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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Jun 24. 2019

아버지와 대학로

슬픈 기억의 연결 고리   

   모든 장소에는 좋든 싫든 기억이 남아있다. 좋은 기억이라고 그것에만 빠져 살 수는 없듯이 싫은 기억도 마찬가지로 그것에만 빠져 살 수는 없다. 기억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어쨌든 모든 기억은 도망칠 수 없는 거리에 늘 남아있다.

  

겨울이 시작되는 11월 1일에 아빠가 떠난 서울대학교 병원, 시간은 흘러도 그때의 감정은 흔적처럼 이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기억들은 우선순위로 정리되어 저장되는데 그 우선순위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지기도 한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감정이 있고 잊고 싶지 않아도 잊히는 감정이 있다. 대학로에 대한 감정은 그 양쪽 한가운데 어디쯤에서 늘 방황한다.


햇빛이 쨍쨍했던 2010년 11월 1일, 햇빛 쏟아지는 미아리 고개를 택시 타고 넘어가던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 창 밖을 보며 소리 없이 우는 엄마의 손을 잡고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던 기억은 불행하게도 선명하다.  나도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택시가 멈추는 곳에 숨이 멈춰가는 아빠가 누워있는 병원이 있다는 사실은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앞서게 했다. 잊고 싶은 햇빛 좋은 그 날은 그 뒤로 음각 흔적 처럼 마음과 기억에 남았다. 그때 내가 입고 있었던 옷까지 고스란히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내가 받은 충격은 당연히 작지 않았다.


중환자실 앞, 꺼져가는 삶의 빛깔처럼 무채색 회색으로 칠해진 보호자(누가 누구를 보호하는 거지?)용 의자에 앉아 아빠가 떠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했다. 서울대학교 병원,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나는 공간은 아빠가 치료를 받는 공간이었지 떠나는 공간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이 가진 생명의 빛이 그렇게 빨리 사그라들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많이 남은 것처럼 보였던 생명의 잎새는 순식간에 낙엽으로 져버렸다. 결혼식이 한 달 하고도 삼일이 더 남았던 형은 자신의 결혼식에 아빠가 올 수 없음을 직감하고 나를 병실 멀리 계단으로 불렀다. 오래된 본관 건물의 가파른 그 계단 앞에서 형은 무너지듯 울었다. 따라온 사촌 동생이 무슨 말로 위로를 했는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내가 울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어쩌면 그 순간이 오래 마음에 남을까 봐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를 담당했던 교수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나 소생 시도는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가져왔고 '안타깝다.'라고 했다. 그 '안타깝다.'는 말이 더 마음을 후벼 팠다. 아빠는 안타까운 강을 건너고 있음을 가장 전문가인 담당 교수가 인정했으며 그걸 물리칠 수 없게 됐음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의자에 앉아 그 말을 들어야 하는 내 무력감이 몸에서 흘러내려 바닥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정말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그 '끝'에서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늘 그렇듯 직면한 현실에 집중할 수 없었고 오직 하나의 감정에 빠져들었다. 나는 나를 저주했다. 이런 지경이 되도록 왜 몰랐을까? 아빠의 마지막 날들, 당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아빠가 알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다.     


의식이 없는 아빠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같이 숨 쉬는 이 세상에서 더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난 끝까지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함께 보낸 수많은 날들이 허망하리만큼 아빠의 '끝'은 비현실적이었다. 불과 하루, 불과 몇 시간, 불과 몇 분을 같이 있지 못하고 아빠는 떠났다.


영화에서처럼 '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호흡을 측정하던 기계는 그렇게 울부짖었다. 자신의 몫을 다 했다는 듯이 울부짖는 그 소리 속에서 아빠는 지난했던 삶에 작별을 고했다. '삐'하는 고통스러운 기계음과 남은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아빠를 환송했다. 일요일 아침 일찍 두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을 다녀와 베토벤 교향곡을 들으며 콧노래를 부르곤 했던 남자는 저 멀리 황해도가 고향이었다. 아빠는 대학로라 불리는 혜화동에서 눈을 감았다.


한동안 대학로, 혜화역에 오면 그 흔적이 그대로 느껴졌다. 복잡한 감정은 마음 한구석에서 주로 죄책감이란 결정체로 남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네에 오게 되면 모임이든 뭐든 웃을 일로 오게 되는데 웃음의 크기만큼 마음 한구석에 턱턱 걸리는 흔적의 크기도 동시에 커졌다. 즐거울수록 잊고 싶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선명해졌다. 내 행복은 이곳에서 부채감으로 변했다. 행복감을 느낄수록 그 '끝'의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이 나를 슬픈 감정으로 끌어내렸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기 오는 것을 피하기도 했다. 뭘 하든 마음에 빚처럼 느껴지는 그 감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이 동네에서 이렇게 웃고 떠들고 행복을 찾아도 되나?'라고 생각했다. 잊으려고 하는 그때의 슬픈 기억들을 조각조각이나마 되살려냈다. 그것을 피하려면 장소도 피해야 했다. 하지만 피해진다고 항상 피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때마다 마음은 방황했다.


상처에 딱지가 앉아서 아물고 흉터가 남아도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의식하지 않게 되어 가듯이 시간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상처가 주는 기억은 실제 상처가 아무는 과정과 비슷하다. 시간이 해결해준다. 그리고 절대 흉이 완벽하게 사라지진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요즘 대학로에 올 때면 주차 전쟁이 벌어지는 공영 주차장보다 조금 비싸도 여유 있는 병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저녁을 먹으러 가곤 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내가 느끼는 괴로움은 그만큼 희미해진 셈이다. 과연 잊는 게 맞는 괴로움일까? 시간이 흘러가며 이런저런 것들이 희미해져 가는 게 축복인지 저주인지 가끔은 잘 모르겠다. 괴롭지만 기억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어떤 것이 맞는지 고민하다 지금 좋은 기억으로 슬픈 기억을 덮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가진 이 장소에 대한 슬프고 아픈 기억을 지금 행복하고 좋은 기억으로 덮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바뀌지 않을까? 슬픈 기억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같은 장소에서 행복한 감정을 계속해서 느끼고 감정을 직시하다 보면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곳에 올 때는 엄마를 자주 모시고 온다. 맛있는 밥도 먹고 맛있는 차도 마시고 선선한 공원도 산책하고 이 장소에서 즐거운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엄마가 슬픈 기억을 다른 기억으로 조금씩이나마 희석할 수 있도록. 아빠를 챙기다 혼자 앉아 있었을 병원 로비, 언제 전화 올지 몰라 급하게 밥을 밀어 넣어야 했던 식당에서 이제 행복한 감정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 장소가 마냥 슬픈 장소가 아님을, 이렇게 행복한 일상도 있는 장소임을 우리 가족 모두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게 아빠를 잊는 게 아닌, 기억하고자 하는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대학로에 들렀다. 추웠던 11월은 지나갔고 어느덧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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