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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Nov 06. 2016

노무현들 _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리뷰

서른다섯 번째 지난주




애를 태우며 오는 기억


 어떤 기억은 속을 갉아먹으면서 온다. 흔히 ‘속이 썩는다’ 거나, ‘애가 탄다’로 표현되는 말들은 기억이 기어 올라오며 할퀴는 자국들을 이름한다. 특히 ‘애가 탄다’는 말의 ‘애’는 창자(소장과 대장)와 간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었단다. 복잡한 심경을 강조하기 위해 간장(간)을 덧붙여 ‘애간장’으로 쓰이는 용례도 이와 관련한다. 따라서 ‘애가 타다’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장이 타들어 갈 만큼 걱정스러운 심리상태’가 된다. ¹ 그런 기억이 있다. 잘 덮어두었는데, 그 어떤 작용에 의해서 건 창자를 역류하여 올라오는 기억. 지난주, 이 기억을 덮어둔 뚜껑을 굳이 열어젖힌 한 편의 영화를 접한 바, 소개한다.




※ 서른다섯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는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리뷰 글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로, 스포일러에 대한 부담이 적은 것이 사실이나, 영화에 대한 그 어떤 사전 정보도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노무현을 기억하는 방식


 2009년, 봄과 여름의 경계 어디쯤이었다. 서울역 앞에서 조문록을 받을 때, 시청 앞에서 운구차를 향해 뒤꿈치를 들었을 때, 심지어 대한문 앞에서 주저앉아 있을 때조차, 나는 휘청거렸다. 차고 넘쳐버린 울분은 기력이라는 것이 불분명해진 신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런데 비단 나만의 휘청거림이었겠나? 그 충격적인 죽음으로 인한 휘청거림은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렬한 공동의 기억은 쉽게 사그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확대 재생산을 하기에도 유용한 질료가 된다. 즉 문화로 통용되는 매체의 힘을 빌리기에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특히 이처럼 다수의 잠재적 소비자가 안타까움이나 슬픔과 같은 일종의 트라우마적 심상을 지닌 경우, 이 기억을 환기하는 문화 콘텐츠의 기획에는 그다지 많은 수고스러움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그저 느린 음악을 배경으로, 대상의 모습만을 주시하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이 쉬운 길을 가지 않는다. 도리어 문학적 서사의 틀 속에 스스로를 제한하고, 그 속에서 가장 선명한 기억만으로 노무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타인이 기억할 수 있는 여지까지 남겨둔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가 노무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주목할만한 지점들이다.




문학적 서사의 틀


“영광의 세월이요, 또한 치욕의 세월이었다. 지혜의 시대이자 몽매의 시대였다. 믿음의 시절인가 하면 불신의 시절이었다. 광명의 계절인 동시에 암흑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 곧바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들 앞에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는가 했으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²


 영화가 빌려온 작품은 그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이다. 영화는 소설 속 두 주인공인 찰스 다네이와 시드니 칼튼이라는 인물의 구도와 파리와 런던이라는 공간적 구도를 그대로 가져온다. 노무현과 백무현이라는 두 무현도 부산과 여수라는 두 도시에서, 2000년과 2016년이라는 시간의 간극만을 둔 채, 똑같이 지역주의에 맞서 도전한다. 그리고 소설 속 시드니 칼튼이 그러하듯, 이 영화 속 주인공들도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아마도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노무현을 다시 불러올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마침 이름이 같은 또 한 명의 무현이 비교항으로 삼을만한 도전과 사건들을 다른 도시에서 수행함은 충분히 찰스 디킨스의 그것을 소환하여 전할 만하다고 판단했음 직하다. 덕분에 영화는 든든한 나름의 문학적 서사구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한 소득은 영화의 메시지가 분명해진다는 것에 있다. 실지 본 영화에서, 그저 자료를 나열하기만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간과될 수 있는 이야기 체계는 분명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중 2016년의 무현으로 등장하는 故 백무현 화백


 하지만,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발생한다. 특히 노무현의 경우,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른바 ‘대통령이었던 시간’이 있으나, 영화에서는 거론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혹시 이것이 처음 제시한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틀에 맞추려다 보니 의도적으로 배격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부유하는 것이다. 충분히 답변이 요구되는 질문이나, 영화는 이내 또 답변을 한다.




