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May 15. 2016

이해라는 오해 _ 영화 「곡성(哭聲)」 리뷰

열 번째 지난주




평가라는 감히


 지난주, 역사라는 모두가 사랑해야 할 존재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대역죄로 TV에 등장하는 소녀들이 지탄을 받는 시간을 공유했다. 사람들은 숨겨 쥔 빨간 펜을 여지없이 흔들어 보이며, 감히 너희들이 그 위대한 이름자를 모르노라며, 그간의 억압받던 분노를 여과 없이 토해냈다. 너는 모르고 나는 안다는 얄팍한 지적 우위와 그 명분으로 기댄 애국심이라는 공동의 대의명분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춤을 추는 것 이외에 아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심연의 기대에까지 부응하며, 결국 정체 모를 사과를 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짧은 소동은 –이라고 표현하며,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반복될 것이다.- 평가하기 좋은 타인에 대한 쉬운 말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평가한다’는 서술어는 ‘감히’라는 부사와 잠재적으로 호응해야 한다. 타인 혹은 타인의 노고로 탄생한 그 무언가에 대해 세 치 혀를 거들겠다는 어쭙잖음은 늘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매체를 예로 들어보자. 영화에 투입되는 수고스러움은 촬영장을 몇 차례 구경한 경험만으로도 쉬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만들고 연기할 사람을 찾고, 일정을 조율하며 장소와 촬영과 음악과 영화관과 홍보와……. 일일이 다 거론하기조차 버거운 온갖 것들의 사태가 개입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에 대해 무엇이라 언급을 하는 행위는 너무나도 조심스럽다. 그런데도 지난주 계속해서 질문을 걸어오는 영화를 만난 탓으로 평가한다.


 아! 감히!




  열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곡성(哭聲)」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지금부터의 내용에는 영화 「곡성(哭聲)」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글을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라는 오해     


 타인이 나의 우주를 나만큼 이해한다는 것만큼 거대한 오해도 없다. 타인이 더 잘 이해하는 자신이라는 것은 없다. 「곡성」을 마주하는 관객도 마찬가지이다. 상영시간 내내 이해했다고 여기지만, 그 이해들의 총합이 결국에는 오해였음을 인지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영화 연출자의 관객에 대한 오해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이 정도면 관객들이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지점에서 여지없이 오해가 발생했다.     




첫 번째 오해 - 관객의 오해


 「곡성」은 재미있는 영화다. 어떤 평가에도 이 사실 하나만큼은 흔들리기 어렵다. 이미 한국인의 기호에 맞음이 증명된 「살인의 추억」과 같은 음산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는 농촌 스릴러인 데다가, 「추격자」와 「황해」를 통해 긴장을 주무르는 솜씨를 인정받은 나홍진 감독이 연출한 작품인 탓이다. 관객은 큰 기대를 품고 영화관에 착석한다. 그리고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장면들 (예를 들면,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의 동료 경찰인 성복(손강국 분)이 외지인의 집에서 유력한 물증을 목격하고도 겁에 질려 그냥 돌아 나오는 장면)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전반적인 내용에의 이해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장면들은 흘러가고, 일광(황정민 분)이 등장하면서 이해는 확신으로 바뀐다. 일광은 종구 가족을 돕기 위해 등장한 인물로 명확하게 이해된다. 물론 훈도시와 같은 짧지만 강한 의심 유발 장치가 등장하지만, 관객에 따라 놓쳤거나 크게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간의 이해들이 거대한 오해일 수도 있다는 의심에 직면한다.


 돌이켜보면, 극 중 장면들은 그 어느 지점에서도 확실하게 일광이 선(善)이며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은 악(惡)이라고 선언한 바 없다.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게끔 온갖 장치를 동원하여 지시하였을 뿐이었다. 일광의 첫 등장에서 장독대 속 죽은 까마귀가 발견되어 외지인의 소행이라고 강력하게 의심해봄 직하지만, 사실 명확한 확증은 없다. 또한, 일광이 살(殺)을 날리는 굿을 행할 때, 외지인이 고통을 받는 것처럼 교차 편집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교차해서 보여준 것일 뿐 일광이 외지인을 향해 살을 날렸다는 확실한 입증은 되지 못한다. 영화 「곡성」은 우리가 흔히 영화를 보는 태도로 앉아있을 때, 스크린에 한 겹을 덧씌워 ‘메롱’하고는 달아난다. 모든 정황을 오해했음을 드디어 이해한 관객은 이 감상을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방황하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이미 영화는 끝이 났고, 옆자리의 사람은 자리를 떴다. 아! 분명히 재미는 있었는데….


