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일기를 씁니다. - 최재천의 '과학자의 서재'를 읽고
1. 회사에서 일기를 씁니다.
회사에서 일기를 씁니다.
하루 기본 8시간은 꼬박 앉아 있어야 하는 사무실이란 일터에서,
그나마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 있을까, 찾고 찾고 제가 찾은 해법은,
‘직장에서 글을 쓰는 것’ 입니다.
감상을 담은 하루 단상도 좋고,
어떠한 주제를 접하고 쓰는 진지한 고찰도 좋고,
쓰는 행위는 모든 무언가에 대한 깨어있는 생각과 집중을 선행케 합니다.
그래서 저는 회사에서 더욱 치열하게 쓰고,
이 쓰는 행위가 어느 때는 참신한 기획 아이디어로 발전돼 성과를 볼 때도 있습니다.
쓴다는 건, 지식을 접하고 나의 사고를 접하는 일입니다.
회사에서 글을 쓴다는 건, 자칫 분주함이 역설적으로 가져오는 때때로의 번아웃과
그로 인해 일로부터 달아나고픈 충동을 힘있게 잡아주는 동력이 됩니다.
“쓸 힘이 어딨어?” 할 테지만, 정말 한 번 해보세요.
“회사가 널널한 거 아니야?” 할테지만, 널널한 회사에서 살아남는 방법 또한 결국 자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정작 할 일은 뒷전인 거 아닌가?” 도 할 테지만, 할 일을 회피하는 사람은 책 한 장도 읽지 못합니다. 할 일을 미루는 건, 마음이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거든요.
정말, 한 번 직장에서 뭐라도 써 보세요.
업무와 업무 사이, 집중은 두 배가 되고
시간은 일을 대하는 나를 수동적 인간이 아닌,
능동적 창의 노동자로 만드는 오롯한 내 편이 되어 줄 거니까요.
이것이 제가 직장서 일기를 쓰는 이윱니다.
오늘은 최재천으로 독서일기를 떠나보았습니다.
2. 최재천, ‘과학자의 서재’를 읽고 쓰다.
최재천은 과학자이다.
구체적으로는 생태학자, 동물행동학자, 통섭학자다.
사실과 검증만이 있는 과학세계라서 ‘사람 과학자’ 또한 차갑고 냉정 할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라
그는 얘기한다.
최재천에 따르면 과학자는 자연이 주는 사실에 ‘복종’해야 하는데 그 복종은 굴복의 성격은 아니다.
'복종은 창조를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 최재천의 생각이다.
“과학자는 창조하기에 차가울 수가 없습니다. 창조는 그것이 무엇이든,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차가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재천, ‘과학자의 서재’ 중-
최재천은 과학자로서 깨달은 나름의 ‘성공철학’이 있는데,
그건 ‘자기 답게 사는 것.’ 이다.
자기 답게 사는 일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찾아나서야 하고 연습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은 과학자의 모습이지만 최재천의 꿈은 원래 시인과 조각가였다.
듣고 나니, 쉽사리 매칭하기 어려운 사뭇 다른 속성들이다.
최재천은 마음에 꿈을 몰아내지 않은 결과, 시쓰는 과학자가 되었다.
내 진짜 꿈은 무엇이었을까.
과학자의 서재는 말 그대로 ‘과학자 최재천을 만들어 온 것’들에 관한 이야기로 봐야 한다.
그래서 최재천이 지나온 인생의 길과 가치관이 담겨있다.
섬세하면서도 차가운 지성을 가진 최재천을 만든 기록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그 중 한 일화다.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에 최재천은 크게 감동받은 나머지 학업 시절,
자신의 돈으로 80권을 제본하여 주위에 뿌렸다고 한다.
그 때는 곁에 있던 한 조교 선배를 보며 이런 회의감이 들 때였다.
‘이 길을 가자면 나도 선배처럼 쥐 잡아서 의약품 처리하고 난자를 기르는 일을 평생 해야 하나?’ 하는 앞으로의 앞날에 오히려 학문의 매력이 떨어져 나갔다 했다.