노무현이 가장 선명한 시간


 인간 노무현과 그를 아는 사람들이 지닌 가장 큰 기억은 두 가지일 것이다. 대통령직 당선과 죽음이 그것이다. 그런데 죽음이야 그 당사자가 지닐 틈도 없이 희미해졌을 것이기에, 함께 지닌 단 하나의 기억은 당선과 참여정부 시절로 좁혀진다. 하지만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사람들이 쉽게 예상하거나, 가장 보고 싶어 할만한 시간에는 관심이 없다. 도리어 그가 실패했던, 그러니까 민주당 간판 달고 부산에 내려갔던, 뻔한 실패의 시간인 2000년 16대 총선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실패의 시간은 정치인 노무현을 이해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순간으로 가장 선명히 빛난다. 영화에서 노무현 후보가 스스로 밝히듯 ‘출세’를 경험한 자가 굳이 사지(死地)로 내려오는 행위, 반복해서 등장하는 상대 후보가 아닌 지역주의와 싸우는 태도, 그리하여 당장의 승리가 아닌 정당한 권력이 승리할 수 있게 하는 토대에 더 관심을 두었던, 한 정치인의 족적과 이상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시간이자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로 살아날 수 있게끔 했던, 당시 영상의 존재에도 분명 빚진 바가 있겠다. 무엇이건 잘 담아둘 일이다.


** 2000년 16대 총선에 부산에서 출마한 당시 노무현 후보가 연설하는 모습




타인이 기억할 수 있는 여지


 노무현은 이상한 사람이다. - 이 간편한 진단에 이의가 있을 수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흔히 회자되는 ‘바보 노무현’보다 이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여기고는 한다. 그가 했던 선택들과 관련이 있으나, 본 리뷰와는 거리가 있기에 더는 논하지 않는다. - 이상한 사람은 여러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 영화가 스스로 시선의 범위를 한정한 것은 메시지를 선명하게 했다는 가시적 성과 이외에도, 부가적이며 역설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노무현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주지하였듯, 아직도 많은 지지자를 지닌 정치인에 대한 온갖 추억이 될 만한 장면들을 넣어두면 손쉽게 많은 관객을 모으고, 그럭저럭 나쁜 평도 듣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연출자는 애써 그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영화이건 그 어떠한 방식으로 건, 이상한 사람 노무현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여지도 남겨두었다. 이것마저 의도의 산물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결과적으로는 노무현을 요리조리 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의 입장에서는 감사한 일이다. 험로를 굳이 가지 않았다 하니, 노무현과 백무현을 넘어 김원명 작가 외 영화를 만든 사람들까지 이 이상한 사람을 닮아있나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닮는가? 아니면 닮아서 좋아하는가? 여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 출연 및 해설을 담당한 김원명 작가의 부친 김희로 선생과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 인권변호사 노무현의 모습









두 어머니와 노무현들


 뉴스 시청률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요즘이다. 뉴스는 사실만을 전한다고 하는데도 음모론이 횡행한다. 이해가 된다. 애초에 사실로 드러난 일들이 워낙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버린 것들이었으니까……. 그러자 이 영화가 개봉한 시점까지도 ‘혹시’라는 생각이 듬직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다. 차라리 워낙 대형 이슈가 발생한 탓에, 영화 자체에 대한 관심의 저조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다. 바로 어제인 토요일(2016년 11월 5일)만 해도 전국적으로 30만 명의 사람들이 여가생활을 뒤로하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사람들의 높은 정치적 관심으로 미루어, 영화가 적지 않게 손해를 봤으리라는 짐작은 타당하다. 하지만, 이 미래를 다 알았다고 할지라도, 이 시기를 선택하였기를 바란다. 그 근거로 자신을 "저는 세 명의 딸을 기르고 있는 평범한 엄마입니다"라고 소개한 어느 어머니의 연설 중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세상에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면서 '얘들아, 정직하고 착하게 살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단다'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저희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아도 아빠가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서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사니까, 너희는 엄마 아빠를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말하며 아이들을 길러 왔습니다." ³


