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에 세심한 요즘 부모들의 기준에서 보면 까무러칠 정도로, 1970년대의 우리는 험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어른들은 애들의 일상에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애정이 부족해서라기보다,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들은 자기 몫의 하루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다. 빨래, 청소, 장보기, 연탄 갈기 등 지금은 기계의 힘으로 해결할 빡쎈 일들이 온전히 살림을 꾸려가는 주부들의 몫이었다. 그녀들은 새벽부터 홀로 일어나 집안일을 시작했고, 오로지 자신의 근력만으로 수만 가지 가사를 해치웠다. 혹여 잠깐의 짬이라도 나면, 개당 5원 정도 받을 수 있는 온갖 가내 부업으로 사계절 손끝이 성할 날이 없었다. 자식의 양육에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은 삼시세끼 밥을 걷어 먹이는 정도가 최대치였다.
그 덕에 우리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노는 일에 열중할 수 있었다.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 같은 건 필요 없다. 동네 공터로 나오면 같이 놀 애들은 상시 넘쳐났다. 공터는 거대한 밀림이었고, 우리는 온몸이 근질거리는 한 마리 들짐승이었다. 혈관을 흐르는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가 고갈될 때까지 모두 최선을 다해 날뛰었다.
사방치기, 망까기, 땅따먹기, 비석치기는 신석기 인류의 후예답게 돌로 싸우는 전쟁이었고, 오징어가이생, 꼬리잡기, 다방구, 술래잡기는, 도망치는 자와 잡는 자 사이의 숨 막히는 추격전이었다. 우리는 뭐 하나 붙잡은 것 없이 정글짐을 뛰어다녔고, 제 키보다 높은 축대에서 허구한 날 멀리뛰기 배틀을 벌였다. 어느 집 대추나무 가지가 골목으로 뻗으면, 남의 담벼락에 기어올라 아슬아슬하게 까치발을 들고 늘어진 가지를 흔들기도 했다.
그러니 매일 다쳤다. 무릎에 두꺼운 피딱지 정도는 모두 다 기본값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자잘한 흉터는 쉴 새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타박상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었다. 옷 속을 들춰보면 누구나 한 구석에 푸르뎅뎅한 멍이 숨어 있었다. 가끔 팔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나타나는 아이도 있었는데, 그 정도나 되어야 좀 놀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디를 다치든 처방은 한 가지다. 포비돈 요오드액. 이름하여 ‘빨간약’.
무릎이 까져도, 손가락을 베어도, 뭐에 찔려도 빨간약 하나면 치료 끝.
심지어 타박상이나 근육통에도 빨간약이 직빵이었다. 정식 명칭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집집마다 빨간약이 없는 집은 없었다.
가끔 그 시절을 생각하면 파상풍 같은 병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아 어른이 된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골목에는 항상 쓰레기가 굴러다녔고, 우리는 그 쓰레기를 뒤지며 갖고 놀 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녹슨 못, 병뚜껑, 통조림 깡통, 벽돌조각 같은 것을 장난감 대신 주무르며 자랐는데도, 빨간약 하나로 별 탈 없이 생존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충격적이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삼신할매가 에미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준다는 전설이 사실인 듯싶기도 하다. 무릎에서 허연 피부가 벗겨져 나가고, 곧 방울방울 피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심장이 쪼그라들며 눈물이 삐질삐질 솟아났지만, 빨간약을 바르고 호호 입김을 불면 따끔따끔한 자극과 함께 공포심도, 쓰라림도 이내 날아가버렸다.
외상에 빨간약이 있다면, 내복약의 지존은 원기소였다. 대중적인 빨간약과 달리 원기소는 부잣집 아이들이나 누릴 수 있는 차별적 아이템이다. 당시 원기소는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어린이 영양제였고, 원기소를 먹어야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거짓 신화가 우리를 지배했었다. 얼마나 원기소가 먹고 싶던지, 매일 엄마를 졸랐던 것 같다. 마침내 엄마가 없는 살림에 원기소 한 통을 사 온 뒤로, 그 작은 베이지색 알약은 빨간약에 필적할만한 만병통치약으로 등극한다. 배가 아파도, 기운이 없어도, 감기에 걸려도, 열이 나도, 일단 원기소 몇 알을 씹어 먹고 나서야, 다음을 도모했다. 원기소의 구수한 보리 맛이 혀끝에 퍼지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없던 기운도 솟아났다.
출처 - dadoc.or.kr/1798
내 어린 아들의 명약은 대일밴드다. 두세 살 때였나, 까진 손가락에 밴드를 몇 번 붙여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 그는 밴드 신봉자로 거듭났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뭐가 불편하다 싶으면 쪼르르 달려가 밴드부터 꺼냈다. 거실 서랍장에는 80개 들이 덕용 포장된 밴드 상자가 늘 상비되었다. 한 번은 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중얼거렸더니, 어디선가 짱가처럼 달려와 내 이마에 밴드를 붙이고 사라졌다. 배가 아프면 윗도리를 까고 배에 붙였고, 종일 뛰어놀아 다리가 팍팍하면 종아리에도 붙였다. 밴드를 붙이면 당연한 말이지만, 아들의 고통은 씻은 듯 사라졌다.
엄마는 매실청이다. 오래도록 장사를 하며 살아온 인생이 엄마에게 남긴 훈장은 위염이다.
