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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학자 J Jun 30. 2017

깃털보다 가볍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우리 시대의 추상> 전의 추상 작품들과 재즈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정교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되는 예술이 있는 반면, 예술가의 직감에 의존하여 순간순간을 쌓아 올리는 예술이 있다. 대성당을 연상시키는 안톤 브루크너의 견고한 교향곡이 전자의 예라면, 액션 페인팅을 통해 무작위로 작품을 만드는 잭슨 폴록의 추상 작업이 후자의 좋은 예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작위적이며 지나친 일반화일 수도 있다.) 물론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그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예술가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초기에 세운 설계도에 의해 작업을 하고, 어느 정도는 설계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직감을 따라 작업을 할 것이다. 어떤 예술 작품에서 예술가 자신의 직감을 따른 부분은 완전한 우연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상자인 우리가 예술 작품으로부터 예술가의 천재성이 반짝이는 순간을 찾는 것은 예술을 향유하는 일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재능이 예술가의 손을 빌어 작품을 낳아낸 순간. 그 순간들에서 우리는 초월의 순간을 엿볼 수 있고, 그 엿봄을 통해 우리는 그 순간에 사로잡힌 포로가 된다.


캔버스를 벗어나고 캔버스로 돌아오라: 오늘날의 추상화

오택관 - <Overlap Area>
추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소재의 자유로움을 차지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자연과 주변 환경으로부터 일시적이자 영구적인 영향력 아래 놓인다. 미디엄의 형태와 질료의 획득 및 활용, 행위의 비가역성 등 제작 단계에 수반되는 절차 및 단계는 물리, 즉 자연현상이라는 거대한 법칙에 구속을 받게 되고, 완성된 형태(작품)는 공간, 빛, 인간의 감각 등 작품의 존재 가치와 등가를 이루는 '보여짐이라는 행위'를 뒷받침하는 일련의 조건에 종속된다. 
그에 반해 추상의 내적 토대를 구성하는 조형의지는 작가의 관찰과 감정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훨씬 더 사적이고 자유로운 영역이며, 비정형적이고 일관된 규범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는다.
- 챕터투, <우리시대의 추상> 전시 설명 중

지난 5월 27일까지 연남동 챕터투에서 열린 <우리시대의 추상> 전(전시 기간: 2017년 4월 13 ~ 2017년 5월 27일)은 오늘날 젊은 추상화가들의 작품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였다. 위에서 인용한 전시 설명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추상화는 "물리적 조건"이라는 한계를 가짐과 동시에 "사적이고 자유로운" 영역을 가진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사각형 캔버스라는 절대적 구속과 충돌할 때 태어나는 미(美)가 추상회화라는 장르를 규정한다. 오택관 작가의 <Overlap Area> 연작(위 사진)은 그러한 추상회화의 성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오택관의 작품을 보면 구체적이고 기하학적인 남색의 영역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보이는 분홍색의 흐름을 가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오른쪽 그림) 때로는 자유로운 분홍의 흐름이 흘러내려 기하학적인 남색의 영역을 덮어 버리기도 한다.(왼쪽 그림) 오택관의 작품에서 규정과 자유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고유한 미를 만들어낸다.


(좌) 추숙화 - <Synthesis (M13)>, (우) 최선 - <검은 그림>

그런가 하면, 최선 작가의 <검은 그림>은 '추상회화'라는 장르의 규범성 자체를 부수려고 노력한다. 몇 개의 단일한 색조로 화면을 채우는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 식의 색면 추상이나, 숱한 반복적인 패턴으로 거대한 화면을 채우는 한국의 단색화 같은 추상회화들은 회화를 넘어선 숭고한 가치를 의도한다. 예를 들어, (몇몇 평론가들에 의하면) 한국의 단색화는 "노동집약적인 반복이 만들어낸 동양적 초월의 경지"를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검은 그림>이 폐유를 캔버스에 균일하게 발라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기존 추상회화들이 지향했던 초월과 숭고의 가치는 폐유가 상징하는 비루한 일상의 세계로 추락하게 된다. <검은 그림>의 미는 스스로 추상회화에 속하면서 스스로가 속한 추상회화의 전통적 가치를 공격하는 자기 역설로부터 태어난다.


