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노동뉴스 기고
설연휴 동안 <미세스 아메리카>를 봤다. 이 드라마는 미국의 성평등 헌법 수정안(Equal Rights Amendment, ERA)을 둘러싼 1970년대 운동을 그렸다. 수정안 내용은 매우 상식적이고 간단하다. “법에 따른 권리의 평등은 미국과 어떤 주에서도 성별을 이유로 거부·폐지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헌법에 넣자는 것이다. 드라마는 ERA를 둘러싼 찬반운동 양쪽을 보여주는데, 활동가 입장에서 운동 방향과 전략에 대해 고민할 지점들이 많았다.
드라마에서 백인 이성애자 페미니스트와 흑인 여성, 그리고 레즈비언 여성은 운동 전략의 차이로 갈등한다. 성별뿐만 아니라 인종을 이유로도 차별을 겪는 흑인 페미니스트는 인종차별 문제보다 성차별 문제가 덜 다뤄지는 것에 불만이 있는 페미니스트와 갈등한다. 레즈비언이랑 함께하면 흑인운동의 지지를 못 받는다며 레즈비언을 배제하려는 의견도 있다. ‘서로 우선순위가 다른 갈등을 어떻게 조율하면서 최대한 다수를 형성할까’의 문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청년실업과 정년연장의 갈등, 기후위기 대응과 실업문제를 떠오르게 한다.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 우호적인 남성들을 포섭하고, 정치인과 타협해 실질적인 성과를 얻어 내려고 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운동은 한쪽만의 지지가 아니라 폭넓은 모두의 지지를 얻어야 성공할 수 있다. ERA 활동가들은 미국 민주당부터 공화당까지 그 안에 들어가 영향력을 넓힌다. 낙태 합법을 명확히 말하기 부담스러워하는 정치인에게 “다른 단어로 우회해서 말해도 된다”고 제안하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목표를 낮추는 것도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당선 가능성이 높은 남성 후보자를 지지해 실리를 얻기 위해서 여성 후보에게 사퇴를 설득하는 모습이나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성추행도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지?’라는 물음을 되새기게 한다.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단연 반ERA운동을 이끄는 ‘필리스 슐래플리’다. 슐래플리는 본인조차도 ‘가정을 방치하고 정치활동을 한다’는 남편의 비난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문성을 의심당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나, 반ERA를 통해 본인과 보수주의자가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거란 계산하에 움직였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정주부를 멍청하고 못 깨우친 사람이라고 비하하고 있고, ERA는 여자를 군대와 일터로 억지로 내모는 것’이라며 ‘이것은 여성의 특권을 앗아 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ERA 반대해야 한다’며 전업주부를 조직한다. ERA 활동가들이 ‘결혼은 매춘이다’ ‘집에서 빵이나 굽고 법 해석은 변호사에게 맡겨라’고 말할 동안 말이다.
슐래플리를 보며 우리의 운동이 혹 누군가를 비난하고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관련해 다시금 청년노동자와 공정성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고 있다.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청년노동자들은 ‘전체를 볼 줄 모른다’거나, ‘이기적’이라던가, ‘일부’의 이야기라는 말들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사람들과도 한 일터에서 같이 일해야 한다. 싸움과 배제 대신 그들을 이해하고, 설득하고, 협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운동이 ‘같은 편끼리 모여서 떠드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활동가라면 앨리스를 유심히 봤으면 좋겠다. 슐래플리의 친구인 앨리스는 ERA운동을 슐래플리에게 소개시켜 주고, 함께 반ERA 운동을 한다. 슐래플리를 비판하는 페미니스트에게 “필리스가 들고 일어나기 전까지 우린 심야 토크쇼의 단골 안줏거리였어요. 직장에 나가 일하는 대신 집 안에서 아이를 돌보는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주부로서 슐래플리를 적극 옹호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랬던 앨리스는 1977년 휴스턴에서 열린 전국여성회의에 반ERA를 알리기 위해 참가했다가 변한다. 여러 부스를 돌던 그녀는 직접 페미니스트를 만나 보니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애국적인 가사여서 즐겨 불렀던 노래를 만든 사람이 알고 보니 사회주의자라는 걸 앨리스가 알게 되는 장면에서는,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반대한다며 차이코프스키(동성애자다)의 곡에 맞춰 공연을 한 개신교 단체가 생각났다. 앨리스처럼 직접 와서 생각이 조금이라도 변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노동운동도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부딪치고 교류하며 접점을 늘리는 것을 지향했으면 한다. 생각이 변한 앨리스는 반ERA 활동가들에게 “우리가 왜 페미니스트의 모든 의제에 반대해야 하죠? (우리가 반대하지 않는 의제에 대해) 최소한 합의는 해야 하지 않나요?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줘야 해요”라고 말하고, 모든 불평등에 맞서고자 하는 페미니스트 결의안에 찬성한다.
앨리스와 같은 사람을 늘리는 것은 물론 어려운 길일 것이다. 필리스 슐래플리를 비롯해 드라마에서 계속 등장하는 주요인물들은 모두 실존인물이지만, 유일한 가상인물이 있다. 예상했겠지만, 앨리스다.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있다. 앨리스처럼, 반ERA측 대의원이면서도 페미니스트들의 안건에 찬성을 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반대자를 향한 교류와 설득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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