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곰의 시간 Bear Market
마흔대가 되어,, 남편이 잘렸다.
우리 부부의 충격이 컸다.
주식시장에서는 항상 소와 곰이 싸운다.
화살표가 쭉쭉 올라가는 소는 (Bull Market) 상승장의 심볼이고,
주식장을 온통 벌건 화살표로 만들어 내리쳐 버리는 장은 곰으로(Bear Market) 상징한다.
인생이 Bear market으로 내동댕이 쳐 진 느낌이었다. 곰의 시간이 시작되었나..
속이 복잡했다.
남편에게 위로의 몇마디는 했었지만, 긴 대화를 할 마음이 아니었다.
남편도 속이 무척 복잡했을 것이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지 못하겠지만, 우선 그는 종일 코퍼레이션 변호사들과 통화를 하였다.
일단 남편은 연봉도 낮춰주며 회사를 믿고 일하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일거다.
아내가 새로운 직장을 살펴보라고 해도, 본인은 그 회사를 믿고 다른 곳으로 이직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요직을 담당하여 그 책임감에 더 충실히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는데 이런일이 생겨서 충격이 커 보였다.
일생에 해고(Lay-off)를 당한 첫 경험이고, 선비 같이 침착한 남편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남편이 하는 일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깊숙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나는 회사 부풀리기를 하는 데이브와 스캇의 전체적인 행적과 전략은 가늠했었다.
그들이 요직에 있던 남편도 자를 수 있는 일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 지분을 가진 세명 외에, 사람과 인재를 절대 키우지 않는 회사이기에 사실 나는 신용할 수 없었다.
두 CEO, 데이브 Dave와 스캇Scott의 사업 철학은 이전에 다녔던 금융 투자 회사의 창업자 펄시(Persy,가명) 와는 완전 반대였다.
펄시는 회사 안 팎 인재를 키웠다.
학교도 설립하여 아이들을 기르고, LA의 많은 박물관이나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며,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노력 하였다.
그녀는 내 남편이 아직 높은 직급도 아니었을때, 젊은 우리 커플을 자선파티에 불러내어 당시 대만 주재원을 인사 시켜주고,
LACMA 박물관 새건물 기념 오픈파티에 초대하는 등 여러가지 사교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물론 모든 모임은 비지니스와도 관련되어 있다.)
직원들에게 콘서트와 스포츠 관련 다양한 문화 경험을 제공하고, 직원 능력 향상에도 도움을 주려 하였다.
CFA와 같은 전문 지식 관련 자격증의 적지않은 비용을 전액 지불하며, 시험패스를 필수 항목으로 두었을 정도다.
펄시는 자녀가 없음에도, 직원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기부금 일부를 회사에서 보태어 주기도 하였다.
그 회사는 되도록 직원을 해고 하지 않으려고 부족한 직원에게 조차 최대한 기회를 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부분은 말이 많기는 했다. 가끔 다른이들을 힘들게 하는 멤버들이 있으니말이다.)
그렇게 펄시의 회사는 40여년을 엘에이와 유럽에서 어떠한 풍파도 견디며 꾸준히 커왔고 커가는 회사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옛회사의 창업자 펄시를 존경하였다.
( 하지만 그 회사로 다시 돌아가긴 이미 늦었다...쩝.. 제프는 막내 파트너중 한명이라 여전히 그 회사에 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지금 해고된 일이 다행인 듯 하기도 했다. 앞으로의 몇년을 아낀 것 같았다.
돈을 더 많이 받는것도 아니고, 그들이 회사의 지분을 처음 구두조건처럼 나눠줄 것 같지도 않고,
금융계 회사치고는 작은 회사라 남편의 경력에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남편은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의리가 있어서 스스로 쉽게 그만두지 않았을 터였다.
더 나이가 들기전에 더 나은 자리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아내로서 솔직히 남편이 걱정 되었다.
항상 인정받고 성실히 최선을 다하며,
집안에서는 착한 장남으로서 커왔던 사람이 갑작스런 충격과 가장의 무게를 어찌 견딜지.
작년부터 경기가 나빠지면서 남편 직급의 친구, 지인들이 줄줄이 해고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큰 고비를 넘기며, 본인의 입으로 사람들을 해고 할 수 밖에 없었던 대기업 D에서 일하던 친구도 이번을 넘기지 못했다.
뉴욕에 근 20년 세계 최고 금융회사 M 본사에서 일하던 친구도 짐을 쌋으며, 이웃 사촌중에서도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몇명이 해고되었다.
모두 경력이 쟁쟁한 똑똑한 이들이었지만 경기 앞에서 무너졌다.
한참 일을 더 할 수 있고, 경험과 에너지도 있는 40대들. 주로 자녀들도 어리다.
서럽게도 세상은 이들을 잘랐다.
모두가 10-20년 넘는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지만, 경제가 나빠지며 ’비교적‘ 고액 연봉자들부터 정리가 들어가는 상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전에 아둥바둥 파트너쉽을 따려고 하나보다.
억울하면 사장해야지..
불행 중 다행인지, 혼자만 겪었다면 남편 성격상 많이 힘들고 우울했을지 모르지만, 몇명의 동지가 있음에 터놓고 상의할 상대가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자.. 나는..?
이성적인 척 그만하고,,
사실 멘붕이었다. 눈앞이 하얬다.
화도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눈치를 안 챘을리가 없는데.
아내 입장에선 멀쩡하게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면서,
대기업도 포기하며 진행했던 큰 선택이 허망하게 끝나보였다.
