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

by 명랑도리



어디서 공짜표를 얻었는데,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이 괜찮냐고,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물어보았다.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야 한다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깜빡 순서를 놓쳐 버린 것이다. 일단 내가 누구인지부터 (사무적인 말투로) 설명했어야 했는데. 제길.

역시나 그는 물었다.

- 혹시 누구신지...


그의 질문에 급 당황한 나는, 더 이상 어색하기도 힘들 것 같은 말투로 허겁지겁 덧붙였다.

- 아... 저는... 예전에 특강을 같이 들었던 사람입니다. 판소리 특강. 뒤편에 앉았던 국문과.

미리 생각한 시나리오는 이게 아닌데, 순서가 꼬이는 바람에 완전 망했다. 제길제길. 그냥 끊어버릴까?


- 앗. 누군지 알아요... 그럼 어디서 볼까요?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누군가에게 먼저 대시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시. dash. 돌진. 대시는커녕, 모르는 사람에 대한 내 태도는 원래 달팽이와 비슷했다. 느적느적 촉수를 뻗었다가 잽싸게 거두기를 반복하고는, 결국 등껍질에 몸통부터 밀어넣으며 스멀스멀 퇴각해버리는. 이건 본능을 역행하는 초유의 돌발행동이었다.


교실에 그가 나타나면 내 시선이 자동으로 그에게 꽂혔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와 구석자리를 찾는 나와 달리, 그는 앞문으로 나타나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곤 했다. 그에게서는 늘 알 수 없는 날티가 흘렀는데, 태도는 누구에게나 몹시 깍듯했다. 특강은 첫날 앉은자리가 고정석처럼 유지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와 나는 특강이 끝날 때까지 인사조차 나눌 일이 없었다. 그의 자리는 교실 앞문 앞, 내 자리는 거기서 대각선으로 뻗어나간 창가 끄트머리.

하얀 실크 한복을 입은 선생님이 북을 끼고 자리에 앉으면 레슨이 시작되었다. 작고 마른 몸 어디에 그렇게 우렁찬 소리를 숨겼다가 터뜨리는 것인지, 선생이 창을 시작하면 모두가 깜짝 놀라곤 했다.


- 기상영수별건곤 소부허유 놀고, 적벽강추야월에 소자첨도 놀았고, 채석강명월야 이적선이도 놀았고, 등왕각봉황대에 문장명필의 자취라.


가사는 어려웠고 악보도 없었다. 선생의 선창을 잘 듣고 고대로 따라 하는 것이 노래를 익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꺾고, 떨고, 지르고, 흐느끼고. 선생의 몸은 그 자체가 놀라운 악기였다. 그녀는 이것저것 요령을 일러주었지만, 배운다고 흉내 낼 수 있는 종류의 테크닉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는 것뿐. 한참 악을 쓰고 나면 답답한 가슴이 뚫리고 속이 후련했다. 어차피 공기반소리반 필요 없었고, 공명이고 나발이고 몰라도 되었다. 어느 명창의 수제자였다는 선생에게는 미안했지만, 오합지졸 수강생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다들 자기만의 흥에 취해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거짓말처럼 김광석을 만났었다.

- 행복하세요. 김광석.

찰나의 만남은 인상 깊었고, 가수가 남긴 글은 주문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그날 이후 몇 주 동안 내내 김광석을 생각했다. 결국 나는 티켓을 예매했고, 내친 김에 역대급 미친 짓까지 저질러 버렸다. 길에서 김광석과 마주치는 일이나, 모르는 사람에게 같이 공연을 보러가자고 청하는 또라이 짓이나, 모두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었다.

특강은 6개월 전에 끝났고, 종강과 함께 수강생들의 인연도 영원히 종결되었다. 개인정보에 대한 조심성이 취약하던 시절이었다. 결강을 대비해 강사가 만들어 돌린 비상연락망을 나는 그때까지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도 018, 나도 018. 왠지 조짐이 좋다.


특강이 끝나고 난 뒤에도 가끔 그가 떠올랐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말을 걸고 싶은 이유야 뻔했지만, 그걸 용건으로 만드는 요령을 몰랐다. 6개월이나 지난 마당에 나는 말도 안 되게 김광석을 핑계로 그를 호출한 것이다.


전화번호를 누르기 전에 마음의 준비 차원에서 몇 가지 버전의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까일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정해 보는 것이다. 흠,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런 허세가 상처에 연고가 되어줄까 싶었다. 가장 비극적인 동시에 제일 가능성 높은 반응은 그가 나를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누구세요? 시작부터 막혔다. 기억에도 없는 사람한테 콘서트를 같이 보자고 우길 묘안은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나와보시면 얼굴이 생각날지도 모른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럴 때는 (우리 할머니의 통화 매너를 카피하여, 인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리기로 한다. 두고두고 이불킥을 예고하는 결말이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그도 나를 기억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조금 낙관적이기는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뭐? 내가 누군지 떠오른 기념으로 함께 콘서트나 보러 가자고 할까? 과감하게 도약하는 스토리 전개에 그가 느낄 당혹감을 생각하니 다시 생각이 멈췄다. 콘서트라구요? 도.대.체. 내가 왜요? 라고 되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럴 경우에는 (전화번호를 잘 못 누른 모양이라고 말하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기로 한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알게 뭔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결말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처참했기에, 오히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역설적 자신감이 차올랐다. 죽이지는 않겠지. 아니아니, 민망하다고 사람이 설마 죽지는 않겠지. 그 과격한 파이팅이 정교한 사고의 전개를 가로막았다. 호기롭게 전화를 걸었지만, 순서가 꼬이고, 연쇄적으로 말도 꼬이고, 결과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릴 타이밍까지 놓쳤다. 젠장. 하지만 그가 말했다.


