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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명의 작가 Oct 27. 2017

직업 없음을 견디는 21세기의 우리

하나. 잘 디뎌 서보기로 하다.

견딘다는 단어의 말뜻은 '사람이나 생물이 일정한 기간 동안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거나 죽지 않고 계속해서 버티며 살아 나가는 상태가 되다.'라고 한다. 견디는 일의 시간적 조건은 '일정한 기간'이고, 견디고 있는 자들은 곧잘 견디는 시간의 끝을 상상해보려 한다. 하지만 그 끝이 쉽사리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금의 '견딤'은 이 세상에 없는 종류의 단어가 되고 만다.





한 달 전 졸업유예 가능 기간 2년을 꽉 채우고 등 떠밀려 학교 밖으로 내쳐진 나는 스물여섯, 오랜 무직 상태의 잉여인력이자 취준생이라는 대외적 정체를 갖고 있는 한 인간이다. 따져볼 수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나는 이 직업 없음의 정체를 '견디고' 있다. 견디긴 견디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 시간을 끝내 완성해낼 수 있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고, 지금 시기의 목적이 오롯이 취업인 것 같지는 않은 애매한 정체를 가진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중이다. 살긴 살지만 살아가는 시간을 매시간 후회하고 있는 이 가여운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요즘의 매일은 '정말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은데...'로 채워지는 시간뿐이다. 지금의 상태는 그야말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 낯부끄러워서 어떤 마음인지 설명할 수도 없고 들어줄 사람도 없는 상태. 일은 너무 하고 싶고 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내고 싶지만 취직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리듬의 나날. 일상에 보조 조명 같은 걸 더해서 (이를테면 여행이나 소비 같은 것)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해도 끝끝내 경직된 무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마주하는 시간들의 연속이랄까.



Frances Ha, 2012



나는 그렇게 열심히 구직활동에 임해본 적이 없는, 조금 특이한 인간이다. 친구들이 열과 성을 다해 구직 메커니즘을 따르고 있던 작년 겨울에도, 이번 여름에도 내가 구직을 위해 한 일이라곤 태어나서 처음 토익학원에 다닌 것(다니는 동안 숙제를 해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 중요할 것이다), 토익 시험을 한 번 이상 쳐 본 것(단 두 번..), 구직을 위한 잡 컨설팅에 참여했던 것(MBTI 검사 이후로 나아가질 않아서 포기함), 잡 컨설팅을 해주던 학교 연계 기관에 잠시 '인턴'이라는 이름의 알바를 했던 것(일을 안 시켜서 잡코리아만 들여다보던 주 3회 5시간 앉아있기의 기억), 그리고 몇 번의 자소서 작성(대부분은 친구들이 페이스북 게시물에 태그 해서 알게 된 구직정보에), 그리고 반복되는 탈락과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진행된 두 번의 면접.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사실, 그래서 나는 좀 더 반성해야 하는 구직자임이 틀림없다. 지금 이렇게 일 자체가 하고 싶은 걸 보면 취업에 대한 꿈과 나름의 로망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열심히 할 마음이 없을까, 심신 그리고 통장잔고가 태어나 가장 빈곤한 2017년 내내의 나 자신아.


한국사회에서 구직활동이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모양새를 띄고 있다. 원하는 회사를 확정해서 그 프로세스에 맞춰 무언갈 열심히 준비해나가거나, 원하는 회사에 채용되지 않았을 때/않을 걸 대비하여 다른 회사들의 채용과정에 열렬히 참여하는 것까지의 과정. 누구는 100개가 넘는 회사에 지원을 했다더라, 100개를 써서 내도 서류합격이 되는 건 2-3개도 안 된다, 이런 얘기들은 예전부터 흔하게 들을 수 있었던 말들이다. 비록 나는 어떻게 100개가 넘는 회사에 지원을 할 수 있는지, 마음에 드는 회사가 100개나 되는지 늘 반문을 달지만 사실 그런 것들이야 막바지 취준생으로 여겨지는 지금의 우리에게는 속 좋은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일찍부터 '마음에 드는 회사'를 찾는 내가 바보 같은 걸까? 하지만 자소서를 쓰며 열정과 에너지를 모두 바치기를 강요당하는 작금의 고용형태에서 마음에도 별로 안 들고 잘 모르는 회사까지 꾸역꾸역, 어떻게 지원서를 쓸 수가 있다는 말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원동기' 항목에는 이 회사를 어떻게 알게 되었고, 뭐가 좋았는지, 뭐가 나랑 잘 맞는지 유심히 찾아내서 써내야 하고 이 회사에 내가 왜 필요한지 끊임없이 자랑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걸 100번이나, 대상을 바꿔가며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면 그걸 해내는 주변의 친구들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또 쏟았던 것인가.


많은 자소서를 써내는 것과는 무관하게, 채용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피로가 되어 다가온다. 따져보면 10번 정도의 자소서를 작성해냈던 나도 이미 탈진의 상태가 되었고 그리하여 지금은 이렇게 두려움의 바다를 정처 없이 떠다니기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어딜 가면 몸을 의지할 뗏목을 구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나의 수명을 조금은 늘려줄까? 끝내 나를 무인도가 아닌 섬으로 데려 가줄 수 있는 걸까. 결국 그것은 내가 찾아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직업 없음의 두려움, 어려움, 괴로움을 견디는 방법을 찾고 그것을 잘해나가는 '시기'를 보내는 법. 그저 이 시간이 한 줄의 글도 될 수 없는 허망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처음의 이야기, 나를 고백하는 일을 시작해본다.



며칠 전 오후, 나와 같은 상황 그리고 비슷한 감정상태를 공유하고 있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결국 이 시기의 자기 고백이라는 것은 한숨으로 마무리 지어질 뿐이구나, 하고 씁쓸해하다가 '뭔가 조금 더 생산적인 시간을 보낼 수는 없을까'를 같이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결론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이 글이다. 나와 친구는 우리와 같은 상태의 사람이 분명히 우리뿐만은 아닐 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었고, 지금을 잘 기록해서 우리와 같은 정체를 수면 위로 올려놓는 것, 공유하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 세상 속에서 '없는 단어'가 아니라 '설명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것을 작은 목표이자 큰 바람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나 기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고,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취직'을 꼽을 수밖엔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현재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땅을 디뎌 서야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구직에 열심히 임하겠다는 열렬한 다짐도, 무언갈 해내고 말겠다는 이글거리는 마음도 아닌 그저 지금의 나로 살아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잘 지켜지지 않는 일상의 약속에 집중하며 현재의 나를 잘 사는 시간을 만들 수 있기를. 살아내지 않고 사라지지 않기를!


2017년 9월 27일의 김연수 남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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