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별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책 리
1. 번역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다룬 맛있는 책
홍한별 작가이자 번역가의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굉장히 심오한 철학서이자, 대중적인 실용서이자, 인문학 서적입니다. 번역이라는 테마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저자의 인문학적 지식과 그간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인상적인 메타포를 활용한 문제작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번역의 난해함과 상충되는 방법론, 번역가의 고충과 입장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독자는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던 번역이라는 신세계에 발을 디디며 새로운 지식 +1과 함께 당황, 흥미, 애잔, 공감, 반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책을 읽다 보니 약간 당황스러운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홍한별이라는 번역가의 책을 이미 여러 번 접했음에도 왜 나는 "홍한별"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낯선가?' 번역서를 접할 때는 어지간하면 누가 번역했는지 대충이라도 보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가 스스로 의아해집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가 번역자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번역이라는 업을 이어나감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하고 진지한지를 깨닫게 되면서 미안함까지 느끼게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번역이라는 독특한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보여주려 하고 있습니다. 번역이라는 것은 늘 옳고 그름에 대한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고 정의도 있으나 아직까지는 누구도 속 시원하게 답을 내리지 못할 만큼 정답이 없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자가 답을 내리거나 방법론을 설명하거나 의미 부여를 완벽하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모비딕에 등장하는 흰 고래처럼 정의되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은유를 통해 해나가는 시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더 자세히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가 있는 그 사람이 왜,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지는 물론이고 그 분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역시 큰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이런 점에서 번역이라는 세계에 대해 딥하게 문제를 풀어낸 이 책은 저에게 너무나 큰 즐거움과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유머나 위트는 1도 없는 진지한 책인데도 혼자 흥미롭게 읽었던 것이지요.
번역이라는 것이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 분야라는 것에 대한 이해 한 큰술과 번역가가 번역하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은 고민과 번뇌의 순간을 지나는지에 대한 이해 또 한 큰술,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욕만 먹는 번역가의 입장에 대한 이해 한 큰술, 어떤 번역이 좋은 번역인지에 대한 이해 한 큰술, 변화하는 시대에 좋은 번역에 대한 고민 한 큰술 등 먹을 것이 너무 많고 오묘한 맛의 배합이 빛나는 책이었던 것입니다.
2.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느냐, 독자가 편하게 번역하느냐?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는 어떤 번역이 좋은가에 대한 주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번역을 지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니들이 좀 알아라고 항변하는 책에 가깝습니다. 물론 그 태도는 지극히 겸손하고 낮으며 논란이 있을 만큼 강한 주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 전반적으로 깔린 정서는 '그래도 내가 하고 있는 번역의 태도가 좀 더 이상적인 것 같다, 니 들이 이해해 주면 더없이 좋겠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번역가가 정확한 이해와 소화를 한 후에 최대한 맥락과 의도에 가까운 한국말로 매칭한다. 다만 원문의 세계와 문화에만 존재하는 그 무언가를 변환할 때는 최대한 우리나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것으로 바꾸고 그 번역문은 흐름에 불편함이 없도록 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번역가의 역량은 원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이를 바르고 고운 우리말로 옮기는 태도와 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잘 해내야 좋은 번역이지만 물론 내가 또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니 너무 발끈하지는 말자. 요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번역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지만 가장 큰 줄기는 "원문을 문자 그래도 1:1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VS 역자의 관여를 최대한 허용하되 원문의 문맥적 맥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의역하는 것이 옳다"의 대립입니다. 이 논란이 신기한 것은 원래 번역이 원본을 최대한 그대로 번역어로 옮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특정 언어로 표현된 글이 가진 문화와 역사, 사고방식 등은 다른 언어권으로 그대로 매칭될 수가 없습니다.
