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 속에서 번쩍이는 하늘

임현정의 라흐마니노프 2번

by 소이
Ivan Aivazovsky, 「Storm on the Sea at Night」 어둠과 폭풍 속에서도 잠깐 열리는 빛의 틈,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전하는 울림과 닮았다.


나는 깊이 있는 음악이 듣고 싶은 날이면 늘 라흐마니노프를 찾는다.


그의 음악은 쇼팽의 서정과는 결이 다르다. 어둡고 깊은 강을 건너는 듯한 긴장, 묵직하게 차오르는 밀도의 울림이 협주곡 속에 흐른다.


라흐마니노프의 삶을 떠올리면 그 울림의 근원이 이해된다. 1번 협주곡의 실패와 깊은 좌절, 그리고 심리치료 끝에 완성한 2번 협주곡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후의 작품들은 강인함과 동시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서정을 품는다. 그가 남긴 음표 하나하나는 ‘한계’가 아니라, 절망을 뚫고 도달한 진실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조성진을 비롯한 전통적인 해석을 들었다. 균형 잡히고 매끄러운 라흐마니노프였다. 하지만 임현정 음악가의 협주곡을 들은 순간, 피아노 하나가 오케스트라처럼 가득 차올랐다. 실제로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을 오케스트라 없이 피아노 독주로 편곡해 연주했는데, 그 선택 자체가 이미 독창적인 해석이었다. 그녀의 연주는 폭풍우 속에서 번쩍이는 하늘 같았다. 건반이 호흡처럼 끊어질 때마다 긴박감은 더 짙어졌고, 파도 사이로 잠시 드러나는 하늘의 틈새처럼 새로운 빛이 보였다.


모든 청중이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었지만, 바로 그 독특한 해석 덕분에 나에게는 강렬한 울림으로 남았다. 그 순간 나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균열 속에서 번쩍이는 빛을 본 것 같았다.


아직 편곡 악보를 구하지는 못해 정확한 연주 방식을 알 수는 없다. (요즘 악보 읽는 법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ㅎㅎ) 다만 그녀의 연주에서 느껴진 ‘끊김’은 오히려 울림의 일부였다. 마치 울림이 좋은 연주회장에서 페달을 떼었을 때조차 남아 있는 명확하지만 작은 울림. 그리고 큰 울림과 작은 울림이 겹치며 만들어지는 잔향. 그 흔들림이 마음을 흔드는 감동을 남기는 것 아닐까.


아마도 진심으로 무언가를 마음에 받아 울림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삶의 잠시의 틈과 멈춤조차 새로운 울림이 될 것이다. 그 잔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머물다 다시 우리 안에서 피어나는 메아리. 마치 폭풍우 뒤에 드러나는 하늘빛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깊고 단단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


임현정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YouTube)​



「나의 작은 조각들 2」

끝까지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께 따뜻한 감사를 전합니다. :)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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