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지난주
유독 무거운 말들이 있다. 사랑이니 평화니 하는 말들은 그것을 이루거나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마저 강요당하는 과정에서 외피의 무게가 내용을 억누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믿음이니 희망이랄 것도 비슷해져 버렸는데, 말뿐인 공허함 속에서 너무 가벼워진 나머지 오남용을 거듭하다가, 되려 내뱉기에는 너무 부끄러워 결국 사용하기 버거운 무게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서 요즘 같은 시기만 되면 유독 그 무게를 더하는 말이 있다.
참정권. 투표참여로 대체되기도 하는 이 말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은 국민 된 의무임을 몰라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당연시되던 연애, 결혼, 내 집 마련 같은 삶의 주요 계획들의 포기를 강요당한 세대에게는 그 무거움이 더한다. ‘나는 포기를 강요당했는데, 왜 투표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이 터져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미 국가의 권리나 의무가 충실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참정권’은 무겁다 못해 황망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포기를 강요당한 세대가 투표를 포기하지 않을 동기부여를 위해, 무거운 강요를 대체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자.
몇 해 전부터 선거 운동에서 큰절을 하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한다. 대강의 내용은 그간의 잘못을 용서하고, 한 번 도와달라는 것이다. 정책 공약으로 비전을 알리고 설득해야 할 선거 운동에서 큰절을 해야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질렀으면, 출마하지 않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나, 이들은 되려 도와달라고 말한다. 뉴스에서는 연일 이들의 읍소가 전해진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태가 버젓이 뉴스를 통해 우리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삶의 쾌적성은 급격히 하락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당선 이후 꼿꼿하게 펼쳐진 허리로 둔갑하므로, 투표는 이들을 뉴스로부터 배격시킬 좋은 기회이다.
이왕 도와달라는 하소연이 나와서 그럴만한 여건인지 살펴보자. 돈이 전부는 아니나 생계가 궁극에 달한, 이른바 ‘포기를 강요당한 이’들이, 자신의 계좌 잔고를 들여다보고는 누가 누구를 도와야 하는 상황인지 혼란에 빠질 법도 하다. 참고로 20대 총선에 입후보한 후보자들의 평균재산은 새누리당 41억 원, 국민의당 23억 원, 더불어민주당 12억 원으로 집계된 바 있다.
이뿐이 아니다. 석사과정 제자가 지방대 출신이라 논문을 대필해줬다는 교수가 비례대표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지역 구도에 편승하면서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유권자 나름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들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치기 위한 노력을 왜 유권자인 국민이 해야만 하느냐는 자조가 필연적으로 따라 나올 테지만, 저들 중 혹은 그 이외의 입후보자나 정당 중에서 뉴스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대상을 몰아내는 일은, 우리의 삶을 쾌적하게 만드는 것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분명한 최선이 불투명하다면, 명징한 최악을 버리는 것도 좋은 투표의 동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82년생으로 1980년에 벌어졌다는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야만적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이를 필자는 마음의 부채의식이라는 용어를 빌려 규정하고는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두 각자의 부채의식이 있을 수 있다. 마침 계절은 다시 봄에 이르렀다. 아직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는 채로 바닷속에 잠긴 한 척의 배를 생각한다. 그것이 특정 정치집단의 잘못 때문에 침몰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후속 대응의 미진함이 강제로 분배한 공동의 부채의식이 -마음 아프게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세월호 당시 필자의 모친은 ARS로 수차례 모금에 참여하였다. 그것이 ‘국가의 역할을 왜 개인이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 이전에, 모친이 스스로의 부채의식을 탕감하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투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말조차 무겁다. 나와 사회를 마주 보게 놓고, 혹시라도 내 마음에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을 갚을 수 있는 방편으로 투표에 임할 수 있다. 꼭 민주화 운동이나 세월호가 아니어도 된다. 역시 그것들조차 어떤 입장을 지니기에는 무거운 대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면 노력 없이 생득한 성별의 지위에 대해 여성에 대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에 표를 던질 수도 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에 특히 감명을 받았다면 환경문제에 대한 공약을 내어놓은 정당이나 후보를 주목할 수도 있다. 방법은 많다.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회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당신이라면, 그리고 나보다 더 크고 아픈 포기를 강요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닌 당신이라면, 부채의식을 줄이는 방법으로서의 투표도 권해본다.
삶의 쾌적성을 증대시키거나, 부채의식을 갚기 위해 행한 나의 투표도, 기존의 구도를 넘지 못하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다. 이른바 사표(死票)에 대한 염려가 그것이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나, 이 우울한 여건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본다.
빅데이터라는 용어가 들리기 시작한 지도 2년 여가 지난 듯하다. 그것이 비록 소셜 미디어 등 새롭고 다양한 양상으로 파생된 정보들에 대한 대응의 부산물이기는 하나, 통계 수치가 지닌 가치에의 인식 개선과 분석 기술의 발전을 그 이면에 두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투표에서도, 비밀투표 원칙에 따라 누구에게 표를 행사하였는지를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으나, 특정 나잇대의 유권자가 어떤 성향을 드러내었음을 판단하는 것은 추후 여론조사 등으로 어렵지 않게 의미 있는 통계치를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표를 던진 후보나 정당이 당선 혹은 비례 의석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하였더라도, 전혀 무의미한 목소리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투표가치 등가성의 원칙을 개선하기 위한 소선거구제 개편이나 비례대표제 개선 등은 추후 다루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통계를 다루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섬세하지 못한 위정자의 시선에 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불가피하게 전략적 사고를 동원한다. 정어리를 보자. 정어리는 떼를 지어 다니는 습성이 있다. 바닷속에서 정어리 무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하나의 거대한 고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어리를 잡아먹는 포식자들은 사실은 한 쌍이 아닌 정어리 무리의 많고 많은 눈에 쉽게 포착되며, 자신보다 덩치가 큰 대상으로 인지하여 쉽게 공격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나의 표가 그 자체로는 작은 정어리 한 마리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암묵적 연대의 힘으로 얼마든지 고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지금까지의 집약된 오류가 파생한 ‘포기를 당한 사람들’이 있음을 분명히 알릴 수 있다. 당신이 투표장으로 나서지 않으면 고래의 모습이 안 될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이 참 구질구질하다. 포기를 종용한 현실을 또 포기할 수가 없다. 게다가 싫은데 무엇을 선택해야만 하는 고통도 동반될 수 있다. 지지할만한 정치인이나 정당이 없다는 것도 참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생활을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포기를 강요당해 존재 자체로 치근덕거리는 우리 생에 있어, 투표니 참정권이니 하는 무거운 말들을 해치워야 할 작은 일상의 수준으로 내려놓아 보면 어떨까? 일상을 침해하는 추한 것들을 밀어내고, 마음속의 미안함을 덜어내며, 작게나마 힘을 모아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더럽고 구차해도 이를 악물고, 소주 한 잔 기울이면서 생을 굴려 나가는 것처럼, 포기를 강요당했음에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슬픔을 안고 투표소로 가야만 한다.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조선일보 _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3/27/2016032700222.html
* 무릎 꿇은 새누리당 후보들
: 서울신문 _ http://vote2016.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408500128
**고래의 형상을 한 정어리 떼
: http://www.inspirefusion.com/sardines-form-giant-dolphin-sha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