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사고로 국제개발 들여다 보기
국제개발 분야가 워낙 광범위하고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만큼, 정말 다양하고 다채로운 프로젝트들이 존재합니다. 이 다양함 속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프로젝트 단위로 국제개발의 활동과 개입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제안하는 것에서부터 평가하고 레슨런을 발굴하여 새로운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것까지의 과정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또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사업을 기획할 때부터 모니터링하고 평가할 때까지 함께 해야 하는 PDM(Project Design Matrix)입니다. 문제/목표나무나 변화이론들도 마찬가지이구요. 기금을 확보하기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는 단계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들인데요. 매번 PDM, 문제/목표나무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가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
물론, 여러 복잡한 상황과 관계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작업들은 필요합니다. 특히 나의 제안서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 복잡성들을 논리적이면서도 가능한 심플하게 풀어내는 작업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심플함을 만들어 내는 작업이 우리의 근본적인 시야와 사고까지도 좁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 대상 지역과 참여자들은 우리가 단순화시킬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 내에서 존재하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상황들을 너무나 단순화시켜 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곤 합니다. 제안서를 읽는 누군가를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르게 설득하기 위한 작업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모니터링과 평가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마저 4X4의 테이블 안에 갇혀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그 복잡성과 예측불가의 상황들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 결과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의 상황과 프로젝트를 기획할 당시의 상황은 너무나 다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인과의 관계를 연결지어 놓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예측한대로만 상황은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혹은, 예측한대로 흘러간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들이 도출될 수도 있습니다.
기후변화, 질병, 분쟁 등과 같이 예측불가의 변화들이 더욱 잦아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예측 불가한 위기 상황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고,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가장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국제개발 프로젝트의 주요 대상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개발 주체들이 대상 지역과 참여자들의 상황을 더욱 다차원적이고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스템 사고(Systems Thinking)라는 개념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시스템 사고는 대상을 부분으로 나누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와 관계의 측면에서 세상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소개됩니다.
출판사 힐데와소피에서 출판한 '사회 변화를 위한 시스템 사고'의 책 소개에는 시스템 사고를 '기후변화, 국제 분쟁, 불평등과 같은 국제적 차원, 조직 경영과 도시 개발과 같은 국가적 차원, 이웃 간의 갈등과 같은 개인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문제를 다루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도구로 세계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올 2월, 영국 IDS(Institute of Development Studies)에서는 'Systems Thinking and Practice: A guide to concepts, principles and tools for FCDO and partners(https://www.ids.ac.uk/publications/systems-thinking-and-practice-a-guide-to-concepts-principles-and-tools-for-fcdo-and-partners/)'라는 자료집을 발간하였습니다. IDS라는 세계적인 국제개발 분야 연구소에서 영국 국제개발분야에 시스템 사고를 적용하기 위한 자료집을 냈다는 것이 여러모로 흥미로워 자료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본 자료집은 영국의 국제개발청(DFID, 현재는 FCDO로 통합)의 주관으로 진행된 Knowledge for Development(K4D) 사업의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본 자료집에는 시스템 사고의 개념, 관점, 중요성과 더불어 시스템 사고를 영국 FCDO의 국제개발 관련 활동들에 적용시키는 방법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시스템 사고의 기본적인 정의와 관련 개념들을 소개하고, 시스템 사고를 국제개발 활동 과정에서 적용할 수 있는 도구(tool)들까지 제시합니다. 또한, 굉장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FCDO와 파트너기관들 간의 협력관계에서 시스템 사고를 적용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들과 그 극복방안들까지도 이야기합니다. 극복방안이 매우 구체적일 수는 없었으나, 정부 ODA기금을 기반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매우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이 자료집에서 소개하고 있는 시스템 사고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국제개발 분야에 적용할 수 있을지를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저의 생각을 함께 담기 보다는, 가능한 자료집에 표현된 내용들을 그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 불확실성, 격변성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일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어느 순간이든 변화할 수 있고 기후변화와 같은 외부적 위기 상황들도 점점 더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제개발 분야에서 이루어 놓은 혹은 목표하고 있는 것들도 그 위협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의사결정, 거버넌스와 조직문화는 기존의 직선적, 규율적, 환원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고 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에서 어떻게 경제・보건・교육・식량 등의 분야가 균형적이고 지속가능하고 회복탄력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시스템 사고는 국제개발 주체들이 세계의 다이나믹, 불확실성, 복합성을 이해하고, 국제개발 활동과 개입들이 사회정치적인 복합성과 비예측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며 긍정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자료집에서는 시스템 사고와 실천(Systems Thinking and Practice)의 주요 의미를 아래와 같이 6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 통합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 (전체 시스템을 보는 것)
