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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Aug 14. 2016

기억의 터널 _ 영화 <터널> 리뷰

스물세 번째 지난주




기억이라는 작용


 기억하다. 이것은 지적 존재인 인간이 과거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같은 기능이 작동하는 방식 속에서 중요한 단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지이다. 모든 기억은 인지를 선행한다. 단순 암기조차도 어느 개인의 기억으로 자리 잡기 이전에, 기억의 주체가 저장하기 좋은 방식으로 인지됨을 우선한다.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개인마다 상이한 인지의 산물이며, 따라서 같은 대상에의 기억도 다르게 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누구나 편리하게 인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지함에 있어 가장 적은 에너지를 들일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은 바로 유형화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기억함에 있어 대상이 되는 사람의 외모 특성이라든가, 장기(長技), 소유한 것 등 특정 대상으로 우선 인지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는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데, ‘운동을 잘하는’으로 기억될 수도 있음이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영화를 볼 때도 우리가 기억한 기존의 몇 가지 단서를 늘여놓고, 닮음과 다름을 찾으려 한다. 당연히, 결론으로서의 감상도 이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주,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이 개봉했고, 이미 관객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지의 유형들로 바라보고자 한다.



※ 스물세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터널>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이 글의 내용에는 영화 <터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터널>을 둘러싼 기억 셋



기억 하나. 연출자의 전작(前作)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성훈 감독의 이전 작품은 <끝까지 간다>이다. 배우들의 열연에 더하여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재미와 스릴, 그리고 흥행까지 함께 잡은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공유된 기억은 차기작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기대치를 반영하듯, 개봉 5일 만에 200만이 넘는 관객이 ¹ 한 남자의 처절한 생존기를 지켜봤다. 전작이 워낙 촘촘하게 짜인 긴장의 연속이었기에 <터널>에서도 그와 같은 연출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감독은 이를 비웃듯 전혀 다른 전개의 영화를 들고 나왔다.


* 김성훈 감독의 전작 <끝까지 간다> 포스터


 <터널>은 <끝까지 간다>를 바라보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요구한다. 더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다. <끝까지 간다>가 시종일관 관객의 멱살을 잡고 끌고 다녔다면, <터널>은 어디로 끌려갈 수조차 없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갑갑함을 그저 공유하게 한다. 여기에 관객에게는 터널 밖 세상의 답답함까지 온전히 전해져, 어찌할 수 없음의 정도를 드높인다. 하지만, 무기력만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극단적인 제약은 역설적으로 터널 안과 밖이라는 세계의 분리를 일으키며, 문제를 세상 전반으로 확장시킨다. 한 생명을 두고 벌어지는 가치 판단을 따라가며, 관객은 어느새 판단의 주체로 소환된다. 따라서 <끝까지 간다>에서 긴장을 최고의 무기로 전개를 주도하던 방식은 비록 <터널>에서는 그 시도조차 할 수 없었으나, 대신 한 사람이 지니는 상황이 바깥세상과 마찰을 일으키며, 결국 더 넓은 세계로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다. 한 감독의 연속적인 필모그래피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극적인 변화이다. 결국, 연출자의 전작에 관한 첫 번째 기억은 대중의 편리한 인지를 깨뜨리며, 이 영화를 봐야 할 명분으로 작동한다.




기억 둘. 직전에 본 한국 재난영화


 <터널>이 개봉하기 얼마 전 또 한 편의 한국 재난영화가 관객들을 찾았다. 바로 <부산행>이다. <부산행>은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이라는 잣대로는 매우 희박하지만, 영상물의 소재로 이미 관객에게 친숙한 '좀비'를 등장시켜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좀비에 쫓겨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달리는 동안, 이제는 한국 재난영화의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어버린 ‘정부의 무능’은 <부산행>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된다. 그런데, 워낙 비현실적인 재난이기 때문일까? 영화의 중간중간 등장하는 위기대응 능력의 부재는 영화의 무대를 부산행 기차 안으로 한정시키기 위한 도구로만 작용할 뿐, 극의 전개를 위한 능동적 소재가 되지는 못한다. 그런데 부차적인 메시지치고는 그 등장의 빈도가 제법 잦다. 좀비 보러 갔다가 더 좀비 같은 현실만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고자 하는 바는, 메시지 간의 균형 감각이다. 좀비 정도면 그 자체만 좀 더 가지고 놀아도 좋았을 일이다.