**** 2016년 11월 5일 서울 광화문 집회 중 행진 모습


 마침 집회 참석 직후 본 영화를 감상한 터라, 이와 같은 어느 어머니의 발언은 다른 어머니와 뚜렷한 대비가 되어 들려왔다.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⁴


 그 유명한 노무현의 연설 중 일부이다. 물론 영화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와 노무현 연설 속의 어머니는 확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무언가 연결된다는 느낌을 준다. 마치 노무현의 연설을 들은 어떤 어린 여성이 옛날의 어머니와 같은 어머니가 되지 않겠노라는 다짐의 말을, 어머니가 되어 어제의 집회에서 한 것처럼 들린다. 꿈보다 해몽일까? 혹시 이것이 ‘노무현의 유산’이라고 하면, 너무 나간 것일까? 그럴 수 있겠다. 그럼 ‘유산’까지는 아니고 그냥 ‘영향’ 정도로 해두자. 이 역시 당사자가 노무현의 연설을 들은 적이 없다면 망상에 불과하겠으니, 그저 맥락의 이어짐에 기대어, 살면서 뇌리에 깊게 들어온 말들이 가치관을 형성해 감에 기여하는 일들 중 일부였으리라는 짐작까지만 하겠다. 


 그리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지녔을 참여의 발로 또한 ‘노무현의 유산’이라고까지 논하기는 과한 듯하니, 역시 ‘영향’ 정도로 해두자. 이것만큼은 힘을 실어서 논할 수 있는 것이, 기본이 지켜졌던 가장 최근의 경험은 불과 1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며, 그곳에 분명 노무현이 있었다. 그러니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우리의 광장에는 분명 노무현들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시의성과 대비는 이 영화를 이 시기에 감상할 명백한 이유로 부각된다. 마침 지극히 기본적인 것들의 붕괴를 막고자 싸우는 와중에,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노무현들의 이야기가 지금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다. 요즘은 영화 예매 시스템이 참 잘 되어 있다.


*****2001년 12월 10일 제16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국민경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당시 노무현 고문 위원의 연설 모습


오는 길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건 오는 중이고
오고 있다는 거야. 그건 결코 물러서거나 멈추지 않는다는 거야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헛수고는 아니야
난 우리가 승리를 보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어
그렇지만 보지 못하더라도, 내가 확실히 못 하더라도
승리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²






참고

¹

 - 과학동아, 정선용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화병스트레스클리닉 교수, “한의학으로 본 ‘애가 타다’ ” 

 - science.dongascience.com/articleviews/group-view?acIdx=9801&acCode=5&page=1


²

 - 찰스 디킨스 저, 성은애 옮김, <두 도시 이야기>, 창작과 비평사, 2014년


³

 - 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2016년 11월 5일 자, “평범한 세 아이 엄마의 연설에 광장은 숙연해졌다

 - nocutnews.co.kr/news/4680290


 - 위키문헌, “제16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 국민경선 출마 연설” 중

 - ko.wikisource.org/wiki/제16대_대통령_민주당후보_국민경선_출마_연설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스포츠투데이, 이채윤 기자, 2016년 11월 4일 자, “'무현, 두 도시 이야기' 상영관 확대 요구 쇄도…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 반영 효과?” 중 영화 포스터 <무현, 두 도시 이야기> 제작위원회 제공

 - stoo.asiae.co.kr/news/view.htm?idxno=2016110410424364498


*

 - 오마이뉴스, 최지용 기자, 2016년 8월 16일 자, “노무현 그린 백무현 화백, 그의 곁으로 떠나다”

 - 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35758


** 및 ***

 - 엔터미디어, 황진미 영화평론가, 2016년 11월 3일 자, “'무현' 돌풍, 인간 노무현에 대한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 media.daum.net/m/entertain/newsview/20161103133156529?newsid=20161103133156529


****

 - 2016년 11월 5일 서울 광화문 집회 중 행진 모습

 - 직접 촬영 


*****

 - 국민일보,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2016년 8월 14일 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

 - 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928714&code=61181511&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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