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전하지 않았을까요?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유통기한을 확인합니다.
오늘 산 두부도, 어제 들어온 우유도.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아무리 겉이 멀쩡해 보여도 손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같은 조건인데 다른 케이스에서는요.
통장에 넣어둔 돈의 유통기한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신가요?
원금이 그대로 있으니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누구도 다르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부모님도 그렇게 하셨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은행에 100만 원을 맡겼습니다. 1년 뒤 통장을 열면 원금은 그대로입니다. 이자도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10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줄었다면, 그건 안전한 걸까요?
돈에는 두 가지 숫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통장에 찍힌 숫자(명목 금액)입니다. 이 숫자는 예금에 넣으면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자가 붙어 조금 늘어납니다.
다른 하나는 그 돈으로 실제로 살 수 있는 것의 양(구매력)입니다. 이 숫자는 아무도 통장에 적어주지 않습니다.
예금은 첫 번째 숫자를 지킵니다. 확실하게, 변함없이.
그런데 우리가 노후에 필요한 것은 첫 번째 숫자가 아닙니다. 장을 보고, 병원을 가고, 밥을 먹는 데 필요한 것은 두 번째 숫자, 즉 실제로 살 수 있는 것의 양입니다.
마트에서 두부 한 모가 1,000원이었던 것이 1,500원이 됐다면, 10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두부는 줄어든 것입니다. 통장 숫자는 그대로여도 말이죠.
금융 교육에서도, 은행 창구에서도. "원금 보전"이라는 말이 "구매력 보전"과 다르다는 것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지난 40년의 기록을 한 번 보겠습니다.
1980년대, 예금금리가 20%였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땐 이자가 많았는데?"라고 하십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때 장바구니 물가는 30% 이상 올랐습니다.
2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식탁까지 밀려왔고, 예금이자가 높아도 쌀값, 기름값, 채솟값이 더 빠르게 올랐습니다. 실질적으로 예금자는 그 해에도 구매력을 잃었습니다.
2000년대로 오면 예금금리는 3~4%로 내려왔습니다. 공식 소비자물가는 2~3%로 관리됐으니 겨우 균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식품물가는 달랐습니다. 이 기간 한국의 식료품 물가 상승률은 OECD 29개국 중 3위였습니다. 예금이자로 받은 3만 원 안에 장바구니 물가 상승분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2010년대에는 예금금리가 1~2%로 떨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생활물가가 금리를 상시적으로 넘어섰습니다. 명목으로는 이자를 받았지만, 살 수 있는 것의 양은 매년 줄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부터 4년간. 생활물가 누적 상승률은 19.1%였습니다. 같은 기간 예금금리를 모두 합산해도 10~12% 수준이었습니다. 이 기간 예금자는 구매력 기준으로 약 7~9%를 잃었습니다. 통장 숫자는 늘었지만, 살 수 있는 것은 줄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주로 오는 경로를 보면 이해가 됩니다. 원유 가격이 오르면 가공식품, 배달비, 난방비가 따라 오릅니다. 재료비가 오르면 외식비가 오릅니다. 이것은 수요가 늘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공급 쪽에서 오는 충격입니다.
중앙은행은 공급발 물가 상승에는 금리를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식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물가보다 금리가 낮게 유지됩니다. 항상 예금자가 뒤처집니다.
이건 한국의 특수한 사정이 아닙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 연구에 따르면,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 당시 미국의 실질금리는 연 -5%를 기록했습니다. 예금을 해도 구매력으로는 매년 5%씩 잃는 구조였습니다.
영국도 같았습니다. 1950년부터 1988년까지 영국의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6.4%였고, 같은 기간 식품·비알코올 음료가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예금이자로 그 속도를 따라간 해는 드물었습니다.
일본은 더 극단적입니다. 버블 붕괴 이후 30년간 예금금리는 사실상 제로였습니다. 생필품 가격은 그 사이에도 올랐습니다. 일본의 저축자들은 30년간 명목 이자는 받지 못하고 구매력만 잃었습니다.
