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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 Im Jul 17. 2021

하동 우전 2021.05.

도시고양이 생존연구소의 햇차

그는 작은 은박 봉투를 슬쩍 내밀었다. 그의 누나가 수확한 햇차인데 전문가가 아니라 손님들에게 권하기는 조심스럽다는 말을 덧붙이며. 소박한 크래프트지 견출지에 쓰여있는 ‘우전 2021.05.’라는 손글씨. 도착하자마자 온갖 다구를 주섬주섬 꺼내는 나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숙소 앞 작은 녹차밭을 가만히 놀리기 아까워 2년여 전부터 소소하게 차를 만들고 있단다. 정규 수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잎을 따는 날짜와 온도와 말리는 방법을 바꾸어 가며 최상의 맛을 내고자 직접 실험을 하고 있다고 했다.


흔히 보는 반짝반짝한 무지 은박 봉투를 여니 녹차 특유의 쌉쌀한 풋내음이 배어 나왔다. 물을 80도로 맞추어 끓이고 한 김 식혀 여행용 다구에 천천히 붓는다.

차 한잔을 우려 마시고 멍하니 숙소의 통창 너머 섬진강과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고 있으려니 오래 전의 내가 떠올랐다.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계속 걸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찍 접어야 하는지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릴 때가 있었다. 고민이 많아 항상 얼굴에 그늘을 달고 다니던 나를 본 선배가 늦은 오후 담배나 한 대 피자며 밖으로 불러냈다. 담배 연기라면 질색이지만, 얼굴을 보니 무언가 할 말이 있구나 싶어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잘해왔고 잘하고 있고, 또 계속 잘할 거야. 회사에서 그 일을 제일 잘 아는 건 지사장님도 본사 사람들도 아닌 너야.’

군더더기 하나 없이 믿음만이 가득 담긴 그 한마디가 그 후 다음 3년을 버틸 힘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가끔 이유 없는 응원을 바란다. 객관적으로 점수 매긴 냉정한 평가 말고, 그저 내 편의 이유 없는 응원의 말. 거창한 미사여구는 없지만 그 자체로 힘이 되는 단단한 말.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믿고 싶어 지게 만드는 말.



그녀가 만든 차는 중국의 여느 몸값 비싼 차들과 같은 화려한 개성은 없었다. 난꽃 향이라던지 혀끝에서 느껴지는 꿀 향이라던지 하는 그런 것들. 그저 모난 곳 없이 무난하고 따뜻했다. 오래 발효한 차들과 달리 본래 햇차는 싱그러운 느낌이 드는 만큼 차가움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얼굴 모를 그녀의 녹차에서는 온기가 피어올랐다. 한 모금 입에 머물고 서툴지만 열심히 차를 말리고 덖었을 그녀를 그려본다.


풋내 나는 녹차에 풋내 나는 사회 초년생 시절의 내가 겹쳐 보여서 핸드폰을 집어 들고 토도독 문자를 보낸다. 지금 당장은 확신이 없어도 좋아하는 일을 지치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즐기시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사장님~ 누님께 우전 맛있다고 인사 부탁드려요! 원래 청차, 홍차 좋아하고 녹차는 컨디션 안 좋을 땐 심장 두근거리고 잠 못 자서 세작만 가끔 마시는데… 수렴성도 없고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따뜻한 맛이라 편하게 마셨어요. 감사합니다!’




‘도시 고양이 생존 연구소’라는 숙소의 이름처럼 상처 받은 도시 고양이들이 조용히 숨어들어 서로에게 말없이 온기를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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