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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블리 Sep 25. 2019

나만의 전역 기념일

흘러가버린 20대를 추억하며

   다른 브런치 글을 읽다 괜히 무안해졌다. 그 글을 쓰신 작가님은 감성적이고 일기나 다름없는 글은 브런치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모든 글이 분명한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는데... 맞는 말일지 생각해봤다. 과연 그럴까? 브런치에 올라오는 모든 글이 다른 누군가에게 '정보'나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인생의 '답'을 제시해야 하는 걸까? 요즘 출판계의 인심이 유명하지 않은 '일반인'의 에세이에는 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때로는 질문으로 끝나기도 하는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도 이 공간에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이야기도 세련된 문장으로 써내면 더욱 좋겠지만 이곳은 자신의 다른 주특기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글도 써보고 싶어 모인 공간이 아닌가? 이곳의 모든 작가들에게 글로 먹고사는 프로의 기술을 기대한다면 오히려 다양한 색을 잃지 않을까? 글도 웬만큼 쓰려고 노력하며 다른 밥벌이도 할 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대단한 이야기를 한아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만 명이 넘어가는 구독자를 가진 작가들이 있다면 나 같은 작가도 있어야 균형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 균형감이 비록 피라미드 구조라고 하더라도)  


   그런 질문을 하며 오늘의 글을 시작해본다. 저 깜찍한 사진은 스물세 살 가을에 전역하고 두 달 뒤의 내 모습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잠깐 하다가 도무지 돈이 되지 않아(편의점은 다양한 업무를 하는 것에 비해 늘 최저 시급을 자랑했다.) 다시 구한 백화점 베이커리 카페 아르바이트였다. 당시 백화점 누나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뻔)했던 아르바이트 시절의 파릇파릇했던 나의 모습이 저 사진에 그대로 남아있다. 역시 남는 것은 사진뿐이다. 불과 몇 개월 전 군대에서 병장으로 나름 거들먹거리며 지내다가 전역 후 아르바이트 과정에서 인생 참교육 당하며 빠르게 군대물이 빠지고 재사회화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연애든 복학이든 미래든 지나간 과거가 늘 그렇듯 그때도 이런저런 고민은 많았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왜 굳이 이 애교 넘치는 사진을 올리고 그때 이야기를 하냐면..... 지난주 9월 19일이 나만 추억하고 기념하는 바로 군대 전역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9월 19일이면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그런 말을 하고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들 모두 그럴 자격이 있지 않을까?  10월 19일이 전역 기념일이 될뻔했지만 군복무가 축소되며 얼떨결에 한 달 빨리 나왔다. 덕분에 그 해의 가을을 사회에서 시작할 수 있었으니 그 한 달의 의미는 컸다.

   눈을 감고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시간 여행을 하듯 빛의 터널을 지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시간은 되감듯 돌아가 난 빳빳하게 다린 A급 전투복을 입고 내무반의 거울을 보며 몰래 기른 머리를 만지고 있다.(군인들 대부분이 민간인들은 전투복에 줄을 몇 개 세웠는지 머리카락 길이가 조금 더 긴지 짧은지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전역하던 날 부대에서 군인 신분으로는 마지막으로 맞이했던 아침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날씨는 내 전역을 축하해주듯이 너무나도 청명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고 토요일 혹은 일요일이었다. 이것은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일 중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대장 신고는 이미 며칠 전에 끝냈고 최대한 사회인처럼 보이기 위해 '짬밥' 식사량도 줄여가며 전역 당일까지 대기했던 기억이 있다. 중대장이 없었던 이유는 주말인 것도 있지만 같이 전역하는 동기가 특정 부사관의 폭언, 구타, 부조리 등을 중대장에게 제보하고 나가겠다고 몇 달 전부터 사전 광고를 하는 바람에 굳이 면담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출근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어딜 가나 상명하복의 조직에서 상사가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렵지만 중령 진급 목표 하나 때문에 부대원 여러 명을 골로 보냈던 그는 나쁜 일화가 많았다. 나 역시도 일화가 있었다. 어쩌다 보니 상병 때 수술을 했는데 수술 부위 소독을 하기 위해 주 1회 의무대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중대장에게 했다가 날아오는 시퍼런 쌍욕에 마음을 다치고 같이 집어던진 서류에 얼굴을 다쳤다.(그때까지 눈밖에 나는 행동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음에도...) 의무대는 부대 바로 옆에 있었으나 북한 땅처럼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결국 몇 주 동안 소독은 후임들이 쭈뼛거리며 해줬고 실밥을 뽑을 때가 돼서야 겨우 의무대에 갔으나 군의관은 만나지 못하고 의무병이 실밥을 뽑아줬다. 그나마도 제대로 뽑지 못하고 남아 있던 실밥을 그날 저녁 발견했고 그냥 손톱깎기로 뽑았다. 흥분하면 습관적으로 오른손이 주변 물건으로 향하던, 분노 조절에 인색하던 그가 소원대로 중령 진급에 성공했는지 궁금하다.