독일은 어떨까요. 2014년부터 유럽중앙은행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시행하면서, 독일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면 오히려 수수료를 냈습니다. '저축의 나라' 독일에서도 예금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IMF 연구는 더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선진국 12개국에서 1945년부터 1980년까지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였던 해가 전체의 절반이었다고. 이것은 구조적 현상입니다.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이 구조에는 이름도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라고 부릅니다. 정부가 예금금리를 인플레이션보다 낮게 유지함으로써, 예금자의 구매력이 조용히 줄어드는 현상입니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결과는 같았습니다. 예금자가 매년 조금씩, 알아채기 어려운 속도로 잃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예금은 구매력을 잃고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통장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으니까요.
비유 하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을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A 씨는 쌀을 쌀독에 넣어뒀습니다. 예금통장처럼요. 쌀독은 안전합니다. 쌀이 사라지거나 줄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매년 쌀 한 가마 가격이 오릅니다. 처음엔 10만 원이던 것이 40년 뒤엔 25만 원이 됐습니다. A 씨 쌀독에는 여전히 같은 양의 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쌀로 살 수 있는 다른 것들은 줄었습니다. 40년이 지나 자녀들이 쌀독을 열었을 때, 쌀은 그대로지만 그 쌀의 구매력은 절반도 안 됩니다.
B 씨는 논밭을 가지고 있습니다. 봄엔 씨를 뿌리고, 여름엔 가뭄 대비 수로를 정비하고, 가을엔 거두고, 겨울엔 이듬해를 준비합니다. 어느 해 홍수가 나도 논밭 어딘가는 살아남습니다. 40년이 지나 자녀들이 받은 것은, 그 땅 자체의 가치가 오른 논밭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우리는 왜 논밭 대신 쌀독을 선택해 왔을까요?
이 질문을 50년 동안 연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를 운용한 레이 달리오입니다. 그는 1971년, 20대에 닉슨 대통령의 금-달러 태환 정지 선언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내 경험은 너무 짧다. 역사 전체를 봐야 한다."
그 이후 수십 년의 연구 끝에 달리오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경제에는 4계절이 있다. 성장이 오를 때, 성장이 내릴 때, 물가가 오를 때, 물가가 내릴 때. 어떤 계절이 와도 버티는 자산들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입니다.
그가 1996년 자신의 가족 자산을 위해 처음 만든 포트폴리오가 All Weather, 우리말로 '4계절 포트폴리오'입니다. 2014년 그는 이것을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주식 30%, 장기채권 40%, 중기채권 15%, 금 7.5%, 원자재 7.5% 비율이 복잡해 보이지만, 원리는 단순합니다.
물가가 오르는 계절엔 금과 원자재가 빛납니다. 경제가 침체하는 계절엔 채권이 버팁니다. 경제가 성장하는 계절엔 주식이 오릅니다. 예금만 가지고 있으면 어느 계절에도 구매력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48년간(1972~2020) 이 포트폴리오의 역사적 성과는 연평균 8~9% 수준이었습니다. 최악의 해에도 시장 전체보다 절반 이하로 빠졌습니다. 수익을 극대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계절에도 논밭이 돌아가도록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포트폴리오도 단점이 있습니다. 2022년처럼 금리가 급격히 오를 때는 채권 비중이 높아 손실을 봤습니다. 과거 성과가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고, 달리오 자신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예금이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6개월에서 1년 치 생활비는 예금으로 두는 것이 맞습니다. 당장 쓸 돈은 쌀독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10년, 20년, 30년 뒤에 필요한 돈까지 쌀독에 넣어두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돈은 논밭에 심어야 합니다.
이걸 아시는 순간, 예금통장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원금이 있다는 안도감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 안도감이 구매력을 지켜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금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쓰임이 있습니다. 다만 쌀독은 당장 쓸 쌀을 담는 곳이지, 40년 뒤의 밥상을 준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논밭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세금까지 돌려받으면서?
참고 자료
한국은행, '최근 가공식품 등 생활물가 흐름과 수준에 대한 평가' (2025.06)
Reinhart & Sbrancia, 'The Liquidation of Government Debt', IMF Working Paper (2015)
Bridgewater Associates, 'The All Weather Story' (bridgewater.com)
레이 달리오 / 토니 로빈스 인터뷰 (2014) — All Weather 포트폴리오 공개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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