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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Aug 19. 2024

순수의 시절, 시오타츠의 아이들

여행 속 영화, 영화 속 여행


우레시노의 온천마을은 아침부터 밤까지 소박하고 고요했다. 느긋하게 온천을 하고 나면 무작정 숙소 밖으로 나갔다. 자박자박 걸으면서 우리가 묵지 않는 다른 료칸을 보러 다녔다. “이 료칸은 후원에 연못이 있구나.” “단풍나무가 아직도 붉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까이에 있는 볼거리는 거의 다 찾아본 후였다. 관광안내소에서 받았던 관광 지도를 펼쳤다.


하얀색 회벽을 칠한 가옥들이 나란하게 늘어선 골목길이 보인다. 우레시노 시오타츠 마을. 옛날 나가사키에서 기타큐슈시로 가는 도로의 역참도시 역할을 한 곳으로 에도시대의 전통 가옥이 남아있는 곳이다. 2005년에 ‘일본의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 지구'에 등록되었으며, 강의 항구와 나가사키 카이도에 의해 번성한 상가 마을이라고 관광 지도에서 소개한다. 시간을 거슬러 옛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 골목에 가보기로 했다.


시외버스를 타고 우레시노시 소금청사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건너편에 작은 우체국 말고는 주변에 눈에 띄는 건물이 없어 잠깐 당황했다. 이정표를 따라 정거장 뒤쪽으로 걸어가니 좁다란 강이 흐른다. 작은 다리를 건너면 한적한 시오타츠 전통 가옥 보존지구가 나온다. 하얀색 2층 건물에 잿빛 기와지붕이 얹혀있다. 1층은 나무 문틀에 유리를 끼운 미닫이문으로 옛날 점방의 형태를 유지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걸어 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옛 가옥을 개조한 관광안내소에 들어가니 상주하는 직원이 없었다. 직원이 없어도 조명이 밝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화장실과 구급약품을 이용할 수 있게 준비해두었다. 여행자를 배려하는 손길 덕분에 처음 온 마을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언덕배기에 있는 작은 사찰 혼노지절에 올라가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경내를 둘러보고 내려와 천천히 골목길을 걸었다.





에도시대에 쌀가게였다는 안내판이 붙은 가옥이나 기념품 가게가 보인다. 보존 건물 사이로 현대적인 간판과 인테리어로 꾸민 카페와 식당 등이 섞여 있었다. 옛 가옥의 지붕 위로 파랑새가 날아가는 모양의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단순하면서도 시오타츠를 상징할 수 있는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보인다.


꽃을 두른 돼지 두 마리가 손을 잡은 뒷모습 아래 ‘BEAUTIFUL PORK’라 적힌 붉은 차양도 보였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문구에 웃음이 나왔다. 저녁때였다면 들어가서 고기 요리를 먹어보았을 텐데, 낮이라 아쉬웠다. 에도시대에 곤약 가게였다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옛 가옥도 만났다. 일본의 전통 복장을 입은 에도시대의 사람이 곤약을 사러 골목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시오타츠의 마을은 에도시대를 느리게 건너와 변화의 길목에 서 있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작은 마을은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여유를 건네준다. 골목 사이사이를 좀 더 깊숙이 음미하며 걷게 되는 매력이 있다. 걷다가 깔끔해 보이는 식당을 발견했다. 유리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주방에서 재료를 손질하고 안주인인 듯 앞치마를 한 젊은 여자가 싸릿대를 묶어 만든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다. 여행지에서는 평범한 일상도 근사해 보일 때가 있다. 빗자루질 하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아담하고 모던하게 꾸며진 식당이 포근하게 느껴져서 들어가 보았다. 역시나, 주인 부부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밥 위에 수란이 올라있고 그 위에 그린 빈을 고명으로 꾸민 볶음밥에 카레를 곁들여 먹었다. 동행은 야채와 양념한 고기가 얹어진 덮밥을 먹었는데 입맛에 잘 맞아서 흡족해했다.



