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이오프
2022년 10월 31일 핼러윈 늦은 오후.
한참 아이들은 코스튬을 입고 사탕 바구니를 가지고 외출 준비에 분주하였다.
매년 Trick or Treat을 하러 동네에서 가장 큰 핼러윈 거리, 인디아놀라 (Indianola) 길로 나간다.
그곳은 타운에서 지정된 핼러윈 거리로 집집마다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핼러윈 데코레이션을 하고 있다.
각 집 앞마당에는 거대한 거미가 벽을 기어오르고 있거나, 큰 해골들이 여기저기 있으며, 희뿌연 연기를 내며 파랑 빨강 조명이 핼러윈 분장을 한 아이들의 발을 잡는다.
동네 사람들은 핼러윈 치장을 한채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집주인들은 거리로 나와 아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릿 건네주었다. 인디아놀라 거리로 나가면 학교 친구, 동네 친구들을 마주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누가 사탕을 많이 받았는지 견주어 보기도 한다.
그날은 그곳에 가서 사탕을 받고 친구의 집으로 가서 간단한 핼러윈 파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외출하는 동안 우리 집을 찾아와서 trick or treat을 할 꼬마들을 위해 사탕 바구니를 준비하여 문 앞에 두고, 딸들의 핼러윈 코스튬을 체크하고 있을 때 남편이 귀가하였다.
평소에 포커페이스 같이 무표정인 남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약간의 황당함과 분노도 눈빛에 보였다.
불안했다.
그날 남편 회사 사장이 근처에 찾아와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권했던 터였다.
불안한 마음에 나는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남편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옷방으로 가서 급히 옷을 갈아입고,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를 이끌고 차로 나갔다.
핼러윈 거리에서 여러 반가운 얼굴을 만나 인사하고, 친구들과 사진도 찍고,
아이들은 친구들과 손잡고 집집마다 들러서 'trick or treat' (과자를 안 주면 장난칠 거예요) 인사를 하고 사탕을 가득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약속된 친구집에 들러 간단한 핼러윈 파티를 하였다.
거기서 남편이 와인을 많이 들이켰다.
흥이 오른 그 집주인은 위스키까지 꺼내와 아빠들은 얼큰하게 취기가 가득 올라온 듯하였다.
아이들을 위한 가족 파티였는데, 유독 남편은 크게 웃고, 농담을 하는 등 목소리도 커져갔다.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지만, 애써 모른 척 함께 웃어주었다.
그 날밤 남편은 많이 취한 채로 내가 운전해서 집으로 와야만 했다.
3년 전 남편은 14년 동안 잘 다니던 금융 회사 A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동안 회사 파트너 중 한 명이 되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바로 윗 상사 제프(Jeff, 가명)라는 사람의 정치에 휘말려 파트너로 승진하지 못했고, 기분이 몹시 상해 있던 터였다.
그때 그에게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하나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의 뉴욕 월스트릿 사무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엘에이에 위치한 이전 회사보다 훨씬 작은 회사의 파트너십 같은 형태로, 본인의 사업을 일굴 수 있는 기회였다.
아내 입장에서 당연히 안전한 뉴욕 오피스를 원했고, 나 또한 뉴욕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중년을 앞둔 남편에게 온전히 선택권을 주었다.
남자는 일생에 한 번쯤은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겠느냐 말이다.
남편을 믿었다.
남편은 결국 엘에이에 위치한 작은 회사를 택하고, 곧 그전 금융 투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남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신을 누른 제프와 더 이상 일하지 않게 되어 즐거워 보였고, 해방된 사람처럼 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답답함도 없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새 회사 CEO 부부들과 남편의 영업직 팀과 함께 했던 캐주얼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내 마음에 어떤 불
안감이 없지 않았다.
'10년 전업주부로 살던 내가 세상을 뭘 알겠어.. 점쟁이도 아닌데...' 애써 그 육감을 떨쳐냈다.
평소에 좋아하던 LA 다운타운 리츠칼튼 호텔내 스시집이 그날따라 맛이 없었다.