순간과 순간을 이어 만들어진 음악

Keith Jarret - <The Köln Concert Part 1>

즉흥연주는 재즈를 상징하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즉흥연주는 어떤 음악 전통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재즈에서 유독 즉흥연주가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은 초기 재즈 연주자들이 악보를 볼 줄 몰랐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재즈 역사의 초창기 때, 재즈 연주자들은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의 음악적 재능에 의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악보를 보기보다는 스스로의 감정이 이끄는 즉흥연주를 위주로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악보나 화성학이 요구하는 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고, 즉흥연주로부터 발생되는 재즈의 자유로움과 연주자들 사이의 긴장이 재즈의 매력이 되었던 것이다. 


재즈 역사의 여명 속에 태어난 즉흥연주의 전통 속에 후배 연주자들은 음악적 성취로 여러 봉우리들을 쌓았다.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 또한 즉흥연주에 능한 연주자였는데, 그의 1975년 공연 <The Köln Concert>은 키스 자렛이 즉흥연주를 통해 도달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일 것이다. 1975년 독일 쾰른 오페라 하우스에서 키스 자렛은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즉흥 연주로 채웠다. <The Köln Concert>에는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공연 당일 키스 자렛은 허리 통증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만성피로로 인하여 최악의 컨디션이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요청한 피아노는 제시간에 공연장에 도착하지 않아, 다른 피아노를 써야 했는데 그 피아노는 고음부 음색에 문제가 있는 피아노였다고 한다. 추상화가들이 사각형 캔버스와 같은 물질적 제약 아래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키스 자렛 또한 편치 않은 자신의 육체와 고음에 문제가 있는 피아노라는 제약 아래에서 음악을 연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 Köln Concert>는 재즈 즉흥연주의 역사 속에 가장 아름다운 연주로 기억되고 있다.


벗어남과 돌아옴 사이

추상 회화가 캔버스라는 물리적 제약에 의해 구속받으면서도, 그 내용에서는 무엇보다 자유로운 즉흥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처럼, 재즈 또한 화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자유로운 멜로디와 리듬을 탐구한다. 규칙 또는 제약에 대한 벗어남과 돌아옴 사이의 긴장에서 추상 회화나 재즈의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어딘가에 뿌리를 두지 않은 자유는 시간과 공간 속에 흩어져 사라질 뿐이며, 어딘가에 묶여 있을 뿐인 예술은 마당에 묶여 있는 애완견처럼 목줄이 허락하는 동심원 내에서 같은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추상 회화나 재즈는 지나치게 자유롭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제약적이지도 않는 예술의 전형이다. 


나는 삶의 모든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뭘 하든. 무엇을 입든.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이나, 당신이 어떻게 말하는지도. 당신의 미소와 성격도. 당신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꿈꾸든. 당신이 차를 마시는 방법도. 당신이 집을 어떻게 꾸미는지도. 아니면 파티도. 당신의 장바구니 목록도. 당신이 만드는 음식도. 당신의 글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그리고 당신이 느끼는 방법도. 삶은 예술이다.
I think everything in life is art. What you do. How you dress. The way you love someone, and how you talk. Your smile and your personality. What you believe in, and all your dreams. The way you drink your tea. How you decorate your home. Or party. Your grocery list. The food you make. How your writing looks. And the way you feel. Life is art.
- 배우 헬레나 보넘 카터


어쩌면, 추상 회화와 재즈가 보여주는 벗어남과 돌아옴 사이의 긴장은 우리 삶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헬레나 보넘 카터의 말처럼 우리 삶을 예술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 또한 벗어남과 돌아옴 사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벗어날 것이고,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그것은 각자에게 남겨진 물음일 것이다.



[1] 키스 자렛의 연주에 대해 읽어볼 만한 글들은 다음과 같다: <완벽한 연주는 정말 가능할까?><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The Köln Concert><The Köln Concert – Keith Jarrett (ECM 1975)>, <피아노 즉흥 연주의 신기원 - 키스 자렛(Keith Jarr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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