그러던 참에 ‘우연과 필연’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을 읽고서야 최재천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생물학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고 이런 철학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
자크모노는 최재천을 이렇게 다시 살린다.
생물학자가 생명에 대해서 연구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사람의 삶에 대한 어떤 철학을
가질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 최재천.
그렇게 최재천은 수 많은 책 속에서 가슴에 묵은 다짐과 각오를 수정해가며 직업인 과학자가 아닌,
‘과학자의 삶’을 설계해 간다.
‘쥐 난자 실험을 해서 언젠가는 노벨상도 받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저런 책을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최재천은 ‘우연과 필연’을 읽음으로써 막연하지만 희망을 품은 씨앗들을 가슴에 뿌려나갔다.
최재천이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도 고민하지 말고 그냥 덤벼들어서 해봐라. 그러면 어느 순간 어떤 언덕을 넘어서는 듯한 느낌이 올 것이다. 좁은 동굴을 빠져나와 탁 트인 아름다운 들판을 내려다보는 그런 느낌. 뜻밖에 마음의 평정이 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나는 그가 한 이 말에 ‘최재천이 전하는 현실을 잘 사는 법’라 이름 붙이고 싶다.
최재천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했을 생각,
최재천 교수의 글은 꾸밈이 없다.
그래서 더 재밌다.
자신이 겪은 인생사를 그대로 풀었는데, 경험을 시간순으로 복기해서 이를 다시 글자로 옮기고 되살리는 작업 자체도 꽤나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최재천은 당시 자신이 얻은 깨우침을 명확히 적어내고 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마땅한 역량이라 보겠지만,
기억의 한계와 쓰면서 왜곡되는 숱한 장벽들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양심을 챙겨야 하고
하고자 하는 말을 잃지 않는 집중력을 분투 해야 하는 참으로 힘든 과정이다.
자신을 푸는 일은 유쾌함 보단 그래서 고행에 가깝다.
이 지난한 여정을 완수한 최재천의 동력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최재천은 세상과 조우하고 지식에 반응하는 자신에 충실했고, 그만큼 진심이었다.’
진심은 애쓰지 않아도 깊이 새겨진 목판처럼 선명히 각인 되는 법이므로.
최재천의 글을 통해 또 하나 발견한 건,
‘그대로 적힌 인생사’는 그것만으로 ‘참재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예쁘고 글맛을 살리기 위한 수식이나, 글의 상황을 이끌기 위해 쓰여지는 도구적 문장들 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삶의 상황’, ‘느낌’을 그대로 적어 보는 일.
그것이 남들이 칭송할 법한 대단한 인생이 아닐지라도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과 앞 뒤에 이어지는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쓰기만 해도, 참 재밌다.
요리로 비유하자면,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은 ‘맛없을 수 없는 원재료’ 다.
원재료가 워낙 좋으니 어떤 그릇에 담아도 다채롭고 맛있다.
다만, 일반인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쏟은 글 쓰는 최재천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 있긴 한데,
사실과 검증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과학자란 본분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글감에 임하는 자세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기억해 주는 일이다.
자신의 자해석은 최후에 한 방울만 개입하는 정도다.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론 과학자가 바라본 있는 그대로 인생을 서술한 시선이 날 자꾸만 실룩거리게 만든다.
눈으로 경험한 ‘관찰’이 한 사람을 통과하게 되면, ‘통섭’이 일어난다.
최재천은 세상에 대한 관찰을 그간 쌓인 지식의 숲에서 한 껏 풀어헤쳐
연결하고 다시 찢어내고 또 다시 연결해 기어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통섭’에 능하다.
과학자의 서재엔 미시건대학 명예교우회 연구원으로 뽑힌 시절, 3년간의 펠로우십 동안
약 200개의 주제를 듣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이야기한 것 같다고 회상하는 대목이 있다.
‘통섭’을 트레이닝한 경험이었다.