멍청하게도 자꾸 이미 지나간 펄시의 회사에 대한 아쉬운 생각만 맴돌았다.
엘에이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멋진 개인 사무실에, 여러가지 각종 베네핏,
제대로 정치를 했다면 여전히 파트너쉽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있을 법 했는데,
남편이 더 노력하지 않고 스스로 그만 둔 것 처럼 여겨졌다.
통찰력이 그렇게 없었나? 제프의 정치에 화가나서 나온 곳이 고작 이 정도의 회사였나?
그렇게 원망의 감정도 생겼다.
사실 남편의 속은 나보다 더 속상할지 알지만, 나도 그냥 어딘가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다.
화가 났다.. 나에게도.
남편이 힘들어졌을때
"그 동안 고생했어. 이번은 내 차례! 좀 쉬어"라며,
내가 집안 생계 바톤을 이어받아 남편에게 쉴 시간을 줄 수 없는 무능력에 화가났다.
눈 앞이 깜깜하고 망연자실이었다.
사실 아이들이 없다면 큰일도 아니다.
우리 커플이 작은 스튜디오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나는 맨하튼의 작은스튜디오에서도 살아봤기에 주거 공간이 작아지는 점이 두렵지 않다.
좋아하던 여행도 줄이면 그 뿐이다.
경기 침체로 주식이 반토막 이상 떨어졌지만, 둘만 있다면 무직으로도 한동안 버틸 수 있었다.
나의 불안감은 그저 아이들 양육 문제 뿐이었다.
어른들에게 일어난 인생의 변화가 지금 내 아이들의 나이에는 인생의 큰 역변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해 봤기에 안다.
그래서 아이가 있는 어른은 어떤 시련이 와도 침착하게 결정을 해야한다.
그 동안 내 커리어를 포기하면서 정성드려 키웠는데, 앞으로의 변화들이 혹여 딸들에게 상처를 줄까 염려가 되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대견스럽게 학교생활이며 본인들의 할 일을 제대로 해주고 있는데,
부모인 우리가 이전처럼 제대로 못해줄 거 같아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공들여 올린 탑이 그냥 무너져 내린거 같아서 주저앉고 싶어졌다.
어딘가 도망 가고 싶었다.
내 엄마가 보고싶고, 그냥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내 경력이 단절된 이유는 결혼을 해서가 아니라, 육아때문이었다.
단지 육아를 도와 줄 믿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전혀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내가 도맡아야 했었다.
그러다가 둘째가 생기고 팬더믹이 오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가고,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운전하며 운전 기사 인생이 시작될 무렵..
아이들을 학교보낸 후, 다시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내 일을 시작하고자 할 무렵,
남편의 커리어는 이제 돈을 모을 수 있을 만큼 연봉이 올라가고 있을 때,
그는 본인의 비지니스를 위해 회사를 옮겼고,
하필 코비드19이 터졌고,
팬더믹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막 지나와서 체력이 고갈 되어 있던 상태에 약간의 우울증이 생겼고
그래서 지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며 다시 일어나려고 할 무렵,
그 작은 회사는 경기의 흐름에 따라 남편을 레이오프 시켰다.
이미 지쳐있는 내게 그 마지막 큰 한방이 철푸덕 내려칠때 결국 난 링에서 녹다운이 되었다.
이런… 제길..
이런 일이 연속적으로 생기니 나의 몸도 마음도 주저 앉아버렸다.
여러가지 힘든 정황에, 당장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내 모습이 주부 우울증을 더 부추켰다.
허무했다.
어리석은 걸 알지만 억울한 생각도 계속 났다.
잠 못자며 해왔던 가사노동 시간만큼 회사에서 일했다면,,
내가 이럴려고 유학을 와서 회사도 그만두고, 잘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좋아하던 뉴욕도 떠나고,,
이럴려고 그런 큰 결정들을 했고 그런 고생들을 해왔었냐며 한탄도 하였다.
남편의 해고라는 상황으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조금씩 축적되어져 있던 부정적인 감정과 스트레스가 가슴 속 가득 차올랐지만, 그 폭탄을 어디에 터트릴 곳은 없었다.
냄비가 끓듯이 그 폭탄은 가끔 끓어올랐고, 파락파락 증기를 내 뿜었다.
혹여 아이들 앞에서 실수할까봐 걱정되기도 하였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들의 도시락을 챙기고, 방과 후 액티비티를 위해 운전을 하였다.
인생에 또 하나의 시련이 다가왔을 뿐, 한편으론 이 일이 어쩌면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
정신줄을 잡으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갑갑했다.
당장 남편의 새 일자리는 찾기 어려웠다.
회사들은 실직자가 많은 이 시점에 오히려 고급인력을 싼값에 가져다 쓰려고 작정한 듯 보였다.
세상 모든 가격은 다 오르는데 집집마다 월급만 안 오른다고 아우성이다.
뭐가 어디서 잘 못 된건지..
모든게 엉켜보이는 세상.
나를 뒤돌아 보았다.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하던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는 나도 잃고, 길도 잃었다.
치매 환자마냥 기억이 없었다.
내가 누구지...
내 존재가 사라지고 있었는지 몰랐다.
사실 현실보다 내 마음이 더 갑갑했다.
내 의지와 달리 어리석은 생각만 들고, 마음의 풍요로움이 매말라갔다.
늪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동굴이 필요했다. 고민이 생기면 항상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