   쓰다 보니 그때의 분노가 올라오며 중대장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그가 없으니 당일 당직 사령이 부대원들을 모아서 부대 정문까지 늘어서게 했다. 주말이라 부대원들은 전투복이 아닌 활동복을 입고 있었고 형형색색(당시는 활동복 색상이 바뀌는 과도기로 상태가 좋은 구형 활동복은 다음 서열 1위가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 색깔로 계급을 가늠할 수 있었다.)의 물결이 출렁이듯 부대 정문까지 이어져있던 풍경이 기억난다. 모두가 편한 활동복을 입고 있다 보니 전역자인 우리의 잘 다린 A급 전투복과 반짝거리는 전투화는 상대적으로 튀어 보였고 그 이질감은 우리가 이제 부대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군복무 기간 동안 몇 번의 계절을 보냈고 때로는 집 같고 때로는 감옥 같기도 했던 구석구석 익숙한 장소들이 이제 낯선 공간으로 다가왔다. 정말 이 모든 것들이 끝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생각에 젖어 지난 추억을 생각하는데 당직 사령이 의례적으로 전역자들에게 시키는 멘트인 전역 소감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 한 말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대략 옮겨보자면 ‘입대할 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O 같았던 시간이었지만 집에 가는 날은 이렇게 반드시 오더라. 난 먼저 간다. 남은 군 시절이 많이 O 같겠지만 시간은 무조건 지나간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 (약간 놀리는 톤으로 말해야 제맛)이라고 말했다. 뭔가 훌륭한 자아성찰의 멘트를 기대했던 당직 사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내 입을 틀어막다시피 하며 서둘러 헹가래를 치게 했다. 기억나는 이유는 당황한 당직 사령과 달리 부대원들은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지르며 얼마 전까지 'OOO병장님'이라고 부르던 나에게 '형 나가서 연락할게' 'OO야 ㅈ뺑이 쳤다. 행복해라' 등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속이 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눈물이 났다. 가족처럼 매일 마주 하던 녀석들 대부분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인생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기억은 빠르게 풍화되어 사라질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다시 보지 못할 얼굴들을 훔쳐보며 눈물을 훔쳤다. 여담으로 그 당직 사령 역시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극도의 예민함과 다혈질의 소유자로 물리적인 방법 없이도 우리의 정신세계를 빠르게 분쇄했던 인물이었는데 하루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할 멘트를 날리고 있는 우리를 보고도 당황스러운 웃음만 지을 뿐 별다른 강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정문만 나가면 남이라 이건가...

   그 풍경 속에 애써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멀리서 담배만 피우던 얼굴들도 생각난다. 당시에는 한 달 기준으로 군번을 정리하다 보니 월초에 전역하는 동기와 월말에 전역하는 동기의 전역 날짜 차이가 생기게 되는데 20일에 입대에서 19일에 전역하는 나는 월말에 전역하는 동기 몇 명을 뒤에 남기고 나왔다. 멀리서 담배만 피우던 얼굴들이 그 남아야 하는 동기들이었다. 친했지만 그날만큼은 서로 기분이 묘했다. 물론, 이미 한 달 전부터 '내가 밖에서 늦잠 자고 누워 있을 때 너는 연병장에서 육군 도수 체조하고 있겠네~~'라고 놀리기는 했지만 막상 먼저 나가는 날이 오니 축하받기도 위로하기도 참 묘했다. 그 며칠이 무슨 대수라고 그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분위기는 그랬다. 독립된 부대다 보니 소왕국처럼 온갖 자체 규칙이 많고 이래저래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우리 부대만의 묘한 분위기 탓일지도 몰랐다. 모든 인사를 끝마치고 드디어 부대 정문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갔다. 속이 다 후련했다. 휴가 복귀하는 날에 어둑해진 그 언덕을 오르고 있으면 '왜 내가 의무 군 복무를 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나' 한탄하기도 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서치라이트가 내 얼굴로 쏟아졌고 '누구냐' '움직이면 쏜다'로 시작하는 확인 절차가 이어졌다. 이때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암구호'(매일 바뀌며 전군이 동일한 암구호를 쓴다.)를 주고받게 되어 있는데 휴가자는 당연히 알 리가 없으니 절망적인 목소리로 '휴가자입니다아아악!!!'이라고 외쳤다. 이제 그 절망적인 휴가 복귀가 내 인생에 없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고 정말 이제 끝이라는 실감도 났다.


