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주 작가 <내 친구는 나르시시스트> 책 리뷰
1. 인간관계의 시발점, 학교에서...
불과 며칠 전에 초등학교 6학년인 딸아이가 학교에서 다쳤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늘 산만하고 정신없이 시끄러운 남자 학생이 다른 여자아이와 말다툼이 있었던지 책을 집어던졌는데 우리 아이가 그 책에 눈탱이를 맞아버리는 어이없는 사고였습니다. 이후에 안과에 가서 검사도 받고 약도 먹고 바르고 걱정인형 아내와 함께 약간의 소동이 있었고, 부어있는 눈이 창피하다며 안대를 차고 다니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작은 소동에서 주목한 점은 그 일이 일어난 날 아이와 반 친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연락을 받자마자 픽업하기 위해 서울에서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돌아왔지만 하교 시간을 넘기고 말았는데 친한 반 친구들 세 명이 아이와 함께 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아이를 보자마자 열폭 하는 아내에게 상황 설명은 물론 맞장구를 쳐주며 같이 공감해 주고 병원 가는 길을 배웅까지 해 주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눈 부위를 보자마자 단순 타박상이라는 걸 금방 알아채서 바로 걱정을 접었습니다.(아내한테 혼날까 봐 말을 안 했습니다만...) 그 상황을 겪으면서 아이가 그래도 학교생활을 나름 잘 하고 있었구나 싶어 다행스럽기도 하고 역시 시골에 살길 잘했다 싶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참으로 착하고 순박하달까.. 뭐 그런.. 크흠..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회적 인간관계는 학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 외에 처음 만나는 선생님과 또래 친구들을 통해 살아가는데 필요한 관계를 배웁니다. 타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연습을 반강제로 하드코어 하게 할 수 있는 곳이 학교입니다.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 거의 타임 루프처럼 같은 인간들과 지지고 볶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학교에서 벌어집니다.
남자들이 군대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구조적 불편함도 있지만 내 의사와 무관하게 정해진 시간 동안은 그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문제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한정된 공간 속에서 똑같은 인간들과 시간을 공유해야만 한다는 점, 역시나 벗어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는 군대나 학교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잘 지내고 만족하면 다행이지만 불편한 일이 생기면 매우 아주 많이 억수로 굉장히 껄끄럽기 시작하고 부대끼다가 괴롭게 됩니다. 이게 어느 문턱값을 넘어가면 정신에 대미지를 받게 되고 초자아가 손상됩니다. 그러면 향후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관계에 있어 정상 범주를 벗어나 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학교 속 관계의 문제는 그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자기 아이만 감싸는 학부모까지 끼어들면 상식적인 해결도 어렵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까지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회 일원으로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바른 인간관계를 위한 사회성을 기르는 것이 목표라고 하기엔 고민할 부작용이 너무나 많습니다.
2. 비뚤어진 인간관의 결과물, 왕따 그리고 그 이면의 문제.
조영주 작가의 청소년 장편소설 <내 친구는 나르시시스트>는 표면적으로 학교 내 왕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표면적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왕따 문제를 표현하고 문제 제기를 하는 정도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학창 시절 인간관계의 대표적 문제인 왕따 현상에서 출발해 학생들의 민감하고 섬세한 정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왕따는 핑계고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그 과정에서 겪는 성장, 바른 관계로 나아가는 우정에 대해 깊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입니다.
왕따 현상은 사실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두렵기 때문에 내가 아닌 누군가 희생양을 정하고 모두가 그 한 사람을 따돌리면서 안도하는 형국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내가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선제적 대응의 결과물이자 다수의 암묵적 동의의 행위인 것입니다. 조영주 작가의 <내 친구는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심리적 동인에 대해 제대로 꿰뚫고 있는 소설입니다. 책의 후반부에 나애의 이상행동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인공 해환과 유일한 신뢰를 쌓아가는 정안과의 관계를 통해 좋은 친구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제멋대로이자 나르시시스트 같은 모습으로 기쁨과 괴로움을 동시에 주며 가스라이팅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주는 나애의 모습을 통해 정상적이지 않은 관계의 어려움을 고민하게 해 줍니다. 나애와 나애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가정 속 정서 문제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나애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노라의 모습을 통해 조력자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관계에 대해서도 이게 맞는 것인가 고민하게 해 줍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그들의 말과 행동, 역학관계가 따지고 보면 학교 밖 사회 속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되고 반복됩니다. 회사 생활에서는 물론이고 하다못해 동호회만 가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더 큰 틀에서 보면 온라인 관계와 느슨한 사회망 서비스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우리가 최소한 인간 사회 속에 머물러 살고 있는 이상 이런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상당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3. 위로와 추억, 치유의 글...
텍스트가 범람하지만 잘 짜인 정형화된 글을 읽기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어디든 텍스트가 넘치고 쉽게 이탈하고 옮기기 쉬운 디바이스를 지니고 있는 환경 속에서 장편 소설이라는 형식의 글을 읽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미덕 중 하나는 분명 가독성입니다. 다행히 이 소설은 스마트 기기를 달고 사는 학생들도 빠져들어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만큼 가독성이 뛰어납니다. 저 역시도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어느 인물이나 상황에 분명 공감하거나 욕하면서 읽을 수 있는 장치들이 잘 갖춰 있는 소설입니다. 솔직히 학창 시절에 왕따든 관계 문제든 크게 경험한 기억이 없어 소설 초반에는 심드렁하게 시작했으나 작가의 뛰어난 심리묘사와 섬세한 표현 때문인지 금방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공감해 몰입하거나 관찰자 입장에서 서사를 따라 읽거나 관계없이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다양한 장점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작가가 이 소설을 다루는 태도에 있습니다. 장년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교조적인 모양새가 1도 없습니다. 오히려 작가의 자기 고백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솔직한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작가의 후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이제 중학교에 입학하는 두 딸의 부모로서 아이들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어 좋았던 소설입니다.
조영주 작가의 <내 친구는 나르시시스트>는 친구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학창 시절을 배경으로 인간관계의 문제와 우정에 대해 섬세하게 잘 다룬 소설입니다. 작가가 마지막까지 쉽사리 결론 내리지 않고 독자들에게 그 공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마무리한 것도 인상적입니다. 이 소설이 학생들에게 인간관계를 돌아보고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학창 시절을 지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풋풋했던 그 시절을 지나온 성인들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할 소설입니다. 혹은 누군가에게는 아팠던 지난날의 치유가 있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