* 종구와 일광의 만남



두 번째 오해 – 연출자의 오해          


 「곡성」은 잘 만든 영화다. 나홍진 감독이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중점을 둔 사항이라고 밝혔듯, 점진적으로 긴장감이 상승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의도 ¹ 는 그대로 실현되었다. 감독이 전작인 「추격자」와 「황해」에서 보여준 것 못지않게 스크린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긴장은 관객을 압도했다. 이를 위해 배우들은 열심히 산을 달리고, 또 소리 질렀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연출자의 오해가 발생했다. 바로 ‘잘 만든’ 보다 ‘열심히 만든’에 가깝기 때문이다. 열심히만 달려가는 과정에서 이해가 필요한 지점들이 오해로 둔갑되었다. 적어도 마케팅에서만큼은 상업영화를 표방했음에도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본 영화는 예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불친절을 선사한다. 그 불친절의 여백을 높은 몰입도와 휘몰아치는 긴장감으로 ‘열심히’ 메우고 있지만, 관객 대부분에게는 기운이 소진될 정도의 식겁함 이상을 전하지 못한다. ‘그냥 받아들이라. 나는 열심히 달리겠다.’는 태도에서 조금만 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유를 던져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나의 경우로 무명(천우희 분)에 대한 감독의 이해에 주목한다.  

   

인간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분명한데, 존재가 사라질 때의 이유가 없음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이유는 신과 연관되어 있으니, 신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 당신(神)의 선과 악, 존재 이유가 의심받는 상황인 것 같다.
이 사건에 대한 증명을 해주시길 바란다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엔드라고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는 무명이 이런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곡성」 관객과의 대화 중 나홍진 감독의 답변 (2016년 5월 10일 / 메가토크 메가박스 동대문)     


 감독이 직접 밝힌 무명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무명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도록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한국 토속신앙의 신을 무명의 존재로 생각했다.
곡성이라는 공간에서 촬영한 이유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다들 배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가장 큰 주인공은,
아니 그 이상은 인물의 백그라운드라고 생각한다.
변화무쌍한 자연을 두 시간 동안 본 이후에 천우희(무명)를 만나게 된다.
곡성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토속신앙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 공간의 다양한 날씨와 시간의 변화를 계속해서 백그라운드로 보여드려서 이 분위기가 쌓이다가,
어느 순간에 이 배경을 천우희와 싹 디졸브를 시켜주면,
천우희는 지금까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어마어마하게 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면서 후반에 파워를 극대화시키리라...
하지만 관객은 그 원인을 모르리라….
(하지만) 어마어마한 힘을 인지하리라고 디자인했다.
촬영감독과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 중 하나이다.
그렇기에 골목에서의 종구와 무명의 대립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곡성」 관객과의 대화 중 나홍진 감독의 답변 (2016년 5월 10일 / 메가토크 메가박스 동대문)  


 다시 관객의 입장이 되어보자. 관객이 보기에 무명은 종구에게 돌멩이를 툭툭 던지며 등장하더니,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는 사라졌다. 그리고는 점적으로 띄엄띄엄 등장하다가 가장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수호천사를 자처한다. 감독 본인이 관객도 그 원인을 쉽게 인지하지 못하리라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곡성의 자연과 닮은 존재로서의 무명을 발견한 관객이 얼마나 될까? 신(新)의 존재를 대변할 정도로 중요한 존재에 대해 소극적으로 다룬 이후에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의 등장을 자연스럽다고 표현하는 일은, 지나치게 숨겨두었다는 책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편집된 외지인과 무명의 추격 장면 스틸컷