정해진 시간에, 밥과 국이 차려진 한 끼 식사를 천천히 씹어 삼키는, 그 평범한 일이 불가했던 삶.
나이가 들면서, 엄마의 위장은 존중받지 못한 세월에 대하여 보상을 요구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명치가 막혔고, 스트레스라도 받으면 위경련으로 응급실 신세를 져야 했다. 엄마는 함부로 취급했던 위장을 매실청으로 다독였다.
파랗고 딱딱한 매실이 시장에 나오는 계절이면, 엄마는 매실청을 담갔다. 커다란 유리병에 매실을 넣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백설탕을 과감하게 들이붓는다. 흰 설탕이 건강을 망치는 역적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에, 둥근 매실 사이로 켜켜이 들어차는 흰색 가루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마음이 불안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루는 서서히 액체가 되고, 반짝이던 흰색은 매실의 푸른색과 섞여 찐덕한 갈색으로 흘러내렸다. 엄마의 냉장고 한 켠을 차지한 그것은 농도를 달리하며 시럽도 되고, 음료도 되고, 비상약도 되었다. 병리적, 약리적 효능이 실재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속이 더부룩한 날마다 따뜻한 매실차 한 잔을 마시고는 한결 편한 얼굴이 되곤 했다.
갓 결혼을 하고 나서... 나의 가족은 잘 쓰지 않던 어떤 표현들이 그의 집에서는 수시로 빈용되는 일상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기했던 적이 있다. '휘뚜루마뚜루'가 그런 단어였다. 어머니는 당근, 양파, 버섯, 마늘 같은 것을 함께 다진 후, 깍두기 모양으로 소분하여 냉동실에 보관하셨다. 내게도 한 봉지 주시며 사용법을 당부하신다. 한 도막씩 꺼내 해동한 후, 된장찌개, 볶음밥, 어묵조림 같은 것에 넣어 ‘휘뚜루마뚜루’ 쓰면 된다고.
이렇게 너그럽고 공리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내 어린 날의 빨간약, 원기소, 아들의 대일밴드. 엄마의 매실청 같은 존재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똑부러지게 제 용도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언제든 사용자의 사정을 맞춰가며 바로 그것이 되어줄 수 있는 언어계의 와일드 카드. 늘 있던 자리 한구석에 수더분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나서야 할 때가 되면 끄응, 하고 나타나 ‘오다가 주웠다’ 스타일의 위로를 던지고 사라지는.
거시기가 거시기한 것.
갸가 갸인 것.
포르투갈의 유명 관광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 끄트머리 Cabo da Roca. 화강암 절벽 아래에는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그곳에서 대서양이 시작된다. 유럽의 땅끝마을에선 미친 듯이 바람이 불었다. 기념사진을 찍으려 앞머리를 정돈했지만, 열 번 다 실패했다. 몸이 휘청일 정도로 센 바람이 불었고, 우리는 결국 광년이처럼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될 대로 되라는 표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지경. 여기가 끝이라고, 끝은 원래 이런 거라고, 바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절벽을 생각하면 가끔 퇴근 무렵의 그 거리가 떠오른다.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홑껍데기 같은 사람들을 빨아들이던 pm.7시의 7호선 5번 출구.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을 정돈하고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로 걸어가던 500미터 가량의 도로. 하늘에선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졌고 머릿속에는 광풍이 불었다. 끝까지 간 기분.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거짓이었다. 바람 앞에서 단정하려는 욕망을 접은 그날처럼, 의연하게 체면을 지키겠다는 야욕은 결국 실패했다. 슬픔이든, 공포든, 분노든 어두운 감정이 끄트머리까지 몰리면 종내 위장은 불가하다.
주로 먼지 같은 일 때문이었다. 힘을 가진 자의 모함, 믿었던 자의 비열, 헌신으로 포장했던 이기심 그딴 것들. 중대한 실패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은 아니지만, 고통의 근원이 타인이기에 세상은 지옥이었고 구원은 요원했다. 드라마가 아니라서 통쾌한 복수도, 최후의 반전도, 의외의 해결사도 없다. 뒤따르는 것은 지리멸렬한 뒷담화나,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알코올 중독뿐.
자가 면역이 떨어지면 허접한 세균에도 목숨줄이 간당거리듯, 시간과 자유를 저당 잡힌 월급쟁이의 삶은 퇴근길의 빗줄기에도 영혼의 저항력을 상실할 수 있다. 그런 날은 <나의 아저씨> 이지은이 그랬듯, 가방에서 줄 꼬인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는다.
노래가 흐른다. 이어폰 줄을 타고 그가 온다. 그의 음성은 구정물 같은 일상에서 5미터 정도 허공에 떠 있다. 어이없을 정도로 맑고 덤덤하다. 불덩이를 삼킨 듯 타들어가던 속에 샘같은 그 소리들이 차오른다. 그 노래들은 조금씩 빨간약이 되고, 원기소가 되고, 대일밴드가 되고, 매실청이 된다. 거짓말처럼 슬며시 괜찮아진다. 절망이 서서히 뒷걸음친다.
김광석은 휘뚜루마뚜루 유용하다.
광풍은 멎고, 그 짬에 나는 옷깃을 정돈하며, 카메라 앞에서 김치~라고 소리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오늘도 최악은 아니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하루가 아닌가.
김광석은 정말 휘뚜루마뚜루 유용하다.
* 표지, 포르투갈 'Cabo da Ro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