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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리비 Sep 16. 2023

나를 최소화하는 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니다

최근 해외 사이트에서 후천적 안정 애착 (Earned Secure Attachment), 즉 나의 노력으로 스스로 쟁취(?)한 안정 애착에 관한 글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애착 유형은 어린 시절 가정 환경이 100% 완벽한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닌, 누구나 노력으로 일구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담은 표현이라 흥미로웠습니다. 실제로 안정 애착 유형을 가진 연애 상대나 배우자를 만나면 불안 애착 유형인 사람도 서서히 애착 유형이 바뀌어간다지만, 이건 마치 안정 애착 금수저를 물려 받지 못한 사람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것만큼이나 막연한 처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하면 애착 유형을 안정형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요.


불안정 애착 유형이 안정 애착 유형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는, 감정적으로 불편하거나 힘들때 주변 사람들에게서 건강한 방법으로 위로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2차 전략을 통해 스스로 감정을 달래려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공감을 받지 못했거나 학대를 당한 사람이라면 힘들 때 누군가에게 위로를 바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이미 학습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불안정 애착 유형이 안정 애착으로 가려면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힘들고 취약한 순간에 누군가에게서 위로를 구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상당히 높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무리지어 생활하도록 진화해온 인간 종족에게는 생명과도 직결될 만큼 타인과의 유대감이 중요합니다. 관계 속에서 안정을 경험하지 못한 불안정 애착 유형은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맨몸으로 들어가지 말고, 몇 가지 잘 챙겨서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관계 속에서 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조금씩 더 오래 관계 속에서 머물 수 있게 되고, 그런 내공이 쌓이기 시작하다 보면 점차 안정 애착 유형의 특성들을 갖추어나가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관계 속에서 나를 지켜내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은 경계 (boundary)를 확실히 긋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정 애착 유형의 사람들은 타인과의 경계를 확실히 긋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회피형이라면, 큰일도 아닌데, 내가 조금만 참고 넘어가면 될 일이니까, 경계를 흐릿하게 둔 채 어물쩍 넘어갑니다. 불안형이라면, 분명 상대방은 나에 대한 노력을 안 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지만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하는 나 자신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나의 욕구, 나의 취향, 나의 성향은 상대방의 그것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의 자아는 조용히 학습합니다. 그리고 관계 속에 머물려면 나의 상당 부분을 희생해야만 가능하다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관계를 맺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경계를 긋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사소한 일일수록 더욱더요. 사소한 일에 대한 경계를 잘 긋다 보면 큰일에서 경계를 그을 일이 잘 오지도 않습니다. 타인과의 경계를 잘 긋는 행위를 통해, 나의 자아는 나 자신을 지켜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학습하며 스스로 안전하다며 안심할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처음 집에 데려온 강아지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다가 점점 경계를 푸는 것처럼요, 우리도 우리 자아의 경계를 스스로 풀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나의 경계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요. 지금까지는 별말 없이 쿨하게 넘어가거나, 나에게 다 맞춰주던 사람이 갑자기 요구를 거절하거나 자기 주장을 한다면 상대방도 분명 당황스러울 것이고, 심하게 반발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럴 경우에는 "상담사가 그러라고 했고,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보다는, 나의 상태와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나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은 받아들이면 됩니다. 나를 존중하는 만큼 타인의 의사도 존중해야 하므로, 나의 새로운 요구 사항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것은 나의 통제 범위 밖이며, 무엇보다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요.


살다 보니 멋진 커리어를 쌓거나 전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하거나 나의 사업을 일구어 이름을 크게 남기는 일보다 더 어렵고도 멋진 일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경계를 긋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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