 영화가 불친절을 견지하며 질주하는 동안 소외된 개연성에 의해서도 이해는 오해로 치환된다. 곡성이라는 배경이 한국의 토속신앙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절한 공간이라는 설명은 불친절함에도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대체 그 악(惡)이 왜 곡성에 온 것인지, 왜 곡성의 사람들이 피해를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가능하지 않다. 납득을 배제한 맥거핀의 향연은 단지 기술적 장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조금 물러나서, ‘피해자의 불행’이라고 하는 것의 무작위성,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의심’조차 불확실하다는 것이 그 자체로 주요 화두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고민해야 할 주제인가에 대한 의문이 야기된다. 복잡한 의문으로부터 달아나 스릴에만 온전히 몸을 맡기려 해도, 고도의 긴장감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 또한 아니라는 인상은 관객에게 명백히 전해진다. 결국 주제의식에의 천착은 불가피하고, 또다시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불친절에 답답함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 반복된다. 결국, 영화관을 찾은 관객에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스릴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영화감상은 롤러코스터 타기가 아니다. 높은 몰입도나 휘몰아치는 긴장감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이해와 오해의 간극


 관객의 입장에서 이해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오해로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연출자의 장점인 긴장감만큼은 극대화되어 관객은 스릴이라는 본전을 얻어가지만, 정작 연출자가 배경으로 삼은 이해의 조각들은 지나친 현혹의 장치들과 불친절한 전개로 고스란히 오해로 되돌아갔다. 이해와 오해의 간극이 단지 관객의 기대를 벗어났다 하여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홍진 감독의 작품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차별화하여 성과를 거두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생략된 채 그저 주어진 것들을 관객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설명의 부족을 주제 자체의 모호성으로 덮고 지나가려는 인상에서 마음의 문이 반쯤은 닫힌다. 여기에 거침없는 질주로 압박하며 끌고 가는 상황은 계속되니, 그저 질주당하는 관객은 극단적 타자화를 경험한다. 바로 「곡성」에 대해 불호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것을 두고 ‘아직 감독이 던진 미끼를 물고 있다.’는 식의 미화된 수사로 쓰인 기사나 평론은 여전히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찌감치 나홍진 감독의 다음 영화를 예매하며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가 맞이한 르네상스를 ‘다양성’으로 해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양한 주제와 시도가 일제히 나름의 작품성을 지닌 채 새롭게 등장하며, 우리나라뿐 아닌 세계의 주목을 유도했다. 하지만 그 이후 오랜 시간 한국영화는 대한민국이라는 존재 속에서 안온하는 길을 걷는다. 이를테면, 애국심을 호소하는 장치, 혹은 반대급부로 위정자를 규탄하며 정치적 동의를 얻는 방편으로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자신만의 색채로 무장한 나홍진이라는 감독의 등장은 적지 않은 기쁨을 선사했다. 비록 「곡성」을 통해 자신의 질문을 자신의 방식으로 유감없이 세상에 던진 과정에서, 필자와 같은 일반 대중과의 마찰음이 들리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겨우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연출작임을 상기한다.   

  

 어둠 속에서 내뿜던 2시간 30여 분의 불빛도 전체의 생에서 맞이하는 빛들의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에도, 상영시간을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더없이 많은 고민의 시간을 허락한 「곡성」에 감사한다. 그리고 서두에 기술한 스포일러 경고를 무시하고 본 글을 읽어주신 분들에게, 명백히 재미있고 생각할 지점까지 던지는 영화 「곡성」을 반드시 감상하실 것을 권한다. ‘감히’가 아닌 ‘확신’으로!



*** 「곡성(哭聲)」촬영현장에서의 나홍진 감독







참고     


¹ 네이버 무비토크 「곡성」 중 나홍진 감독 답변 인용
   tvcast.naver.com/v/854689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곡성(哭聲)」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news.joins.com/article/19936598    

 

*

Daum 영화 「곡성(哭聲)」 스틸컷, 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4000     


**

[중앙일보 _ 매거진 M]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을 읽는 세 가지 시선…②김봉석 영화평론가
 news.joins.com/article/20024272     


***

[중앙일보 _ 매거진 M]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을 읽는 세 가지 시선…③장성란 기자
 news.joins.com/article/2002427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