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2021년 20권, 매월 1.67권 읽음
올해의 책 : "밝은 밤" (최은영)
뒤늦은 독서 결산인 동시에, 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2021년은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나는 지난여름 한국에 돌아왔다. 어렵게 잡은 기회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미국 생활이었지만, 그동안 늘 바랐던 일이기에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귀국한 뒤로는 반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얼마나 바빴는지, 그동안 외국에 있느라 보지 못 했던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려고 시간을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그동안 이곳에 글을 남기는 것이 어려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던 삶을 드디어 살게 되었다는 기쁨에 모든 순간이 감사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도, 북적북적한 서울 거리도 정겹고 반가웠다.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행복에도 둔해질 테지만, 나는 분명 이 행복의 많은 부분이 행운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의 책은 최은영의 첫 장편 소설 "밝은 밤"으로 꼽았다. 최은영 작가가 그간 단편과 중편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한 문장과 따뜻한 시선은 여전했다. 한 편, 이 작품을 통해 최은영 작가가 긴 장편을 끌고 가는 힘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몰입해서 읽은 소설이었다. 최은영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작가의 작품이 무척이나 서정적이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아름다운 서정성'이 개인의 내밀한 감정에만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에도 시선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 "밝은 밤"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현대로 이어지는 증조모-할머니-어머니-딸 4대의 삶을 그린다. 4대에 걸친 각 인물은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한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최은영의 문장은 네 명의 여인들의 삶과 슬픔을 아름답고 따스하게 그린다. 동시에 최은영은 그녀들을 둘러싼 사회와 역사 또한 예리하게 그린다. 슬픔은 개인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부터 나오지만, 어떤 슬픔도 그를 둘러싼 사회와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최은영의 문학적 성취는 양쪽 모두를 따스한 시선으로 살핀다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밝은 밤"은 훌륭한 페미니즘 문학이기도 하다. 작가는 한반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이유만으로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와 슬픔을 매우 설득력 있고, 위로가 되는 방법으로 그린다. 여성의 수난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밝은 밤"에서 '딸'이 겪는 일 또한 그렇고, 작품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한국 성별 소득 격차의 1/3~1/4 가량은 여성 혐오에 기인한다는 연구도 있다.)
최은영의 소설 이외에도, 사람들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버려진 사람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내가 올해의 책으로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책이다.), 2018년에 돌아가신 황현산 선생이 생전에 남긴 트위터를 모은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내가 늘 좋아했던 작가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 프랑스혁명 속에서 살아간 인물들의 삶을 그린 자크 타르디의 "파리 코뮌", 현대 이론 물리학자들의 절망과 열정을 담은 자비네 호젠펠더의 "수학의 함정" 또한 기억에 많이 남는 책이다.
이밖에 올해는 유독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다. 그동안 나는 '좌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뚜렷한 이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정치는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나에게 정치는 정체성의 문제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그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이 독서 리스트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음습함, 불온함, 반항, 불법의 이미지를 풍겼다. 그러나 최근 10년~2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실패로 인해 현 체제에 대한 의문이 널리 퍼진 반면, 제레미 코빈, 버니 샌더스 (비록 그들이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같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는 정치인들과 노동자들의 기층 운동 덕에 사회주의라는 단어에 씐 부정적인 이미지는 많이 씻겨 나간 인상이다. 비록 세계적인 그 물결이 한국 사회를 빗겨 나간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의 흐름이 결국 어디로 향할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이다.
2021년에 읽은 책 리스트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윤혜정)
레드 로자 (폴 불)
그래픽노블 파리 코뮌 (자크 타르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황현산)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폴 풋, 핼 드레이퍼)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로자 룩셈부르크)
빵의 쟁취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 (폴 애들러)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수학의 함정 (자비네 호젠펠더)
더 푸드 랩 (J. 켄지 로페즈-알트)
러시아혁명 1917-1938 (쉴라 피츠패트릭)
맑스주의 역사 강의 (한형식)
불평등의 이유 (노암 촘스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불평등의 대가 (조지프 스티글리츠)
강력의 탄생 (김현철)
밝은 밤 (최은영)
지난해의 독서 결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