 있는 인물로 다뤄지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저자가 다양한 삶의 양태 중에서도 기독교가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도의 갠지스 강이라는 상징적 장소에 모이는 이들 등장인물은 각각이 각자의 사연과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전혀 상관이 없는 단독자이기도 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들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저자의 페르소나, 또는 하나의 가면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자의 연대기를 대충만 훑어봐도 느낌이 확 오는 인물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저자의 말년 투병 생활 중 마지막으로 집필한 이 소설은 저자의 삶이 집약된 인생 스토리이자 삶의 의미를 완성해 나가는 여정의 완성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가로 명성을 안겨준 <침묵>과 함께 이 소설을 자신의 관 속에 넣어 달라고 유언을 했다는 것을 봐도 이 소설에 대한 그의 애착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깊은 강으로 나아가는 인생들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삶 속에 해결되지 않았거나 답을 얻지 못한 문제들을 가슴에 품은 채 인도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강이라 불리는 갠지스 강에서 수많은 구도자들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답을 얻어보려 합니다. 각자의 출신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지만 모두가 한 지점에서 구도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저자가 추구했던 종교다원주의적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자의 사상이 종교다원주의와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통합하려는 태도는 특히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또한 이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하나의 궤를 찾으려 했던 노력이 돋보입니다. 물론 저자의 기본 베이스는 기독교적 관점이기는 합니다. 이런 모습은 카톨릭 사제 오쓰의 행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오쓰는 일본인으로 기독교적 신에 귀의해 유럽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럽의 카톨릭회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유럽에서 태동한 일원론적이자 절대 유일신적 종교관에 온전히 순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동양적 종교관 특히 일본인들에게 나타나는 다신론, 범신론적 태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쓰 역시 서양적 신의 관념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합니다. 저자가 동, 서양의 기독교적 특성의 차이를 좁히고 통합하려 노력했던 모습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오쓰는 소설의 초반에 존재감이 미미합니다. 거침없는 여성 미쓰코에게 오쓰는 우스꽝스러운 피에로와 같은 나약한 존재로 기억됩니다. 실제로 오쓰는 가는 곳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고민과 경험을 토대로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만의 철학과 신관을 정립하며 점점 존재감이 커집니다. 결국 오쓰는 신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주인공으로 성장합니다. 이에 미쓰코도 점점 오쓰에게 영향을 받아 급기야 갠지스강에 들어가 오쓰가 말하는 양파, 신의 존재로 귀의하는 듯한 모습까지 나아갑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구도와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다거나 속세의 번뇌를 모두 벗어던지는 어떤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갠지스 강으로 모여들어 삶의 의미를 찾거나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살아온 인생을 차분히 정리하게 됩니다. 소설 속 깊은 강은 모든 것을 감싸고 포용하는 어머니의 신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기독교 문화에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요단강과 대비됩니다. 강의 속성과 이미지와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것도 이 소설의 큰 유익 중 하나입니다.
3.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대체로 우리는 치열하게 노력하고 쟁취하고 성공하는 삶을 추구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한민국 사회는 무한 경쟁에 생존 자체를 늘 위협받는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극한에 이른 사회입니다. 물질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사회이기도 합니다. 재산이나 소득이 많으면 다른 모든 조건에 막론하고 인정받는 분위기가 만연해있습니다. 파이팅이 국룰인 용암처럼 들끓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젊은 청춘들에게 차분한 강의 이미지를 들이밀면 김이 샐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깊은 강>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사연과 인도 여행에서 보여주는 태도들은 하나같이 숙연하기만 합니다. 대체로 인생의 황혼기에 여러 욕망과 열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갈무리를 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성장기나 절정기에 머물러 있는 독자가 읽는다면 다소 힘 빠지고 잔잔해 보이기 쉽습니다. 진부하고 지루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챙김이나 참선, 명상 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건강하게 하려는 노력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이 소설 <깊은 강>이 큰 울림으로 다가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는 인생의 다양한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낸 장년이나 노년에게는 소설 속 캐릭터 중 누군가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주파수 동조현상이 강할수록 더 인상적으로 읽게 될 소설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간 군상 중에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진지하게 삶을 성찰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도 이를 의식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행자들 중 특별히 눈에 띄는 인물들을 배치합니다. 일본인 신혼부부 산조 부부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 소설 전체를 일종의 케이스스터디, 실험으로 본다면 산조 부부는 전형적인 젊은 신세대로 이 소설의 기본 논조와 대비되게 하는 대조군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조군이라고 표현했지만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 한 인물들입니다.
남편인 산조는 대표적으로 생각 없이 되는대로 편하게 사는 인물을 상징합니다. 죽은 사자의 사진 찍는 행위가 엄격하게 금지된 지역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어기고 사진을 찍으려다가 사달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은 오쓰의 심각한 부상으로 이어지는데 정작 사고를 친 본인은 오쓰가 끼어든 틈을 타 유유히 사라집니다.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더 우리의 일상과 닮아 있는 듯합니다.
진지하고 사려 깊은 배려보다는 적당히 유연하고 자신의 이익을 잘 챙기는 것을 지혜롭다고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다소 지루하고 잔잔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독자도 의외로 많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누구나 진중하게 삶을 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삶의 의미를 고찰하느라 시간을 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아내는데 급급하고 경제적 이익을 축적하는데 관심이 가 있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바로 인간사가 아닌가 합니다. 절대적으로 맞고 틀린 것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 소설을 통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된다면 큰 의미가 있을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