・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만드는 주요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받아들이고, 적응적이고 유연하고 교훈학습을 기반으로(learning-oriented) 일하는 것
・ 다양한 사람과 집단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시스템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을 인지하는 것
・ 시스템의 회복탄력성과 적응력은 강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분권화된 의사결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 다제적이고 다분야적으로 일하는 것
여기서 이야기하는 시스템은 상호연관적이고 상호의존적인 다양한 요소들의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 신체의 각 부분이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서로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시스템도 이러한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입니다. 인간의 시스템은 조각들로 나누어 떼어놓을 수 없고 함께 상호작용하며 존재해야만 그 기능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의 특성을 이해하며 사고하는 시스템 사고는, 시스템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사회, 조직, 제도 등)의 상호연관성을 이해하고,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동시에, 다양하고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도 시스템 사고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관심의 경계를 너무 좁게 설정한다면 근본적인 원인보다는 드러난 결과에만 치중할 수 있고, 너무 넓게 설정한다면 너무 광범위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의 특성으로 '복잡성'이 반복해서 언급됩니다. 시스템은 단순하고 명확한 상태(낮은 복잡성)로 존재할 수도 있고, 매우 복잡하고 격변하는 상태(높은 복잡성)로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즉, 복잡성도 그 정도에 따라 단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많은 개발 프로젝트들은 단순하고 명확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매우 복잡한 상황에도 적용하려는 실수를 자주 범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좋은 전략과 활동들은 단순하고 명확한 상황에서는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지만, 매우 복잡하고 격변할 수 있는 환경에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합한 해결방법과 활동은 무엇인지 사전에 정의하고 이를 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변화가 적은 단순한 상황에서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변적이고 복잡한 상황에서는 이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지식, 경험과 기술들을 어떻게 변화한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따라서, 시스템 사고를 사회변화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흐름 변화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계획에서부터 교훈 학습으로'의 변화입니다. 사회가 변화할 때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응적이고 유연하고 반응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물론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계획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쭉쭉 뻗은 직선처럼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양한 아이디어와 옵션들을 수행하면서 그 효과와 영향들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무엇이 계획대로 작동하고 무엇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학습하고 반영하려는 노력들이 더욱 중요해 지고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많은 기관들이 여전히 교훈학습 및 반영보다는 계획을 수립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목표설정에서 방향성으로'의 변화입니다. 변화시킬 수 없다면 측정할 수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셀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중요한 것은 아니며, 중요한 모든 것이 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는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데에 있어서 질적(qualitative)인 접근법의 더욱 적극적인 활용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자료집에서는 '벡터 기반 타겟(vector-based targets)'을 소개합니다. 벡터기반 목표치 설정은 복잡한 시스템 내에서 성과기반(outcome-based) 타겟의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한 접근법입니다. 벡터기반 접근은 성과 및 결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치까지의 속도와 방향을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즉, 계속해서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추구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러 길과 방법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게 합니다.
셋째로, '중앙 집권적에서부터 공동 책임성으로'의 변화입니다. 사회 시스템의 복잡성과 다이나믹함에서 수직적인 조직 구조의 명령과 통제 기능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수많은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 세계에서 모든 요소들을 중앙집권적인 구조에서 이해하고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각 개인 주체들이 시스템의 여러 변화를 이해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변화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공유한다면 이는 각종 변화에 대응하고 유익한 사회변화를 만드는 데에 유용할 것입니다.
본 보고서에서는 시스템 사고에 필요한 두가지 이론을 함께 소개합니다.
첫째는 변이 이론(Transition Theory)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인간은 지속적인 사회와 기술 분야의 변화를 겪어 왔습니다. 말과 마차를 타던 시기에서 석탄 연료로, 이제는 석탄 연료에서 재생에너지의 시대로 전환되고 있는 현재가 변화의 예 입니다. 어느 시대의 시장, 과학, 문화, 기술, 정책, 산업 등 기존의 제도・체제는 특정한 그룹의 권력을 통해 유지되고 고정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화석 연료에서 재생에너지가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되듯이, 시간이 흐르고 사회적・환경적 상황이 변함에 따라 기존의 제도・체제 역시도 점차 그 단단함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그 변화에 적합한 혁신들은 항상 일어나기 마련이고, 점차 그 영향력이 확산되며 기존의 제도・체제를 변화를 주게 됩니다. 변화하는 상황과 새롭게 일어나는 혁신들, 이 두가지가 우리의 제도・체제를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진화시키는 요소입니다.
