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아르바이트 단편선

2008년 여름날.

by 감탄쟁이

새벽 6시. 휴대폰의 알람 소리와 함께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5일짜리 해운대 T마트 개장 단기알바 5일째.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종일 일 하는 것 중에 가장 힘든 부분은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구포에서 장산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부지런히 해야 한다. 그래도 다행히 일을 혼자 하지 않고 가장 친한 친구 S와 같이 하기 때문에 심심하지는 않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선다. 여름이기 때문에 이른 아침이지만 해는 벌써 떠서 밝다. 지하철 덕천역까지는 걸어서 15분 걸린다. 루트는 늘 똑같다. 그런데 문득 뇌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이 생각이 났다. 보통 늘 익숙한 것에만 적응이 되어 있고, 편하게 늘 하던 방법을 따르려고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는 뇌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일상에서 뇌에 틈틈이 자극을 주어 신선한 영양을 공급하는 방법 중 가장 기초적인 것은 새로운 길로 다녀보는 것이다. 완전히 모르는 길일수록 좋지만 - 예를들어 용감하게 산을 타고 간다던가 - 지각을 할 수 있는 위험수단을 안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길은 아니지만, 늘 가던 길은 아닌, 평소에 알고 있었던 길로 가 보기로 했다.


이렇게 뇌에 사소한 자극을 주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또 있다. 바로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한다는 것이다. 슈테판 클라인은 그의 저서 「시간의 놀라운 발견」에서 자신의 지각을 훈련하고 현재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은 시간감각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날마다, 순간마다 감각적 인상들을 더 많이 받아들일수록 시간이 더 풍요롭고 길게 느껴진다. 예를들어 나중에 돌이켜 보면 활기찬 대화를 나누었던 1시간은 멍하니 몽상에 잠겼던 1시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질 것이다. 시간에 더 많은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우리는 인생에 더 많은 시간을 허락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통찰력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새로운 길을 지나가는 등 뇌에 자극을 주면서 여러 주위를 관찰하는 행위는 따로 시간 들일 필요 없는 매우 간단한 행동이다. 오늘은 출근길에서 시베리아허스키 같은 큰 개를 데리고 지나가는 아저씨를 보았다. 개를 키워본적은 없지만 키우게 된다면 저렇게 큰 개와 지내보고 싶다. 이런 사소한 관찰을 하면서 통찰을 시작한다. '저 아저씨는 어떻게 저 개를 얻게 되었을까? 저 개의 이름은 무엇일까?' 그리고 버스정류장을 지나가면서 항상 지나가는 169번 버스를 본다. '버스의 이익은 얼마나 될까? 환승을 하면 아예 이익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그럼 수익이 별로 없을텐데' 이런게 쓸대없고 헛생각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냥 음악들으면서 아무 생각없이 가는 것보다는 훨씬 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다가 어느새 지하철역에 도착하여 친구 S를 만난 후 지하철을 타고 50분의 여행을 시작했다. T마트는 L마트, E마트, H마트에 대항하는 경남지방 대형유통마트인데 이제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장갑을 끼고 창고로 가던 도중 문구 진열대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나에게 기타치는 법을 알려준 동네의 R형이었다. R형이 얼마전부터 문구용품 거래처에서 일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한 후 창고를 가서 다양한 업체의 여사님들과 인사를 나눈 후 간단하게 음료수 진열부터 시작했다.


