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던 순간이 내게 깊게 배어있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 걸까.
이 마음은 뭘까.
그를 좋아하게 될까 봐 애써 마음을 누르는데 자꾸만 마음이 보채는 건 정말 내가 그를 좋아하기 시작해 버렸다는 신호일까.
나는 그에게 인간적 호감이 있는 걸까 이성적 호감이 있는 걸까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이면 나는 아직 그가 좋아지기 전인 걸까.
그런데 그렇게 애를 써서 끝내야 하는 마음이면 이미 이 마음은 시작된 마음인 거 아닐까.
이 마음이 정말 그를 향해 시작된 내밀한 마음인지 알아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한다.
그러면 그를 마주해야만 하는데, 그래야 이 마음에 갈피가 생길 것 같은데 불행히도 그와 나는 접점이 없다. 단 하나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그는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베이지색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특유의 그 호탕한 목소리로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한눈에 그가 들어왔다.
당시에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바빴고 연애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완전히 잊었다.
내 인생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다시 생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그때 나는 내가 누군가를 영원히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을 떠나 누군가를 보고 좋아지지를 않으니 나에게 사랑은 없는 건가 보다, 생각하고 암묵적 비혼주의자로 살아갈 내 운명을 예견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다 그를 다시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여름밤 상반기 행사의 마지막 저녁 그가 무대에 섰다.
그는 노래를 불렀고 나는 무대 가까이에서 정말 행복한 마음으로, 기쁨으로 충만해서, 신나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여러 싱어들을 바라보며 방방 뛰며 열과 성을 다하며 함께 노래하고 있었다.
그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1초, 2초, 3초
자연히 다른 곳을 보다 다시 그를 보게 되었다.
1초, 2초, 3초, 4초
너무 오래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아 한 번 다른 곳을 봤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그를 보게 됐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1초, 2초, 3초
정말 찰나였을텐데 아주 오랜 시간 그와 내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동되었다가 중심에서 노래를 이끌고 가는 그의 포지션에 의해
다시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그러다 한참을 그의 눈을 보며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마주한 채 또 몇 초가 흘렀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마 그는 그때 내 존재를 처음 인식했을 텐데 나는 그에게 어떤 처음으로 남겨졌을까 궁금하다.
그 몇 초의 시간이 여전히 내게 방금 있었던 일처럼, 지금 그가 내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때 그의 눈빛이, 내가 마주하고 있던 그 검은색 안경테 너머의 짙은 검은색 눈동자가 아직도 깊게 내 눈망울에 새겨져 있다.
그때 그는 어떤 생각으로 나를 봤을까.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렇게 노래를 부를 때 그와 눈이 마주치던 순간, 그리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
나는 그 공간에 그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 주변에서 함께 뛰며 노래를 부르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희미해지고
그 우레와 같은 노랫소리와 함성은 다 소거된 채 세상이 일순간에 조용해져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와 무대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
딱 그 둘만이 이 소란 속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를 기억했다.
왜 그였을까.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갔다.
이후 나는 나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 마음이 흐르게 되었고 그래서 짝사랑을 시작했고
겁 없이 달려든 사랑에 무참히 데인 채 너덜너덜해진 채로 봄을 맞이했다가
애플스토어의 그 남자에게 용기를 내보고, 나에게 다가온 사람과 연락도 해보다 정리도 하고
사랑에 있어서 내 인생에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던 누군가를 보고 좋아지고 간지럽고 설레는 감정을 느끼며
사람을 대하는 것에, 사랑을 건네는 것에, 관계를 시작하고 이어가고 끝내는 것에
그 모두에 성장한 채 새로운 여름을 맞이했다.
그 여름밤이 지난 지 꼭 1년이 되는 새로운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