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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라다이스 Jun 16. 2021

이슬아의 에세이는 관찰이다.

출근길 전철서 날마다 읽어 본 이슬아에 대해.

이슬아의 에세이를 보면, 
“누구는 뭐뭐 한댔다. 누구는 내게 어떻다고 말했다”는 이런 문장이 왕왕 등장한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과 가족, 그녀를 스쳐간 이름 모를 타인들이 이슬아를 보고 하는 

평이나 소감, 의견들인데, 이슬아는 자신을 향한 수 많은 ‘타인의 소리’들을 그저 글자로 옮겨놓았다는 표현이 맞게 사실적으로 담는다. 


나는, 이슬아가 펼치는 스토리텔링도 물론 좋아하지만, 자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타인의 이야기와 자신과 목소리를 섞은 타인의 소리에 대한 대목들을 특히 더 애정한다. 


나는 왜 그게 좋은걸까?


가만히 잠겨 본다. 

아무래도 내가 갖지 못한 어떤 부분을 이슬아가 건드리고 내면을 울린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의 결핍도, 이슬아로부터 내가 느낀 소소한 삶의 기술도  

더욱 명확하게 찾아내고 싶었다.  

발견의 욕구는,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누가 보낸 것인지 주체가 미지한 신비함으로부터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은지 가는 길을 제시 받을 수 있다. 


내게도 한 가닥 해답 같은 길이 보였다. 

문득 이런 타인의 소리가 자신에게 민감하게 반응되고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안으로 일단 밀어 넣으면, 이슬아 같은 사실적 에세이를 쓸 수 있을까? 하는 단초였다.

어휴, 생각만도…이슬아는 일상을 담아내는 직업적 에세이스트인데, 

남의 소리를 모두 자신 안으로 담아 놓는다면, 

지금의 에세이 작가 이슬아를 낳을 수 없겠지, 이 생각 하나만은 말끔하다. 

나의 성향이라면, 이렇게 글들을 채웠을지 모른다. 

누구는 나한테 뭐라고 말했다, 정말 그런가, 여기서부터 나는 시작해서 진중하고도 깊게 파고 들어 가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타인이 누구든 상대가 하는 말엔 무조건적으로 그 사람이 내게 한 말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 칭찬인지 빈정댐인지,  거짓인지 진심인지, 정성을 담은 이야긴지 인사치례인지, 

말 한 마디를 마이크로 하게 쪼개고 쪼개, 내 스스로 진위여부를 따지는 검증 작업을 가열차게 할 것이었다.

그래서 만에, 저열하고 나쁜 의도가 숨겨진 말이었다면, “그 말은 나를 쐈다” 로 규정하고, 

경험과 지식을 총 동원해 나를 쏜 말을 결국 반박하고 비판정신이 듬뿍 묻어난 훈계조로 상대를 끝내 박살내는 ‘관계의 습관’을 또 한번 견고히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건 내가 타인의 말을 스펀지처럼 무조건적으로 쭉 빨아들이는 악습관의 결과다. 


그런데, 이슬아 에세이에선 남의 말들은 있되, 자신안에 들여 놓아 만들어진 또 다른 감정도, 영향을 받은 자신의 감정을 복구하기 위해 끌어다 쓴  어떠한 증거나 반박도 없다. 

그녀의 글에서 타인에 대한 판단이나 평가를 못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내가 바라본 이슬아의 삶의 기술 중 하나다.  


이슬아가 지닌 삶의 기술 1 

이슬아는 ‘그저, 관찰한다’ 


이슬아의 에세이엔 ‘관찰’이 주를 이룬다. 

섣부른 자신의 판단을 풀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대로를 

다뤄 놓았다.  


외부 자극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이슬아 자신’이 이슬아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 지점이 미치도록 부럽고 그러한 이슬아의 강단을 배우고 싶다. 

그녀가 노력한 결과인지, 그녀의 성품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구현이란 것만은 알고 있다. 

그 사랑은 자기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 자신을 온전히 존중하는 기조인데, 적어도 남에 말에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은 갖지 않는다.


그건 원천적으로 그녀가 가진 기질, 아닐까.  

난 그 기질이 참 부럽다.


이슬아의 삶의 기술 2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 삶. 


이슬아의 글엔 유독 많이 나오는 문장과 단어가 있다.

‘관종’, ‘나는 자랑을 좋아한다’, ‘젖꼭지’, ‘싫은데 좋기도 하다’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관종이란 것도,

자랑하는 게 좋다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른들에겐 성적 뉘앙스를 연상시키는 신체를 지칭하는 단어도 말이다.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뭘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에세이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장르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이 하는 말도 자신의 프리즘을 통해 왜곡해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 결과들을 글로 풀어 낸 것인데, 이슬아의 말처럼 그녀가 하는 ‘부지런한 사랑’의 실천은 남을 자기의 숙성치 않은 경험과 얇고 넓은 지식으로 해석해 내지 않는 습관, 


다만 ‘관찰’로 그를 있는 그대로 살려 내는 일을 실천하고 있고, 이것을 나는  ‘존중을 머금은 관찰의 글’이라고도 표현 하고도 싶다. 


그녀의 관찰형 글은, 

타인을 섣불리 해석하지 않는 마음이 뒷받침 될 때 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이슬아는, 자신이 가진 하나의 마음을 ‘타인’에게 휘두르거나 휘둘리는 것으로 적어도 쓰지 않는다. 

이건 나에게 정말 큰 울림이다.


나는 내가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각이 합리적이고 비교적 꽤 맞는 것이라 사실은 크게 여겨왔다.

그런데, 이슬아의 글을 쭉 읽으며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남을 바라보는 내 시각은 결국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것인데, 

내 마음은 실은 공기분자보다도 더 빠르게 실체도 인식되지 못할만큼 빠르게 변하며

내 마음은 실은 내 성장과정과 살아온 환경에서 빚어진 생각과 감정들이 형상을 이루고 있는 지극히 특정적인 것이며, 그래서 내 마음은 실은, 내 삶에만 초점되어진 고정관념의 세계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세계가 나와 반응 할 때 발생하는 생각과 감정은, 

외부의 자극이 정말 그러한 사실이라기 보다, 

내 지나온 인생이 마치 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쫙 하고 홑뿌리 듯 

그 자극에 무지개처럼 반응한 결과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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