새로 옮긴 회사는 이전 회사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창립자들이 남편보다 10살 정도 많은 비교적 젊은 사장 두 명이었다.
각각 스탠퍼드와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 성격이 상당히 상반되는 두 인물이었다.
웨스트포인트 (Westpoint, 한국의 육사같은 밀리터리 사관 학교 ) 출신답게 데이브(Dave, 가명)는 목소리가 크고 굉장히 진취적이며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는 직진 스타일이었고,
스탠포드 (Standford university) 출신인 다른 한 명 스캇(Scott, 가명)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관망하며 사람들을 토닥이는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 간에 충돌만 없다면, 좋은 파트너로 보였다.
그 두 사람 사이에 비교적 어린 30대 초반 월급 사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두 CEO의 윤활제이자 회사 전반적인 일들을 관리하였다.
비교적 젊은 운영진이다 보니 앞으로 함께 회사를 쭉쭉 키워갈 수 있을 좋은 기회로도 보였다.
남편과 세일즈맨은 큰 포부를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 오피스를 정리하며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두 달이 채 되기전,
새 명함과 컴퓨터들이 도착하고 오피스 셋업이 거의 끝나고,
본격적으로 실무에 들어갈 즈음
전 세계에 비극적인 뉴스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바로 코비드 19.
남편은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사태가 몇 년이 갈지 몰랐으니까.
당시는 오히려 재택근무를 즐기는 눈치였다.
펀드매니저였던 남편은 뉴욕 증권 마켓 (NYSE) 시간으로 일을 해 왔기에, 엘에이에 있으면서도 동부 뉴욕 시간으로 맞춰 이른 아침 출근하였다.
두 도시 간의 시차는 3시간이다.
14년여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정장을 입고, 특히 겨울에는 어두운 새벽에 출근을 해 왔으니 재택근무가 좋았을 거다.
재택근무를 하니 본인이 해야 할 회사일만 하면 되고, 불필요한 업무들 대신 그 시간에 운동도 할 수 있으며,
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알콩달콩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코비드가 그렇게 오래도록 전 세계를 힘들게 할지 몰랐다.
문제는 이직 후 초반에 남편의 고객인 투자 업체를 만나러 갈 수 없었고, 새 회사 동료들 조차 만날 수 없었다.
쿼런틴은 시작되었고, 회사가 힘들다고 하니 계약되었던 연봉을 조금 낮추고,
그러면서 남편은 파트너로서 본인의 주 업무인 비즈니스 확장 업무보다 본사의 임원 업무를 맡게 되었다.
특수한 재해로 인해 임시로 연봉은 낮아졌으나, 남편은 본인이 원하는 행복에 더 가깝다고 여긴 눈치였다.
2년여를 지켜보니 그 회사는 내가 생각하던 회사가 아니었다.
패기 있는 똑똑한 젊은 사장들과 임원들로 구성된 그 회사를 쭉쭉 키워나갈 줄 알았는데, 실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회사 규모를 부풀리기는 하는데 인재 양성을 전혀 하지 않고 직원들이 계속 바뀌었다.
또한 두 창업자는 본사 파트너십을 처음 이야기와 달리 나누려 하지 않았다.
내 눈에는 회사의 덩치를 키워 그것을 비싼 값에 팔고 일찍 은퇴하려는 낌새가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만일을 대비해 새로운 직장도 찾아보라고 했으나,
코비드 시기라 모든 것이 쉽지는 않아 보였고, 남편도 스캇과 대화를 많이 하며 그를 믿고, 이직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남편 또한 임원으로서 본인이 회사에 기여하는 바가 크기에, 앞으로 함께 잘 성장하고 싶어 하였다.
팬데믹이 끝나갈 무렵, 코비드19 이후 처음 인디아놀라 거리로 가기로 했던 그 핼러윈 데이 점심 즈음에
두 CEO는 남편에게 커피 한잔 하자고 연락해 왔다.
남편은 그동안 원래 계약보다 조금 낮게 받아온 연봉을 다시 조절하고, 그 외 업무 리뷰 차 사장이 면담을 원했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그날,, 남편이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