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소풍 장소가 '연미정'이면 다들 실망했다. 허물어진 성과 낡디 낡은 정자가 덩그러니 있는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서 시시했다. 우리는 삼삼 오오 김밥을 먹고 풀이 가득한 곳에서 그냥 이리저리 망아지들처럼 뛰어놀다가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모여 줄을 선 후 다시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읍내로 돌아와 학교에서 해산했다. 분명 선생님께서 이 장소의 유래가 고려 시대의 학교였었다던가, 서해로부터 한양으로 가는 배들을 이 정자 밑에 묶어 놓고 조류를 기다리다가 '물때'가 맞으면 한강으로 들어갔다던가, 하는 또는 연미정 가는 북산 넘어 산길을 따라 들러 모두 다 같이 묵념으로 예를 올리고 지나왔던 어떤 무덤이 사실은 '조선시대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왜구를 물리치고 큰 공을 세운 황형 장군의 묘'였고 이 연미정이 황형 장군에게 하사된 곳이라는 이야기를 분명했을 터이다. 우리들은 어렸고 그저 어서 김밥과 사이다를 먹고 저 넓디넓은 풀밭에서 뒹굴며 놀 생각이 가득하여 듣지 않았으리라.
10년 넘게 불안 장애와 공황 장애를 겪었다. 항상 발이 공중에 뜬 채 다녔다. 직장 생활도, 가정생활도, 신앙생활도 나무랄 것 없이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수행하고 있었지만 한 번씩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과 고통이 엄습하면, 어릴 때 살던 집 마당에 있던 우물 그 깊고 바닥이 보이지 않던 그 안에 빠지지 않기 위해 가장자리에 매달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때면 [니체의 말]을 옆구리에 끼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땐 남편이 6년 동안 주말에만 집에 올 수 있는 곳에서 근무했었고 두 딸은 고등학생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그때 나는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니체의 말]을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손님이 없는 시간의 카페 주인이 자꾸만 내게 말을 걸면서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나는 그를 피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했다. 어떤 맵게 추운 겨울에 무작정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가 이곳에 닿았다.
하늘은 유리처럼 새파랗게 맑았고 차가운 북풍에 뺨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연미정 돈대 앞에 서서 바라보는 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게냐......'
강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자, 보아라. 이 강은 북한의 개풍군과 파주, 그리고 동쪽으로 김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흐르고 흐르다가 물길이 서로 만나 합쳐지는 곳이다. 그렇게 만난 물길은 이 제비꼬리 같이 생긴 이곳을 돌아 한길은 서해로, 한길은 갑곶 앞을 지나 인천으로 흐른다. 너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게냐. 다 지워라. 네가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지워라. 그저 이 제비 꼬리 위에 타고 앉아 이 물을 응시하거라. 그리고 이 물에서 배우거라. 물처럼 살면 그만이다. 흐르다 합쳐지고 무얼 만나 길이 막히며 둘로 갈라지더라도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다시 만나는 물처럼 살아라. 괜찮다. 물처럼 살면 아무것도 네 탓을 하지 못하리라.....'
그날 저 강물을 바라보며 돈대에 서서 소리 죽여(민간인 통제 구역 안쪽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해병 대원이 볼까 봐) 흘린 눈물이 냉면 대접으로 한 대접은 넘지 않았을까?
고려 시대 지어진 팔각지붕 정자. 정자 오른쪽 앞쪽과 뒤쪽에 나란히 수백 년 된 느티나무 고목이 우람하게 그늘을 드리웠지만 태풍 링링으로 뒤쪽 한 그루가 댕강 허리가 부러져 넘어졌
그때부터 나는 수시로 이곳을 찾았다. 여름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졌다는 이 팔작지붕 정자의 맨질맨질한 마루 위에 앉아 두어 시간씩 책을 읽다가 오고, 날씨가 좋고 맑은 봄가을엔 강화읍내 고려궁지와 북문을 지나 오읍약수를 끼고 산길로 옥림리를 돌아 걷는 나들길을 두어 시간씩 걸어 여기까지 왔다. 혼자도 좋고 친구와 함께 걸어도 좋고 남편과 걷기는 더 좋았다. 그리고 겨울에는 한 해를 정리하고 성탄을 앞둔 '대림 판공성사'를 준비하면서 이곳을 찾았다. 한양에서 파견된 강화 유수가 배를 타고 이곳을 들어와 강화읍까지 행차를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선시대 가난한 촌부가 되어 밭에 서서 고단한 노동을 하다가 핑계김에 허리를 펴고 서서 일손을 멈추고 불어오는 바람에 땀도 식히고 그 행렬을 구경하는 상상도 해 본다. 말 위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논밭에서 일하는 백성들을 둘러보고 있는 강화 유수의 불편한 표정도 상상해 본다. 그는 이 섬으로의 파견이 마치 유배같이 여겨져 어떻게 하면 파견 즉시 최대한 빨리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었을지 모른다. 강화도는 유배 온 양반들이 흔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죄인 신세인 그들에게 존댓말을 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하대하자니 나중에 낭패라도 당할까 싶어 반존대를 하곤 하였다고 한다. '진지 잡수셨시꺄?'
지난 추석 연휴 친구와 함께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머리에 두고 시원한 바람을 등뒤로 받으며 나들길을 걸어 연미정에 왔었다. 제법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내가 안다. 정자를 사이에 두고 수백 년 느티나무 두 그루가 그늘을 드리워 주었는데 태풍 '링링'이 좌측 느티나무를 쓰러뜨렸다.(사진 오른쪽 뒤편) 안타까운 거목의 죽음이 얼마나 서운하던지 그 부러진 동강을 눈으로 한참 어루만졌었는데 놀랍게도 싹이 돋고 자란 고목의 부활을 목격하였다. 아마도 올해 본 중 가장 희망적인 사건이 아니었을까. 이 나무들을 보면서 나는 부러질 망정 버티는 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알았던 나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서 흔들릴 줄 알아야 부러지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하지만 어떤 신념은 비록 거대한 힘에 의해 부러진다고 해도 다시 싹을 틔울 수 있는 강인함을 요구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 독립투사들이나 신앙의 순교자들처럼 지키고 되찾아야 하는 것을 위해 나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곳에 오면 삶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두 물줄기가 합쳐져 감돌아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큰 바다로 나가는 이 아름다운 물의 이치를 눈으로 목격하며 내 삶은 싱겁고 가벼우며 지나간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화도에 오면 꼭 한 번 둘러보기를 권한다. 그저 역사가 깃든 옛 유적으로서의 가치 때문이 아닌 누구라도 세상이 할퀸 상처를 바람이 핥아주고 치유해 주니 다른 생각 말고 오로지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곳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