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이 길어진 날

by 소이

둘 다 아무 일정도 없는 하루가 느리게 흘러가도 괜찮은 날이었다. 잠시 낮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선배는 소파에 앉아 클래식을 듣고 있었다. 요요마의 첼로가 낮게 울리며 공기 속을 천천히 채우고 있었다.


그는 거실로 나온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막 깬 사람 특유의 흐릿한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잘 잤니?’ 묻는 듯한 미소를 띠고 그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볼륨을 아주 조금 올렸다.


우리는 편안하고 따뜻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책장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책장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선배의 시선은 계속 나를 따라왔다. 내가 어떤 표정으로 책을 고르는지

어디에서 시선이 멈추는지 말없이 지켜보는 눈빛이었다.


한편에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작가들의 새 책들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내 책장에 있으면

네가 필요할 때 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는 설명하듯 말했지만 목소리는 변명에 가까웠다.

내가 놀라거나 부담스러워할까 조심스럽게.


그의 눈빛이 잠시 머뭇거렸다. ‘이 정도면 괜찮을까’ 하고 묻는 것처럼. 나는 가만히 선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선배의 눈빛이 만족스러운 듯 조금 느슨해졌다.


다시 소파에 앉아 각자의 책을 펼쳤다.

같은 공간, 같은 음악.

B&O 스피커에서 흐르는 소리는 다정한 커피 향과 함께 방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었다.


책장을 넘기던 중 선배의 시선이 다시 느껴졌다.

머무르는 눈빛.


그는 아무 말 없이 조금 옆으로 다가와 나를 안고 앉았다. 책을 든 팔이 자연스럽게 겹쳤고 숨결이 아주 가까워졌다.


“불편해?”


작게 묻는 목소리.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하는 그의 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어깨에 조금 더 몸을 기대었다.


선배는 그제야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은 계속 내 등을 감싸고 있었다.


같은 소파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서로 다른 책을 읽고

서로 다른 문장을 따라가면서도

같은 온도 속에 머무는 시간.


말보다 시선이 먼저 닿고 행동보다 배려가 먼저 오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깊은 감동이었다.



사실…

책장은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지만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음악과 숨소리 서로의 체온이

조금씩 감각을 덮어갔다.


선배의 손은 등에 얹힌 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지금 이 거리를 유지하겠다는 듯.


나는 그의 팔 안에서 아주 미세하게 자세를 바꿨다.

더 편한 쪽으로 더 기대기 좋은 방향으로.


그 작은 움직임을 선배는 느꼈다. 시선은 여전히 책에 두고 있었지만 팔에 힘이 아주 조금 들어갔다.

붙잡기보다는 놓치지 않겠다는 정도로.


음악이 한 곡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그 사이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선배의 턱이 내 머리카락에 살짝 닿았다.

의도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고

그의 호흡도 같은 리듬으로 맞춰졌다.


페이지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췄다. 책을 덮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읽고 있지는 않았다.


내 손이 소파 위에서 그의 손등에 닿았다. 깍지를 끼지 않아도 손을 붙잡지 않아도 서로가 충분히 서로의 마음을 느꼈다.


선배는 손을 뒤집어 내 손을 감쌌다. 힘을 주지도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그 손의 온기가 내 손에 천천히 퍼졌다.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 그의 목선 가까이에 이마를 기댔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내 머리 위에 가볍게 입술을 닿아 내렸다. 소리 없는 키스.


그 뒤로도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음악이 몇 곡이나 바뀌었는지 해가 얼마나 기울었는지 아무도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 없어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이 오갔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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