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리비 May 03. 2024

관계 속에서 나를 자꾸 잃는다면

부부 상담을 하던 중 남편인 폴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결혼은 지금까지 완벽했거든요. 다른 부부들처럼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도 없었고,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왔어요." 그런데 아내인 산드라는 저와 따로 만나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이한테 우리 결혼은 완벽했겠죠. 제가 모든 것을 그이에게 맞춰줬거든요. 그런데 그이는 한번도 제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관심을 기울여 본적이 없어요. 제가 참다 못해 말을 꺼내면 요구대로 마지못해 해주긴 하는데, 그정도 가지고 그이가 저를 아낀다는 느낌은 안 들잖아요. 저를 진정으로 아낀다면, 제가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관심을 기울였겠죠? 우리가 안 싸우는 이유는 제가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에요. 이제 아이들도 다 컸고, 그만 이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에요."


이렇게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다정한 듯한 결혼 생활도 막상 들여다 보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자기 버림 (self-abandonment) 으로 지탱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갈등 회피 성향이 강한 파트너쪽에서 주로 자신의 욕구를 조금씩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부부의 연결감 손상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작은 것을 양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자꾸만 양보하는 파트너는 조금씩 자신의 욕구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하며, 주로 양보 받는 파트너는 자기 마음대로 모든 일이 돌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양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더라도, 평소 티격태격을 자주 하는 부부들과는 달리, 갈등 회피 성향이 있었던 파트너쪽에서는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너무 어마어마하게 느껴져 결국 또 피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점차 상처가 쌓이다가, 결국 마음을 닫아 버리게 됩니다. 계속 연결감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 아픈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직업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엄마와 아빠 밑에서 자란 산드라는 엄마 아빠의 잦은 출장으로 어렸을 때에는 베이비시터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조금 자란 후에는 집에서 어린 남동생과 둘이서만 보낸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바쁘고 스트레스가 많은 엄마와 아빠의 화를 돋구지 않으려면, 자신의 욕구를 억눌러야 한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학습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남동생을 잘 챙겼을 때에만 엄마 아빠의 관심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웠습니다. 산드라는 특히 폭발적으로 화를 내던 엄마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남동생이 울거나 칭얼대면 불 같이 화를 내던 엄마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도 가슴이 철렁한다구요.


아직 독립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에게 주양육자가 불 같이 화를 낸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는 생존을 위협받는 것과 같은 공포를 일으킵니다. 어린 아이들은 주양육자가 자신을 사랑해줘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그 사랑을 받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필사적으로 파악해 나갑니다. 불 같이 화를 내던 엄마의 모습을 피해야만 했던 산드라는 청소년이 되어서도 한번도 친구들과 싸운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를 서운하게 한 친구가 있으면 어느날 갑자기 연을 끊는 식으로 관계를 차단하는 편이었고, 한번도 어떤 면이 서운했는지 시원하게 싸우고 화해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갈등 회피 성향이 강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그냥 혼자일 때가 가장 좋다는 겁니다. 혼자일 때에는 온전히 자기 욕구대로 행동할 수 있고, 갈등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고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볼 수 있으니까요. 산드라도 그런 마음이라고 합니다. 딱히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이제는 그만 혼자이고 싶답니다. 산드라에게는 이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10여년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자신을 완전히 잃었으니까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연습해야 하는 것이 갈등을 잘 하는 법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애착이 안정적으로 형성된 사람에게는 사실 별일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네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내 감정과 네 감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솔직하게 내놓고 뚝딱뚝딱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할만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갈등 속에서만 진짜 연결감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자기 욕구를 철저히 억누른 채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상황은 마치 상대방에게 사기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닌 가짜 모습을 보이면서 형성된 관계 또한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산드라처럼 엄마가 화내는 것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라고 학습한 사람에게는 갈등의 기미가 보이기만 해도 뇌에서 공포 반응부터 일으킵니다. 상대방의 굳어지는 얼굴, 약간 일그러진 표정만 봐도 감정의 중추인 편도체는 과도한 스트레스 반응을 일이키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우리는 어린 시절 학습했던 것처럼 얼른 자기 자신을 단속하고 숨깁니다. 산드라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자기 뇌에서 일으키는 공포가 지금 상황에는 맞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계속해서 상기 시키는 일입니다. 집에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있는 것 뿐이라고요.


그리고 의외의 처방일 수도 있지만, 산드라는 타인과 진정으로 함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쉴새 없이 울려대는 화재 경보기를 회피하는 데에만 온통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산드라는 생각보다 폴과 함께한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폴을 편안하게 해주기는 했어도, 폴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진심으로 그곳에 산드라는 없었던 거거든요. 지금 이 순간, 나와 네가, 설정이 잘못된 화재경보기가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마주보거나 나란히 걷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새롭게 학습해야 할 때가 온 겁니다. 내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나와 네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 속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과 똑같은 강도로 남과 있을 때 나 자신에게 집중해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주변과의 갈등을 일으킵니다. 남에게 자신을 맞추려던 노력을 그만두고 남을 자신에게 맞추려는 쪽으로 잘못된 노력을 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는 당연히 반발이 심할테구요. 평소 남에게 맞춰주려던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면 노력하는 것 자체를 조금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나도, 너도, 지금 이 순간 서로 충분하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면, 인위적인 노력의 필요성은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을 믿으면서요.



연습 1. 상대방에게 평소 맞춰주던 습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했던 작은 일을 하나 알아차리고 기억해두기.


연습 2. 상대방과 나 모두 기분이 좋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 그 일을 차분하게 꺼내 말해보기. 그리고 다음에는 조금 다른 방식을 해보자고 제안해보기.



참고.

Priebe, H. (2024, February 29). How to help people adjust to you changing (for the better) [Video].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xT3AncZyiuc















매거진의 이전글 호랑이로부터 나를 지키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