큰 틀에서 이 문화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번역 논란의 키 요소입니다. 맨 부커상 수상으로 화제였던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경우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는 지나친 의역을 넘어 오역에 가까운 번역으로 논란이 매우 컸습니다. 실제로 번역본을 읽은 사람들은 원래 소설의 의미뿐 아니라 오, 의역 때문에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반응 태도 등이 아예 바뀌는 일이 발생해 동일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가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번역본을 읽는 영미권 독자들은 그 소설이 한강의 원래 소설이자 원 의도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번역과 번역본 소설은 한강의 한글 소설과 같은 소설인가 아닌가? 그 번역은 잘 된 번역인가 아닌가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죠. 이 과정에서 번역을 대하는 우리와 영미권의 문화와 인식 차이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에서 번역은 최대한 역자의 의도와 개입을 배제하고 원 작자의 원본을 그대로 복원해 내는데 목적을 둔다고 이해하는 편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번역에 대해 딱히 고민을 한 적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영미권에서는 비 영미권 소설을 번역하는 데 있어 번역자의 개입이 어느 정도이든 상관하지 않을뿐더러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매우 관대한 것이죠. 이는 문화적 우월감과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고, 타국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기계적으로 단어 단위로 번역하는 것은 원본의 뜻을 그대로 살린다기 보다 어색하고 이상한 글이 될 위험이 크고, 오히려 원본의 뜻을 이해하는데 어려운 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역자의 고뇌와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지속적으로 토로합니다. 결국 원본을 살리려고 최대한 노력하되 국내 독자가 읽기 난해하지 않도록 번역해 내는 일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상적인 번역 여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는 영원한 숙제로 남겠지만요. 이런 문제를 한 번쯤 고민해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가치를 충분히 했다고 생각됩니다.
3. 챗 GPT 시대에 번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언젠가부터 4차 산업혁명 이후에 가장 먼저 없어질 직업 중 하나로 번역가를 들었습니다. 번역기가 다 알아서 번역해 주는데 사람이 할 일이 무엇이냐? 정도의 가벼운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번역기의 번역 수준이 그리 높지는 못했지만 인공지능의 놀라운 학습 속도를 생각하면 조금의 논란도 없이 완벽한 번역을 해 낼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상을 하는 것은 상식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챗 GPT를 비롯한 채팅형 AI가 우리 생활에 점점 더 밀착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예상이 갈리는 분위기입니다. 적어도 번역이라는 범주에서는 챗 GPT를 잘 활용하면 더 고도화될 것이라는 주장과 아무리 뛰어난 AI가 나온다 하더라도 전문 번역가의 인문학적 소양을 넘어서는 번역은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이 공존합니다. 이 부분에서 너의 사랑 나의 사랑 테드 창이 언급한 AI의 한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자도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기고글은 테드 창이 2023년 초 뉴요커 지에 기고한 "ChatGPT Is a Blurry JPEG of the Web(ChatGPT는 웹의 흐릿한 JPEG이다)"라는 글입니다. 본질적으로 기계인 인공지능이 아무리 인간의 방식을 모방하고 학습한다고 해도 방대한 양을 일부 취해서 압축하고 요약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호성과 흐릿함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챗 GPT가 자료를 모으고 취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 문제는 이 A.I이 정체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테드 창 정도 되니까 "나처럼 독창적이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글을 니들 기계들이 쓸 수 있것어? 이것들아!"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고도화되고 마치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느껴져도 웹 화면 반대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기계일 뿐인데 사람 같으면 사람인가?' 뭐 이런 궁극적이고 치명적인 질문인데 이 문제는 기계 번역, 인간 번역의 분야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됩니다.
가수보다 더 가수처럼 모창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원통 안에 몸을 숨기고 오리지널 가수보다 더 원본처럼 들리는 노래를 흉내 내는 출연자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통에서 나오면 전혀 다른 일반인일 뿐입니다. 그분의 노래를 대신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분을 우리가 좋아하는 가수로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테드 창의 문법이나 문장을 학습해서 테드 창보다 더 테드 창 같은 소설을 써 낼 수는 있지만 우리가 테드 창 이전에 테드 창 같은 소설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테드 창의 등장에 놀랐듯이, 아무리 테드 창 같은 소설을 쓰는 챗 GPT라 하더라도 앞으로 등장할 새롭고 놀라운 창의적인 소설을 쓸 영웅(아직 등장하지 않은 신선한 글을 쓰는 그 누군가) 같은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죠.
또한 챗 GPT의 활약이 광범위해지면서 오히려 인간이 이 A.I의 번역 스타일에 익숙해지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챗 GPT의 학습력은 놀랍지만 그보다 더, 더 놀라운 것이 바로 인간의 적응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저자도 본문에서 묘사하듯이 본인이 자신 있게 문학적으로 번역한 문장보다 A.I가 다소 어색하게 번역한 문장을 어린 친구들이 더 잘 된 번역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친구들은 이미 이 기계들의 번역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익숙한 것에 손들어 주기 마련입니다. 가스라이팅이 괜히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기계번역의 시대 우리는 기계에게 길들여져 무엇이 좋은 번역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기계 스타일에 파묻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이미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를 통해 번역에 대한 저자의 고뇌를 접하지 않았다면 저 역시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챗 GPT가 정의해 주는 데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