그 시절 터득한 ‘통섭’을 이화여대 교수로 와서, ‘통섭원’이란 간판으로 내걸었고,
이것이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 배경이라 설명한다.
그렇게 많은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는 것은 또 그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양질의 통섭은 책이란 원문화에서 가능한 일이다.
“지식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 많은 사람이 되길” 최재천이 통섭을 하는 이유이자, 통섭을 통해 깨달은 삶과 학문에 대한 철학.
회사에서 이렇게 4일만에 최재천 교수가 쓴 ‘과학자의 서재’ 407페이지 분량을 다 읽었다.(전자책 기준)
업무와 업무사이, 번아웃으로 소진되려 할 때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위안이 되었고, 힘을 다시 받는 시간이었다.
직장서 짬짬이 읽어도 나흘이면 완독할 수 있었다.
그만큼 최재천 교수의 책은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그의 책을 읽고 나면, 꼭 한 번은 ‘과학’ 관련 주제를 찾게 된다.
이것만 보아도 책의 역할은 완벽히 해낸 것 아니겠는가.
최재천 교수는 책을 통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끔 나 같은 일반인을 끌어 당기고 있다.
역시나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귀재인 셈이다.
그가 손꼽은 세권의 과학서적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 이중나선, 우연과 필연이다.
격식이나 권위가 없는 과학자 최재천의 글.
힘을 빼서 상냥하고 말랑한 글이고,
그래서 잘 읽힌다.
학식 높은 학자가 힘을 빼고 “이거, 사실은 하나도 어렵지 않아, 자, 봐봐” 이러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느낌이다. 묘하게 나를 염두하고 내 눈높이에 맞춰서 일부러 쓴 글 같다.
그의 문장 중엔 어려운 말이 한 개도 없다.
석영중 교수가 표도르 도예프스키를 설명하며, 전쟁과 평화가 대 서사이고 엄청난 분량이지만, 그의 문장중엔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했던 강의가 떠오른다.
문장을 어렵지 않게 쓰는 건, 여러 터득이 있을건데,
내용이 좋으면 말이나 형식은 중요치 않다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대목 등에서 그가 지식을 대하고 그것을 글자로 풀어내는 데서 갖는 철학과 가치관을 엿볼 뿐이다.
문장을 어렵지 않게 쓰는 건, 단순히 학자가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기능적 글쓰기는 아니라 생각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진 속결이 금방 밑천하게 탈로가 난다.
그러나 최재천 교수의 글은 속결에서도 참 친절한 많이 배운 아저씨 체취가 강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 향내가 짙다.
이건 아무래도 그 사람 자체의 본성, 그 본성을 키운 삶에 대한 그의 태도와 경험,
즉, 최재천 삶이 글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객관적 자료로 얻는 설득력,
어떠한 경험이 재밌을 것이란 판단으로 선별하고 이것을 통하게 하는 공감력,
공감을 이야기로 잇는 구성력, 이런 등등이 있는데, 이것들에 미사어구나 사변은 결코 끼어들어 가 있지 않다.
말 그대로 말끔한 상태로 군더더기 없이 엮어 나가는데,
난 이 비법이 그가 자연을 관찰하는 태도에서 생겨난 마인드에서 나온 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태도와 마인드, 가설이 뒤집힐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과학의 발전으로 삼아야 하는 과학자의 운명. 여기서 다듬어진 삶에 대한 겸손한 자세.
이러한 조합이 최재천이 글을 쓰는 핵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힘뺀 친철한 아저씨지만 그 안을 읽어가면 읽어갈 수록 묵직하고 견고한 뚝심, 그것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신념과 그 어떠한 외부의 시선과 간섭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열망임을.
나는 최재천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고, 깨닫고, 발견한다.
서로 만난 적 없는 그로부터.
더욱이 나의 존재조차 전혀 알지 못할 그로부터.
그렇게 과학자 최재천은 내 삶에 크나큰 하나를 새겨 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