정해진 매대에 일치하는 물건을 진열하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로봇과학이 성장해도 각각 다른 음료수병을 원하는 위치에 진열시키는 것은 힘들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릴 것이다. 열린 냉장고 밑에 뒤쪽에 콜라가 박혀있다. 팔을 집어넣어 하나하나 빼서 유통기한을 확인 한 후 며칠 남지 않은 것을 정리하여 앞으로 뺀다. 콜라 자리를 침범한 환타는 새로이 정리하여 자기 자리에 위치시키고 새로운 환타 한박스를 가져와서 뒤쪽으로 진열한다. 단순한 노동이지만 그래도 약간의 생각을 요하는 작업이다. 과연 이것을 로봇이 할 수 있을까? 창고정리도 마찬가지다. 사이다 15박스를 자리를 내어 재야(쌓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주감귤 5박스를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사이다를 쓰러지지 않게 잘 잰다. 보통 S가 전달해 주면 내가 받아서 쌓아올린다. 이때 쌓아올리는 것에도 은근한 재미가 있다. 한 박스 위에 한 박스를 쌓으면 희한하게도 잘 쓰러지지 않고 테트리스 처럼 딱딱 들어맞는 게 묘한 쾌감이 생긴다. 이런 것은 특히 맥주 피쳐를 잴 때 더욱 재미있다. 지그재그 형식으로 잘 쌓아올리면 높이가 사람 키를 훨씬 넘어가도 쓰러지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성을 건설하는 기분이다. 이렇게 여러 음료박스를 위치를 바꾸고 쌓고 옮기는 일을, 그것도 지나다니기 좁은 창고에서, 로봇이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음료수, 주류 쪽을 담당했다. 여기서 가장 잘 팔리는 것은 당연 주류이다. 특히 맥주 피쳐를 가장 자주 채워넣는다. 개장 행사시즌이라 쉴 틈이 많지 않다. 맥주를 채워넣으면 소주가 나간다. 소주를 채워넣으면 음료수가 나간다. 소주나 맥주 모두 종류가 여러가지라서 비워진 종류를 창고에서 잘 가져와야 한다. C 소주인줄 알고 한박스 들고왔는데 알고보니 H소주였다. 그러던 중 한 아저씨가 오더니 캔커피를 박스채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M캔커피 175ml짜리를 무려 10박스나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S와 함께 바로 창고로 갔는데 M캔커피 박스를 쌓아둔 곳이 보이질 않았다. 분명 어제 많이 받아둔 것 같았는데 보이질 않았다. 다른 할일도 많기 때문에 빨리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M은 사이다 박스성에 뒤쪽에 있었다. M 10박스를 꺼내기 위해선 사이다 20박스를 다른곳으로 옮겨야 했다. 한숨 한 번 쉰 후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역시나 내가 안으로 들어가서 사이다를 옮긴 후 M을 S에게 전달하여 10박스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몇 박스 더 꺼내서 다른 곳에 재어 놓았다. 이렇게 살린 10박스를 카트에 넣어 계산대까지 가서 계산시킨 후 차에 실어주는 서비스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쯤이야 대량으로 구매한 고객에 대한 간단한 접대로 보면 된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마침 고모가 여기서 캐셔를 하고 있어서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다. 오늘은 식권을 들고 근처 중국집에가서 짜장면을 한그릇씩 먹었다. 이렇게 마트 옆에 있는 식당은 위치가 꽤나 괜찮은 것 같다. 적어도 고정 거래처 손님의 수가 꽤나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 약간의 할인은 해 줄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하고, 특히 이렇게 몸을 사용하는 일을 하면서 먹는 식사는 그냥 배를 채울 때 보다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맛이 좋다. 보통 일을 할 때 점심시간은 1시간 정도 된다. 그런데 이번 일은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40분만 쉬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하는 일은 그저 반복적이라서 지루할 수도 있지만, 손님이 어떤 것을 물어보면 대답해주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다.


캔 같은 경우는 낱개로 수가 안 맞을때 나의 심장을 간지럽힌다. 딱 봤을 때 한박스 정도 넣으면 자기 자리에 꽉 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서 한박스를 가져와서 진열 했을 때, 예상대로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고 틈새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생각보다 무지 기분이 좋다. 반대로 다 채웠는데 한 두개가 남아버리면 그냥 거기서 먹어버리고 싶다. 난 이렇게 무언가 딱 딱 맞아떨이지는 것을 생각해 보는 습관이 있다. 약간 여유가 있으면 줄을 맞추어 본다. 콜라 500ml와 옆에 사이다 500ml짜리가 줄을 서 있는데, 콜라는 2줄이고 사이다는 3줄이다. 그런데 딱 보니 콜라 한박스를 가져와서 뒤쪽에 좀 채우면 3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러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가져와서 3줄 3줄 딱 맞춰본다. 예상대로 틈이 맞으면, 마치 테트리스에서 5줄을 한꺼번에 없앴을 때의 짜릿한 기분이 든다.


창고에 가보니 같이 일하는 형이 냉장고 위에서 휴지 한박스를 꺼내달라고 한다. 휴지가 왜 냉장고 위에 놓여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특기는 담타기이고, 무엇이든 오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볍게 올라가서 물건을 꺼냈다. 난 아무래도 활배근이 발달한 것 같다. 높은 곳을 올라갈 때 활배근을 활용하게 되는데 몸무게가 결코 가벼운건 아닌데도 쉽게쉽게 올라갈 수 있다.