   그 언덕길을 내려오면 부대 근처 마을 특유의 전형적인 풍경(군장점과 식당, PC방, 노래방, DVD방들이 몰려있는)이 펼쳐졌는데 그날은 신형 그랜저가 언덕길의 끝에 서 있었다. 강남에서 커다란 부동산 회사를 운영하신다던 동기 부모님이 직접 데리러 오신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전역 기념 술판은 생략됐다. 바로 서울로 간다던 나에게 의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이라며 코가 삐뚤어지도록 한잔 하고 사우나 갔다가 집에 가자던 동기는 동기는 겸연쩍어했다. 사실 난 혼자 버스를 타고 가고 싶었다. 휴가 복귀하던 날 바라보던 풍경을 다시 거슬러 바라보며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는데 동기 부모님은 한사코 바래다주시겠다며 나를 차에 태웠다. 동기 부모님 두 분은 모두 과묵하셨고 이상하게 그 상황을 불편해하는 동기도 말이 없어서 서울까지 오며 별다른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 나를 내려주고 동기는 떠났다. 떠나는 차의 창문을 내리고 동기는 '꼭 다시 연락하자'라고 외쳤다. 그 외침이 지난 군생활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게 만들었다. 괜히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말 끝났다는 사실이 너무 신나서...


   내가 살던 동네의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고 공중전화를 찾았다. 누군가한테 전화를 했던 기억은 나는데 통화를 한 기억은 없다. 그렇게 바로 집으로 향했다. 익숙했던 거리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다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제 이 거리를 다시 떠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불과 하루 만에 두메산골의 부대에서 서울 한복판에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가 초점을 맞출 때 흔들리듯이 익숙함의 초점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익숙했고 앞으로 다시 익숙해져야 하는 거리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다시 생각하면 일종의 멀미 아니었나 싶다. 하루아침에 삶의 공간이 바뀌는 것에 대한 멀미였다.


   집에 오니 가족들이 반겨주고 강아지가 뛰어나왔던 기억이 난다. 집 현관을 배경으로 군복을 입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지금도 그 사진은 남아있는데 활짝 웃는 표정에서 인생의 큰 숙제 중 하나를 해치웠다는 자신감이 잔뜩 배어 나온다. 거리는 낯설었지만 신기하게도 집은 익숙했다. 기쁨의 순간을 잠시 누리고 바로 샤워를 했다. 군대의 때를 다 벗겨내듯이 개운하게 씻고 티브이를 보다 잠이 들었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군대에 있었던 그 모든 시간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제도 집에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일상이 바로 익숙해졌다. 한숨 자는 동안 머릿속에서 익숙함의 초점을 완벽하게 맞춘듯한 느낌이었다. 오히려 불과 몇 시간 전 연병장에서 육군 도수 체조를 하던 기억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전날 저녁 부대에서 네모난 식판에 밥을 먹고 점호를 받았는데 그것 역시 멀게 느껴졌다.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공간이라고 마음속에서 되새겼다. 국방의 의무를 드디어 끝냈다. 이제 난 납세의 의무만 지키면 될 일이었다. 행복했다. 사전에 치밀하게 저녁 약속을 만들어 놨었고 형의 휴대폰을 빌려 최대한 당일 전역한 군인 티가 나지 않게 꾸미고 나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 역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마치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잔뜩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군대 가기 전과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전역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감에 어쩔 줄 몰랐다.


   전역 기념일이라고 매년 같은 날에 전역한 날을 떠올리는 이유는 그 '행복감'을 떠올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했던 나를 떠올리고 그 기분을 다시 끄집어내고 싶은 걸 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아득하다. 단지 전역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질 수 있었던 '긍정'과 '행복'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때보다 더 자유롭고 시간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훨씬 여유로운 지금의 내가 그때보다 행복하지 않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람은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잃을 것이 많아져서 혹은 더 갖고 싶은 욕심에 불안해하는걸지도 모른다. 물론, 산다는 게 기가 막힌 문장 하나로, 추억 하나로 갑자기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매년 그 날을 떠올리면 '행복'을 재정의하는 계기가 된다. 행복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다. 행복은 지금은 없고 앞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고 있으나 찾지 못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기만 심하게 걸려도 지겹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감기 걸리기 전에는 지겨워 어쩔 줄 몰라하던 그 일상조차!!) 그런 면에서 주기적으로 어떤 계기든 만들어서 삶의 조각들에 묻혀버린 행복을 다시 찾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행복이 특정 계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행복해하는 그 기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기억하면 어두운 삶의 터널을 지날 때 시기적절하게 꺼내볼 수 있을 것이고 그 방법을 깨우쳐가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처음에 말한 대로 내가 쓴 이 글에 먹고사는데 써먹을만한 지식은 없다. 그저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고 그때 드는 생각을 적었을 뿐이다. 몇 명이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고 오늘 유독 길어진 이 글을 끝까지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읽고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어떤 시절을 돌아보게 되고 거기서 내가 느낀 기분을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서 지금은 잠시 잊어버린 어떤 빛을 다시 찾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내년 전역 기념일을 기다리며...우리의 모든 경험이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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