- 아, 누군지 알아요. 어디서 볼까요?


혜화역 출구에서 그를 기다린다. 멀리서 그가 걸어온다. KBS 드라마스페셜의 한 장면 같았다. 뇌에서 현실감을 상실케 하는 환각물질이 과다하게 분비된다. 내 의식이 관객처럼 그와 나를 관찰한다. 인물 A와 인물 B가 어색하게 아는 척을 한다. 인물 A가 인물 B에게 표를 내민다. 어쩔 수 없지 않냐는 표정이다.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김광석의 마지막 티켓이라도 되는 양.

객석은 놀랄 만큼 단출했다. 팔을 뻗으면 가수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관객은 몇 명 없었지만, 빈 좌석도 없었다. 마침내 온 얼굴 가득 미소를 담은 김광석이 나타났다. 낙엽처럼 물기 없는 표정으로 공원을 걷던 그날의 그와는 달랐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관객들과 눈맞춤을 했다. 그가 내 쪽을 바라볼 때마다 내 표정은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혹시 나, 나, 기억 안 나요? 하지만 그의 눈길은 그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느리고 기계적으로 관객의 얼굴을 차례차례 스쳐갈 뿐이었다. 조악한 카세트테이프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가 눈앞에서 울려 퍼지자 또다시 현실감 상실 호르몬이 뿜어 나온다.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드문드문 생각만 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나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러보았다.


그의 몸도 거대한 악기였다. 밝은 노래를 불러도, 이상하게 슬픔이 묻어났다. 그는 서너 개의 노래를 연달아 부르고, 어눌한 말투로 웃긴 얘기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부르고, 뻔한 거짓말 같은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다시 노래를 부르고, 하모니카를 불고, 언제 웃음을 터뜨려야 좋을지 모를 농담을 하고, 다시 노래를 했다. 앵콜이 터지고 그가 노래를 하고, 앵콜이 터지고, 그가 노래를 하고, 다시 앵콜이 터졌지만 콘서트는 끝이 났다. 나는 그제야 옆자리에 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니,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었다. 그와 나는 성대 쪽으로 올라가 허름한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소시지를 잔뜩 시켜놓고 그는 소주를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주종이 다르니 술잔도 달라, 잔을 비우는 리듬도 달랐다. 각자 자기 잔에 스스로 술을 따라 알아서 마셨다. 내가 커다란 맥주를 세 병 마시는 동안, 그 역시 공평하게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공통의 화제는 판소리와 김광석. 판소리 수업과 어울리는 비주얼은 아니라고, 나는 편견의 요정 같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는 연극배우 지망생인데, 몸에서 큰 소리를 끄집어내는 것을 훈련하고 싶어서 특강을 신청했다고 했다. 아하... 어쩐지. 내가 느꼈던 자유로움의 정체가 그거였구나. 발산을 꿈꾸는 자. 내향적인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직업.

이미 그 자체로 호감을 노출한 것이나 진배없는 나의 돌발적 행동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웬일인지 그도 묻지 않았다. 콘서트에 대한 감상에서 시작된 수다는 빈 술병이 늘어남에 따라 취객의 걸음걸이처럼 일관성을 포기한 채 널뛰었다. 최근 기뻤던 일, 골때리는 주변 사람, 좋아하는 술집,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 가보고 싶은 곳, 대학로의 추억... 대화 가운데 언뜻 그도 나를 생각한 적 있었다고 말한 것 같았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조만간 김광석 콘서트를 한번 더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자기가 쏘겠다면서. 나는 환호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또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고마울 데가! 우리는 다시 만날 명분이 필요한 사이였다.


1996년.

그해 나의 설레는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광석은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곳으로 떠나버렸다. 그와 나는 갈 수 없었던 콘서트를 핑계로 수백 잔의 술을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김광석에 대하여, 김광석의 노래에 대하여, 그리고 그와 우리의 이 불가해한 만남과 이별에 대하여.




어느 가을, 대학로에서 그와 마주쳤다. 뮤지컬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그가 눈앞에 있었다. 한 소극장 입구에 붙은 연극 포스터. 입간판. 오늘의 캐스트.

아는 얼굴, 아는 이름.

마침내 그 길을 가고 있었구나.


김광석이 오래도록 노래를 했던 극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 표지 이미지 : youtube.com/watch?v=x45vXLPV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