식사를 마친 후 MILKBREW COFFEE라는 카페에 들렀다. 건물 정면에서 보면 흰 벽에 거뭇거뭇 세월의 손때가 묻어있고, 입구의 돌계단도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에도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면서 기와로 된 캐노피 아래 현대적인 통유리 문이 시선을 잡았다. 카페 안은 최신식 주방 설비와 냉장고, 커피 머신이 자리 잡고 있다. 커피와 함께 시나몬 롤을 주력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실내의 유리막 너머 작업실에서 에도시대 분위기의 나무 벽을 배경으로 직원들이 빵을 만들고 있었다. 시대는 변해가도 장인 정신은 그대로 물려받은 듯이 진지하고 경건하게 반죽을 한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는데 하얀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모습은 아늑하고 고요했다. 빵 반죽처럼 폭신하게 부푼 마음으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간간이 내리던 진눈깨비의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뜨거운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흰 눈이 내리는 대숲을 바라보는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숙소에 닿기 전에 눈이 그칠까 봐 몸이 달았다. 오전에 버스에서 내렸던 정류장 맞은편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지도에 쓰여있던 시오타 중학교의 하교 시간이 됐는지 학생들이 하나 둘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똑같은 교복에 흰 안전모를 쓰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건널목을 건너오며 맞은편에 서 있는 우리에게 고개를 끄덕하면서 “곤니치와”를 외치며 지나간다. 어떤 학생은 손까지 흔든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건너오며 인사하는 학생들을 향해 우리 역시 “곤니치와”를 외치느라 바빴다.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학생들이 신기했다. 한꺼번에 여러 명의 인사를 받으니 환대를 받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신작로를 따라 오래된 적산 가옥이 있는 인근 마을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한국이라면 북한군도 못 쳐들어 온다는 농담을 할 정도의 또래 중학생이 아닌가. 엘리베이터에 어린 학생과 단둘이만 타도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으니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어색할 때가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일본이 부러웠던 것 중 한 가지가 학생이건 어른이건 낯선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었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청소년인데 머리모양이 망가지는 것도 마다않고 하얀색 안전모를 쓴 모습도 귀여웠다. 게다가 휴대폰을 들고 있는 학생도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시오타츠를 떠올리면 1500년 대의 에도시대 건축물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인사하던 모습이 따뜻한 기억으로 다가온다.



두발자전거는 어린아이에서 소년 소녀로 넘어가는 경계를 상징하는 물건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어려서는 혼자서 타기가 어려웠고 어른이 되고 나면 놀이처럼 즐겁게 탈 기회는 점점 줄어드니까.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어른이라면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첫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었다. 뺨을 어루만지듯 다정한 바람과 자전거로 달리며 가르던 팽팽한 공기도 잊지 못한다.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혼자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더는 못해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맑은 영혼과 순한 솜털의 시절.


<순수의 상징으로 자전거를 보여준 영화 E. T. >


2005년에 개봉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 떠오른다. 윌리 웡카(조니 뎁)의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초콜릿 공장을 견학하게 된 소년 찰리 버킷(프레디 하이모어)의 이야기다. 찰리는 초콜릿 공장 옆의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집에서 엄마와 아빠, 네 명의 조부모까지 대가족이 살았다. 일 년에 한번 생일에만 초콜릿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가난했다. 찰리가 거대한 초콜릿 공장을 견학할 수 있는 다섯 장의 황금티켓 중 한 장에 어렵게 당첨된다.


다른 네 명의 당첨된 아이들은 웡카의 초콜릿 생산 발명품이나 신기한 움파룸파족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각각 소유욕과 이기심, 승부욕과 과시욕에 눈이 멀어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다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찰리가 웡카의 후계자로 뽑혀 초콜릿 공장을 물려받게 된다. 환상적이면서 해피엔딩의 결말은 어른이 되어도 신비롭고 재미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스틸컷>


한국에 돌아온 어느 눈 오는 날이었다. 길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입을 뻐끔거리며 내리는 눈을 받아먹는 한 아이를 보았다. 우연히 마주친 천진함이 바닷가 모래 사이에서 예쁜 조가비를 주운 듯이 반가웠다. 슬며시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아이는 모르는 채 눈 맛에 반해 있었다. 강물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반짝이는 아이.


시오타츠에서 내게 인사를 건네던 학생이나 내리는 눈을 받아먹던 아이가 더는 자전거를 타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럼에도 순수는 계속되기를 소망한다.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찰리처럼 결국에는 순수가 욕망을 이기는 세상이기를. 순수하다는 이유로 누구도 상처 입지 않기를. 시오타츠의 한적하고 정겨운 에도시대 골목길과 아이들이 가끔 생각난다. 자전거에 실려왔던 순수의 시절을 생각하면 어쩐지 애틋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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