그러던 중 냉장고에 들어가서 냉동물품을 꺼내게 되었다. 한여름이고 땀을 너무나 많이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냉동실 안이 춥지는 않았다. 이번 미션은 냉동고 안에서 만두 1박스를 꺼내는 것이었다. 여러 박스도 아닌 단 한 박스. 그것도 시식용이라고 적힌 것이여만 했다. H업체 냉동담당 이모가 부탁한 일이다. 하지만 밉지는 않다. 그 이모랑 대화를 하면 마치 털털한 나이많지만 동안인 누나와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정이라는 게 느껴진다. 냉동실은 넓지 않았다. 여기서 어떻게 시식용 만두를 한박스를 찾는단 말인가. 그리고 냉동실은 우리 담당이 아니라 정리한 적도 없었다. 안을 보니 시쳇말로 개판이었다. 재고가 정리없이 쌓여있였다. 하지만 별 방법은 없다. 그냥 들어가서 찾는 것이다. 냉동실 안은 너무나 시원했다. 5분정도 박스를 뒤적거린 결과 원하는 물건을 찾아서 넘겼다. 그런데 수많은 박스 중에서 딸기맛 요플래 하나가 낱개로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냉동실 안에는 S와 나 둘 밖에 없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바로 하나를 따서 마셨다. 먹은 것이 아니라 마셨다. 숟가락도 없었다. 아! 너무나 맛있었다. 사실 이런 큰 마트에서 낱개 한두개 쯤은 몰래 슬쩍해도 알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소심한 행동이었다. 우리는 그 후 이 행동을 '냉동실 요플래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L카라는 게 있다. 마트 내에서 큰 물건을 운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리어카이다. L자모양으로 생겼는데 그 위에 박스를 사람 키보다 높이 쌓아서 옮길 수 있다. L카 운전도 나름 요령이 생겨야 한다. 물건이 무겁기 때문에 균형을 잃기 쉽다. 손님이 많기 때문에 조금만 실수해도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난 L카를 끌고 가다가 쌀 매대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실수로 아래쪽에 진열된 쌀을 살짝 스치게 되었다. 그런데 약간 구멍이 나 쌀이 순식간에 새어 버렸다. 당황했지만 바빴다. 그 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그냥 태연하게 지나쳤다. 쌀 뺑소니 사건이다. 쌀 진열 담당 아르바이트생이 아마 욕을 하며 치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쌀은 아마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비용의 한 부분이다.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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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저녁시간이 되었다. 오픈행사이기 때문에 10시까지 영업을 한다. 우리는 시간을 항상 꽉 채우고 퇴근을 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퇴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 일하는 형이 우리를 불러서 특별 미션을 내렸다. 밖에 나가면 한 창고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여러 종류의 박스를 옮겨서 대차(물건을 옮기는 리어카. L카의 진화형으로 훨씬 더 많은 물건을 쌓을 수 있다.)에 쌓아놓으라는 것이었다. 우리 담당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어떤 일도 해야하는 알바생이다. 채소담당 알바생들도 함께 힘을 보태서 박스를 옮겼다. 창고는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 거실에 꽉 차있던 박스는 어느새 줄어들고 있었다. 박스의 종류와 크기가 다양해서 대차에 쌓을 때 막무가내로 쌓으면 틈이 맞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크기를 고려해 차곡차곡 빈틈없이 쌓아야 한다. 이걸 잘 계산하는 능력을 일머리라고 한다. 이건 많이 할수록 쌓이는 감이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물건이 쌓아지면 쾌감이 온다. 이렇게 마트 일이 끝났다.


마지막 날인 오늘은 S의 생일이었다. 캔맥주 두 캔을 사서 조촐하게 집에 가면서 한 잔 했다. 그리고 고모를 만나 인사를 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봉투를 주었다. 5일 동안 일한다고 수고했다는 것이다. 난 당연히 돈을 받고 일하는 거였지만 고모가 보기에는 기특했나 보다. 뜻밖의 선물은 언제나 행복하다. 집에 가려고 하는데 H업체 냉동담당 이모가 아쉽다고 잘 가라고 인사를 한다. 더 친해지고 싶은데, 너무 아쉬웠다. 번호를 물어볼까 했지만, 그냥 헤어졌다.


집에 가려고 지하철역에 오니까 2호선 막차시간이다. 아침 첫차를 타고 해운대까지 와서 막차를 타고 퇴근을 한다. 결코 수월하진 않았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웃으면서 일을 했다. 땀은 비오듯 흘렀지만 물건이 대량으로 거래되는 과정을 보며 감탄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다른 마트일을 하게 되면 더 잘 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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