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참 잘 키우셨어요."

by 아름다움

학교 번호로 전화가 왔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걸려오는 학교 전화는 흔치 않다. 게다가 그런 전화는 대개 어디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혹은 보호자가 꼭 알아야 할 일이 생겼을 때다.


벨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학교 상담 선생님이었다.


지난가을쯤부터 서현이의 기분과 전반적인 컨디션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던 아이였는데 서현이 특유의 열정과 활력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말수는 확연히 줄었고, 표정이 가라앉았고, 몸도 예전보다 무거워 보였다. 매주 친구들을 만나 놀았는데 어느샌가 그런 약속도 현저히 줄었다.


워낙 아빠와 사이가 좋은 아이라 남편과도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에게 관심 많은 남편도 이번에는 특별히 달라진 점은 모르겠다는 입장이었다. 사춘기가 되면 그런 경우가 있다는데 그런 증상 중 하나이지 않을까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 사춘기의 한 과정일 수도 있어.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고 하잖아.'

하지만 엄마인 내 촉은 계속해서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특별히 문제 상황이 발생한 게 아니었지만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했다.


‘아이에게 도움이 필요한 시기일지 몰라.’






서현이는 어릴 때부터 차분하고 침착한 편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기보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친구들과 크게 갈등을 겪은 적이 거의 없다. (물론, 모든 아이에게 장단점이 있고, 서현이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구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며, 단짝이 있는 상황을 편안해했다. 감사하게도 매 학년, 같은 반에 단짝 친구가 생겼다.


아이의 다운된 분위기가 몇 주 지속되던 그즈음, 그 친구들 가운데 특히 서현이를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던 친구 A가 몇 달 동안 서현이를 배제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상대 아이의 입장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서현이의 활력이 눈에 띄게 사라졌고, 나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모르고,
“요즘 왜 A랑 안 놀아? 네가 먼저 연락해 봐.”라고 했던 내 말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떠다녔다.


초등 고학년 반은 정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교우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해서, 그 안에 직접 있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이서 지켜봐도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고 한다. 관계의 온도와 중심이 시시각각 바뀌고, 어른이 개입하기에도 조심스러운 영역이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1. 서현이의 마음 들어보기

2. 말하고 싶지 않아 하면 기다리기

3. 조급해져도 아이가 먼저 꺼낼 때까지 지켜보기

4. 서현이를 오랫동안 지켜봐 오던 어른들에게 변화가 느껴지는지 물어보기

5. 도움이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돕기 (단,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때 학교 상담실이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의견은 다양했지만, 제삼자에게는 오히려 마음을 편히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상담 선생님께 연락해 상담을 신청했고, 신청하게 된 배경과 아이의 성향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서현이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가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서현이가 정말 많이 좋아졌는데, 어머님도 느끼시는지요.”라는 말과 함께 전화가 온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나도 느끼고 있었다. 서현이가 다시 예전처럼 활기차고, 에너지가 살아나고 있다는 걸. 그래서 정말 기뻤고, 선생님께 마음 깊이 감사했다.


“어머니, 서현이는 참 잘 자라고 있어요. 잘 키우셨고요. 아시겠지만 기질 자체가 순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열의도 있고 끈기도 있는 아이예요. 물론 순한 기질의 아이를 키우는 것도 쉬운 건 아니죠. 하지만 누가 봐도 서현이는 잘 자라고 있고, 부모나 선생님을 크게 힘들게 하지 않는 아이예요."



"어머니, 참 잘 키우셨어요."

선생님의 이야기에 나는 왜인지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그 말이 너무 오랜만에 나에게 건네진 위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도 내가 울고 있다는 걸 눈치 채신 것 같았다.

"아이에게 적절한 관심과 사랑을 주면서,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부모님, 흔치 않아요. 그래서 서현이가 이렇게 잘 자라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한테 참 미안한 요즘이었는데, 충분하지 못한 엄마인 것 같았고, 늘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말 한마디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잘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봐 주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서현이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주어서, 감사하고 고맙다.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이는 혼자서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겪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억지로 건너뛰지 않고, 아파할 만큼 아파하며 지나왔다. 이 경험으로 서현이는 한 뼘 더 자란 것처럼 보인다.

사람 관계가 늘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 마음을 지키는 방법은 분명 있다는 것,
그리고 절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그 과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해 낸 아이가 대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