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제대로 사랑해보기 위한 생체 실험의 시작
나이 마흔에 15년간의 회사 생활을 접고 심리 상담사가 되기 위해 남편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하였습니다. 친구들은 전부 각자 분야에서 자리 잡고 승진 소식을 전해오는데, 저는 후드티와 레인부츠 차림으로 우중충, 비내리는 밴쿠버 다운타운의 캠퍼스를 오가며 심리 상담 석사 공부를 했습니다. 이제는 공부를 마치고 이곳 밴쿠버에서 심리 상담사로 일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2년반이 되어갑니다. 지금은 개인 상담과 부부 상담을 병행하며, 우울증, 불안증, 자존감, 관계 맺기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일반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마주앉아, 우리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혹은 조금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에 대해 매일, 다양한 관점에서 고민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네프 박사의 '자기 연민 (Self-compassion)'의 개념을 상담에 적용하면서 상당한 효과를 보았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층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깨달음을 기반으로 내담자들의 케이스 뿐만 아니라, 밴쿠버에서 새로운 삶을 구축하는 중인 저와 남편의 경우에까지 그 원칙을 적용하며 생체 실험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잘할 때만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안 좋을 때도, 내가 유난히 못나 보일 때도 나의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죠. 심리 상담을 하면서 크게 두 가지를 추구합니다. 첫째는 지금의 문제를 만들어내고 유지해온 나의 사고나 감정, 행동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둘째는 그 알아차림을 기반으로 서서히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모두, 나는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없을 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패턴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알고 보면 불안정한 자아를 어떻게든 지탱해주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나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방식에 지속될 변화를 주려면, 진짜 나를 알고 수용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패턴들을 제거했을 때도 자아는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5년전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 일단 '살아남고 보자'는 마인드가 강했기에, 내 마음이 작게 칭얼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아픔은 주변에 대한 불만으로 주로 나타났던 것 같구요. 부부 상담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에게는 박하게 대하면서, 배우자만큼은 알아서 잘 대접해주기를 바라는 내담자들을 만납니다. 내가 나를 아껴주고 알아가는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배우자가 그 방법을 스스로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합니다. 반면, 나를 철저하게 아끼고 스스로 내면을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막연한 압박감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더욱 매섭게 몰아가며 동기 부여하는 내담자들을 만납니다. 저는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 자신한테 조금만 착하게 대하자고 농담처럼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런 분들에게 제 말이 와 닿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돈을 환산할만한 가치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이미 깊이 박혀 있으니까요. 우리는 자신을 마치 공장 기계를 대하듯, 쉬지 않고 작동시켜 가치를 생산해내려고 합니다. 저 또한 커리어 전환을 위해 회사를 다니면서 온라인으로 심리학 학사 수업을 들으면서 주식 투자까지 공부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루를 15분 단위로 쪼개어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조차도 한 가지라도 더 해내려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기계와는 달라서, 계속 돌리기만 하면 기계보다 훨씬 빨리 고장나기도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존중하는 인간적인 마음을 기본으로 깔고 나면, 그 어떤 기계보다도 정교하고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요.
나의 가치가 외부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무섭게 각인시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나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오히려 나라도 나 자신을 치열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단기적으로 아무리 주변에서 인정 받더라도, 아무리 승진도 잘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아껴주는 자세에서 나오는 심리적 안정감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반복해서 등을 돌리면서 생기는 공허감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거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거냐고 되묻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심리 상담 석사 공부를 하면서, 상담사로 수십년간 활동하신 교수님께서, "나는 내담자들한테 기술을 권하기 전에, 나를 가지고 반드시 우선 생체 실험을 한다"던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 또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이전에 내가 스스로 뭐든 좀 해봐야겠단 생각에 이르렀고, 올해는 나를 사랑하기 위한 생체 실험을 진행해보려 합니다.
참고.
Neff, K., & Germer, C. (2018). The mindful self-compassion workbook: A proven way to accept yourself, build inner strength, and thrive. Guildford Publ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