** <터널>보다 먼저 개봉한 <부산행> 포스터


 반면, <터널>에서의 컨트롤타워의 부재 혹은 무능은 터널 속의 존재인 이정수(하정우 분)의 목숨과 직결된다. 정부의 헛발질은 구조대장 대경(오달수 분)의 헌신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갑갑함을 더한다. 하지만, 이 갑갑함이 영화 자체에 대한 압박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비결은 바로 놀랍도록 정교하게 배열된 메시지들의 균형 감각에 있다. 감독이 직접 밝힌 바 있듯, <터널>의 가장 주된 메시지는 ‘생명’에 관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생명을 대해는 태도와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하부에 놓이며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 메시지는 다음의 4가지로 읽힌다. ‘이정수의 생존 노력과 대경의 헌신’, ‘정부의 헛발질’, ‘여론의 악화’, 그럼에도 ‘희망’이 그것이다. 그런데 <터널>에서는 각기의 메시지가 하나하나 저울에 올려놓고 잰 듯 빼어난 균형을 보여준다. 이 균형미의 최대 성과는 단 하나의 인지로 이 영화를 기억하게 하지 않음에 있다. 그 누구도 <터널>을 감상한 이후, 생명의 존엄만을 다룬 작품을 봤다거나, 반(反) 정부 영화를 보았다고 단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개별 소재에 일방적으로 이끌려가지는 않는다. 그럼으로써 한 편의 영화로 완성미까지 획득하였다. 박수를 보낼만한 부분이다.




기억 셋. 다시 세월호


 정도에 따라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신호등의 파란불과 빨간불과 같은 것에 지겹다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주로 다니는 동선상의 신호등이 자주 고장을 일으키면, 그 상황 자체가 지겨울 수는 있다. 가벼운 접촉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면, 짜증 섞인 싫증이 일어남은 당연하다. 하지만, 신호등과 관련된 모든 것이 부조리의 집산으로써, 결국 하나의 거대한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신호등은, 비록 지극히 나쁜 의미지만, 우리의 생활과 같은 수준의 영역으로 두어야 한다. 삶과 관련된 것이 싫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세월호 역시 결코 지겨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0일째이던 2014년 7월 24일, 당시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은 세월호 침몰 사고를 ‘교통사고’에 빗대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² 제법 시간이 지난 발언이지만, 다시 반론한다. 명백히, 세월호의 침몰은 하나의 교통사고가 아니다. 교통재난 전문가인 아베 세이지 일본 간사이대학 교수(사회안전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월호의 침몰은 “조직 사고(Organizational Accident)”이다. ³ 시스템의 오류가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신호등의 일시적 오류로 인한 교통사고가 아닌, 신호등과 연결된 모든 관계망이 각기 어긋나, 거대한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발생한 “조직 사고”인 것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세월호를 언급하는 것은 영화 <터널>로 이어지는 기억의 터널 중 하나는 분명히 그 배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현재 진행형인 그 비극이 단순한 영화적 소재로 소비되고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직접적 연결을 부각하는 것에 대한 염려”를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굳이 연결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여전히 그 아픔 속에 있으며, 영화의 풍자 역시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힌다.⁴ 사실 감독의 의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의 인지이다. 불과 두 해 전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터널>은 영화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이 같은 연상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구조(構造)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한 척의 배도, 한 방울의 바닷물도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가 쉽게 세월호를 떠올릴 수 있음은, 우리가 세월호의 침몰을 구조적인 비극으로 인지하여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정수의 매몰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닌 것처럼……. 









그리고 희망


 일제 식민지 시대 이 땅의 시인들은 절망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희망을 노래했다. 공식처럼 마지막 연을 수놓던 희망의 노래들은, 마침 근일(近日) 앞으로 다가온 광복절과 무관할 수 없다. 영화 <터널>도 희망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물론 우리의 기억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노래해야 함을 영화 <터널>은 한 줄기의 빛처럼 보여준다. 우리의 삶이 영화에서처럼 해피엔딩을 수는 없어도, 영화가 작은 위안이자 희망의 증거가 되길 바라본다.


****





참고

¹

 - 뉴시스, 이재훈 기자, 2016년 8월 14일 자, “'터널', 개봉 5일 만에 200만↑… 한국영화, 흥행대결”

 - 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60814_0014322450&cID=10601&pID=10600


²

 -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서보미 기자, 2014년 7월  24일 자, “"새누리당의 기본입장은 '세월호=교통사고'"”

 - huffingtonpost.kr/2014/07/24/story_n_5615873.html


³

 - 한겨레 21, 박상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존엄안전위원회 위원, 제1057호, “세월호는 ‘조직 사고’다”

 - 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9328.html


 - 오마이스타, 이선필 시민기자, 2016년 8월 11일 자, “"영화 <터널> 만들면서 세월호·박근혜 생각 안 했다면 거짓말"”

 - 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w.aspx?CNTN_CD=A0002234368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무비 라이징, 최재필 기자, “무너진 터널에 갇힌 하정우 [터널] 2종 포스터 공개”

 - magazine2.movie.daum.net/movie/37572


*

 - 나무 위키 “끝까지 간다” 항목

 - namu.wiki/w/끝까지%20 간다


**

 - 조선닷컴, 유지한 기자, 2016년 7월 24일 자,“영화 '부산행', 명량도 제쳤다... 역대 최단기간 400만 돌파”

 -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24/2016072400283.html


***

 - 오마이스타, 김준수 시민기자, 2016년 8월 13일 자, “세월호 생각나는 <터널>, 이런 장면은 정말 탁월”

 - 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3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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