제도・체제가 계속해서 변화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예측하고 그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것이 장기적인 결과들을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변화한 상황에 적합한 혁신에 투자하고 지원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 성공적인 투자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도 매우 필요합니다. 또한 혁신을 발견하고 확산하기 위한 과정을 지원하는 것이 보다 중요합니다.
두번째 이론은 벡타 기반 변화이론(Vector-based Theories of change)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전략과 프로젝트 설계 방법은 목적, 목표, 성과 등을 규정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연결시키고 측정 가능한 구체적인 성과들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로그프레임이 가장 대표적인 이러한 결과기반 관리의 예입니다. 이 모델들은 직선적인 논리구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명확하고 단순한 상황에서는 유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복합적인 개발과 외교의 상황에서는 실용적이지 못하고 효과적이지 않은 접근방법입니다. 상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직선적이고 예상가능한 방향대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벡터 기반 변화이론은 이 복잡한 시스템 내에서 개입을 계획하고 관리하는 데에 유용한 대안 접근법입니다. 벡터 기반 변화이론의 주요 특징들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벡터 기반 변화이론의 특징들은 모니터링, 평가와 학습의 과정에서 중요한 함의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 불확실성 내에서 다양한 가능 시나리오들을 탐구하는 것
・ 이해관계자들의 가치와 관심 영역에 부합하는 미래를 조사하는 것
・ 긍정적인 변화의 방향을 넓은 범위에서 설정하는 것
・ 비현실적인 변화를 그리기 보다 현재의 상황에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현실적인 기회를 찾는 것
・ 개입 방법과 방향을 조정하기 위해 변화하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평가하는 것
・ 복잡한 시스템이 발전해온 방법과 같은 맥락에서 구조적인 개입을 설계하는 것
이어서 시스템 사고와 실천이 영국 FCDO의 주요 5개 사업 과정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정리했습니다.5개 주요 과정은 맥락 분석(context analysis), 프로그램 사이클, 국제 정책개발, 연구・분석 및 평가, 위기 대응으로 구성됩니다. 이중에서 인상깊었던 몇몇 내용들을 정리해 봅니다.
1) 맥락 분석
개발 전략과 정책을 만들거나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위기 상황을 대응할 때 상황과 맥락을 분석하는 것이 그 시작점입니다. 개발과 관련된 개입을 준비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영향과 변화가 드라마틱하게 증가하는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하지만 상황과 맥락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꾸준히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시스템 사고의 관점에서 현재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가장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재검토해야 합니다.
맥락 분석을 위해 본 보고서에서는 몇몇 도구(tool)들을 제시해 줍니다. 국제개발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종사하는 분들은 많이들 아실 이해관계자 맵핑과 분석, 문제나무, 변화 이론 등이 그 예입니다. 뿐만 아니라 rich pictures, causal loops diagrams 등 보다 입체적이고 다양한 상황과 맥락들을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도구들도 함께 제시해 줍니다.
2) 프로그램 사이클
프로그램 사이클은 국내에서 흔히 알려진 Project Cycle Management(PCM)의 그 사이클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프로그램의 전략수립과 기획에서부터 모니터링과 평가에 이어지기까지, 국제개발의 프로그램은 일정한 사이클 내에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프로그램에의 투자는 하달식이고 직선적이며 미리 결정된 지표들을 사용하고 위험 감수를 최소화하는 결과중심의 관리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국제개발 프로그램에의 투자는 두가지의 도전과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프로그램의 성공 혹은 실패를 결정하는 모든 요인들을 모두 고려한 채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혹여나 모든 성공과 실패의 요인들을 고려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속해서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상황과 맥락은 기획 초기에 설정한 논리적 흐름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고 현재 기준에 맞지 않는 것들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이어서 보다 현실적인 도전과제들이 언급됩니다. 영국의 FCDO도 (한국의 KOICA와 마찬가지인 것처럼) 다양한 국제개발 프로그램 수행 파트너들과 계약을 맺고 원조 활동을 대상국가에 제공하게 됩니다. 그 계약 내에는 파트너기관이 달성해야 하는 결과와 성과들을 포함하는데, 시스템 사고를 통해 이해하는 우리의 현실을 계속해서 변화하는 복잡한 구조이기 때문에 지원기관과 파트너기관 간의 계약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아주 명쾌한 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파트너들 간의 좋은 관계와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투자자들과 수행기관 간의 지속적인 참여와 대화가 중요합니다. 조금은 구체적인 또하나의 대안으로 포트폴리오 접근법(Portfolio approach)이 있습니다.포트폴리오 접근법은 각각의 투자와 프로그램의 성공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포트폴리오의 성공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각각 개별적으로 분절화되어 진행되는 프로젝트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를 포트폴리오로 묶고 이 전체적인 목표 달성을 더 큰 목표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프로젝트들은 기대했던 성과들을 달성하지 못할 수 있지만 같은 포트폴리오 내에서 연계된 또다른 프로젝트의 성공이 다른 실패들을 보완해 주고, 결국 가장 상위에 위치한 전체 포트폴리오의 목표는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유연한 계약구조, 융통성있는 관리 체계, 정치적 리더들과 대중들의 소통 등을 전제로 합니다.
