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학자 J Jan 17. 2019

실패에 성공한다는 것

<카우보이 비밥>과 상실에 대하여

1990년대 중후반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에반게리온>이나 <공각기동대>처럼 애니메이션 역사에 고전으로 남을 작품들이 여럿 만들어졌던 시기였다. 와타나베 신이치로(渡辺 信一郎) 감독의 <카우보이 비밥>도 그 '좋았던 옛 시절' 만들어졌던 명작 중 하나이다. <카우보이 비밥>은 21세기 후반 우주여행이 자유로워진 시대에 우주선 비밥 호를 타고 현상수배범을 쫓는 현상금 사냥꾼을 다룬다. <카이보이 비밥>의 장르는 SF이지만, 그러한 장르적 특징이 극을 이끌고 가는 중심축은 아니다. SF는 단지 시대적 배경과 몇몇 에피소드의 소재를 제공할 뿐 <카우보이 비밥>이 주목하는 것은 무언가를 삶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인물들이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마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비밥, 잃어버린 과거와 자유 사이

<카우보이 비밥>의 네 주인공들

우주선 비밥 호의 멤버들은 모두 하나씩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 있다. 스파이크는 연인을, 제트는 우주 경찰로서의 커리어를, 페이는 자신의 시대 전부를, 에드는 아버지와의 유년시절을 잃었다. 동시에 그들 각각의 육체적 결함은 이러한 상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을 수도 있다. 타인의 눈을 이식받은 스파이크, 인공 팔을 달고 살아가는 제트,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페이, 어딘가 독특한 정신의 에드. 그들은 그렇게 각자가 잃어버린 것을 통해 정도는 다르지만 크건 작건 과거에 묶여 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그들이 모인 비밥 호는 아마도 과거와 현실 사이 어디쯤엔가 위치한 특이한 공간일 것이고, 그들의 직업인 현상금 사냥꾼(작중 "카우보이") 또한 예측 가능한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건실한 직업도 아니다. 


<카우보이 비밥>은 기본적으로 26화짜리 우주 활극이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매 에피소드마다 드러나는 인물들의 행적은 그들이 무언가 잃어버린 인물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페이는 현상금 사냥 등으로 적지 않은 돈을 모으지만 그것을 저축하거나 자신의 빚을 갚기보다는 카지노에서 날리거나 쇼핑을 하는 데에 몰두한다. 그런가 하면 스파이크는 만화 속에서 결코 위험에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안전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위험한 곳이라면 피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찾아가는 식으로 보통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한다.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카우보이 비밥> OST 중 <Piano Black>

우주선의 이름이 '비밥'이라는 것도 하나의 은유다. 재즈의 역사에서 비밥(bebop)은 규모가 큰 빅 밴드 위주의 스윙(swing)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스윙은 보통 정해진 악보를 따르는 연주가 기본이다. 그러나 찰리 파커(Charlie Parker)를 비롯한 비밥의 혁명가들은 그러한 스윙 재즈의 틀에 반발했고, 즉흥연주를 중심으로 재즈의 틀을 바꿨다. 물론 즉흥연주는 완전히 자유로운 연주는 아니다. 그때그때의 감정과 리듬에 맞춰 자유롭게 음을 연주하는 것이 즉흥연주이지만, 그 연주는 결코 정해진 화성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정해진 화성 밖으로 연주가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게 되거나 현대음악의 실험적 시도로 바뀌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즉흥연주를 중심으로 한 비밥은 결국 자유와 규칙 사이에서 끊임없이 다음 음을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카우보이 비밥>의 비밥 호의 승무원들은 그 이름이 제시하는 운명처럼 결국 어딘가에 묶여 있으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그리고 다시 묶인 곳을 향해 돌아올 수밖에 없다. 


실패에 성공한다는 것

"깨어나지 않는 꿈을 꿀 작정이었는데, 어느샌가 그만 깨고 말았어."라는 그의 대사처럼 그에게 현상금 사냥꾼으로서의 삶과 비밥 호에서의 삶은 "깨어나지 않는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우보이 비밥>의 마지막 두 에피소드에서 그는 어느 순간 비밥 호에서의 삶이 결국은 얽매인 과거와 자유로운 미래 사이(화성과 즉흥연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그것이 순간순간 달콤할지라도 비밥 호에서의 삶은 결국 잃어버린 과거를 외면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도피일 뿐이다. 스파이크의 마지막 선택은 깨어나지 않는 꿈을 깨는 대가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것을 치르고 자유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꿈꾸는 사람처럼 위험을 찾았던 그였지만, 마지막 화에서 그가 위험을 찾아 나섰던 것은 이전과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내가 정말 살아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과거에 대한 부채를 갚는 것, 그것이 그가 비밥 호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결정이었다.


결국 <카우보이 비밥>의 마지막 화에서 그는 부채를 갚는 데에 성공하지만 미래로 나아가는 데에는 실패한다 [1]. 하지만 그 실패가 꼭 비참하고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세상에는 성공적인 실패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목숨을 잃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논리대로면 세상의 모든 것은 범속해지고 타락해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켰던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실패에 성공한 이들이다. 크게는 혁명가, 독립운동가, 순교자, 사회운동가들처럼 실패에 성공함으로써 역사를 앞으로 굴러가게 한 이들도 있을 것이고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나름의 성공적 실패를 달성했을 것이다. 물론 <카우보이 비밥>의 성공적 실패가 그들만큼 숭고하고 의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우리가 성공적 실패에 동의하고 감정 이입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비가역적인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깊은 상처는 아무리 아물더라도 흉을 남긴다. 무릎에 난 흉이 두려워서 걷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다. 그저 흉이 거기에 있음을 알면 그뿐이다. 상처를 입은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갈 때, 나아간 자리가 비록 실패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성공적인 실패다.



[1] 결말에서 그가 살아남는지 어떤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극의 분위기나 여러 복선으로 미루어볼 때 스파이크가 마지막 화에서 죽었다는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이 지나간 그 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