포트폴리오 접근법과 더불어 교훈학습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는 M&E에 있어서 단순히 계획 대비 산출물과 성과들을 점검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가 전체적인 포트폴리오의 목적 달성에 어떻게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점검결과를 반영해야 합니다.
이는 프로젝트의 단기적인 목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보다 상위 단계에서의 목적과 목표를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이해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계획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과 목표 달성 실패에 대해 지적하기 보다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며, 교훈을 학습하고 이를 반영하는 문화가 더욱 장려되어야 합니다.
3) 연구, 분석 및 평가
연구, 분석 및 평가의 부분에서도 같은 맥락에서의 이야기들이 계속 됩니다. 시스템 접근법은 세계의 다이나믹함에 대해 보다 깊고 넓게 이해하고 인지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는 다학제적인 연구 전략을 요구합니다.
M&E 지표들은 종종 미리 정의되고, 후원자들의 욕구에 맞춰져 있고, 하달적인 성격을 지닙니다. 하지만 시스템 접근법은 장기적인 구조적 영향을 고려하고, 의도된 혹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고려하며 잠재적 위험요소들을 파악합니다.
가장 마지막 장에서는 시스템 분석을 시작하기 위한 도구(tool)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이해관계자 분석, 문제나무, 변화이론도 포함하고 있지만, 보다 다양한 도구들을 통해 상황을 입체적이고 깊이있게 분석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도구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영국 IDS가 발간한 'Systems Thinking and Practice'라는 자료집의 내용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내용은 가능한 있는 그대로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들은 최대한 배제한 채 내용을 정리해 보았는데요. 실 자료집 내에는 더 많은 내용들과 예시들이 함께 설명되어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한번 자료집 원문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사실 시스템 사고 그 자체도 그렇지만, '시스템 사고'와 같은 관점・접근법에 대해 여러 국제개발의 전문가들이 연구하고 있고 현장에서 이를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해 온 국내 국제개발계의 분위기는, 큰 틀에서의 전략이나 접근법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채 특정 대상 지역과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개별 프로젝트의 발굴과 수행에만 집중하는 분위기입니다. 국제개발의 각 주체들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어떤 전략과 접근법으로 대상 지역과 참여자들을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사실 너무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개발 철학이 부재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이들이 우리보다 가난하다', '도와주어야 한다' 등의 단순한 시혜의 마음으로 국제개발의 일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깊숙하게 대상 지역과 참여자들의 삶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구조 속에 있습니다.
A를 해결하기 위해 B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방식의 접근은, 오히려 대상 지역과 참여자들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실행한 것들이 매분 매초 변화하는 복잡한 구조와 상황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PDM과 변화이론 속에 정리한 흐름이 누가 봐도 논리적인 흐름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PDM과 변화이론 속에 다 담지 못한 예측 불가의 상황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이 세상에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사고, 위에서 보신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상식 선에서 너무도 기본적인 이야기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기본적인 이야기들을 생략한 채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누군가의 삶에 개입한다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불행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지요.
때문에, 시스템 사고와 같은 보다 넓은 시각으로 국제개발을 바라보는 관점과 접근법에 대한 고민, 연구가 많이 필요합니다. 국제개발 실무자 뿐만 아니라 연구자, 후원자들도 이러한 관점과 접근법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며, 넓은 범위에서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민들을 이 분야의 많은 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