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다섯 번째 지난주
어릴 적에 MBC가 가장 잘 나왔다. 집집마다의 사정 탓만은 아니라고 여긴 것이, 친구 집에서도 그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역적 차이로 인함이었으리라 생각되나, MBC는 분명 더 감각적으로 보였다. 곧 '더 선명하다'는 화질 차원에 한정되는 인지가 아니었음이다. 어린 눈에 MBC는 가장 세련되게 비쳤던 것이다. 프로그램 타이틀을 붓글씨처럼 휘갈겨 쓰는 KBS나, 막 개국하여 어딘가 어설픈 SBS에 비해, MBC는 분명 더 젊고도 멋진 인상을 주었다. 기억을 되짚는다. 요즘은 JTBC의 <뉴스룸>이 나름 선곡한 엔딩곡을 틀고 있으나, 당시 <뉴스데스크>가 끝날 적에는 장 미셸 자르(Jean Michel Jarre)의 ‘Equinoxe 4’가 흘러나왔다. 내가 유독 사랑하였던 <수요예술무대>와 <베스트극장> 그리고 <테마게임>은 타 방송사의 유사 프로그램과는 그 격을 달리했다. 언젠가 부친이 <용의 눈물>인가를 보시는 탓에 <테마게임>을 보지 못하여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내게는 만나면 좋았던 친구, 아니 그 이상이었다. 지금은 MBC를 거의 보지 않는다.
지난주,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의 임명과 관련하여 소란이 일었다. 마땅히 일선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인물이 떡하니 이름을 올린 탓이었다. 다행히도 거센 반발에 물러났으나, 그가 11년 전 문제의 중심에 있음을 알렸던 PD의 이름이 함께 들려왔다. 정작 자신의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의 이름이었다. 바로 황우석의 논문 조작을 세상에 폭로했던 한학수 전 MBC <PD수첩> PD가 사측으로부터 '대기 발령' 인사 조처를 받은 것이었다. 이 무렵, 카메라 기자의 개별 성향·등급을 분류한 ‘문화방송판 블랙리스트’도 공개되었다. 그러자, MBC의 카메라 기자, 콘텐츠 제작국 피디, 보도국 취재기자까지 연거푸 제작거부에 동참하였다.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려나 보다. 굳이 ‘최후’라 함은 그들에게 이 싸움을 더 이어가라고 말하기가 너무나도 미안해서이다. 더 미안해지고 싶지 않아서라도, 내가 사랑했던 MBC를 이제는 돌려받아야겠다. 가능은 할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모든 일에는 그 나름의 존립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어떤 일이건 중요하다고 할만치의 나름의 비중이 있음을 뜻한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을 후대에 전한다. 이중 언론의 중요성을 굳이 언급함은 입이 아픈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한 번은 짚어야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라 함은 외부로부터 접한 ‘사실’에 기인한다. 이 사실들을 내부에서 엮어 새로운 앎으로 터득함은 그 이후의 차원이므로 생략한다. 어쨌건 책이나 교육, 혹은 지인을 통해 습득하는 지식은 한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중대한 지위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체득의 방식이 지니지 못하거나 미약한 성질이 있다. 바로 ‘시의성’과 이에 따른 ‘정확성’이다. ‘가장 시의성 있는 앎’, 즉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주변의 세상사’, 그중에서도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닌 사실’을 인지하는 통로에는 어김없이 ‘언론’이 서 있다. 우리는 오늘의 세상을 그들을 통해 인지하고, 그 인지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토록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의 부작용에 관하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9년을 향해 고개 돌린다. 어김없이 아프다. MBC를 제대로 돌려받는 일이 중요한 이유이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든다. 제대로 하고자 하면 그러하겠다. 그렇게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가는 사람 앞으로 누군가가 새치기를 한다. 그저 빠르게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자는 손쉬운 길을 택한다. 길목에 서 있는 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장 우두머리를 내 수족으로 두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MBC의 경우를 본다. MBC의 사장은 방송문화진흥원의 이사회가 지분의 70%로 사장을 임명한다. 그런데 이 방송문화진흥원 이사 9인은 정부 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에 의해 선임되기에 정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¹ 이와 같은 구조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김재철 사장의 부임과 함께 만나면 좋던 얼굴들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뉴스데스크>의 신경민 앵커를 시작으로, 손석희 앵커부터 오상진 아나운서까지 친숙하던 얼굴들을 더는 MBC에서 볼 수 없었다. 사라진 얼굴들은 화면 속에만 국한되지도 않았다. PD와 작가 중 소위 경영진에 미운털이 박힌 이들의 이름자도 엔딩 스테프롤에서 더는 볼 수 없었다. 몇몇은 떠나갔지만, 상당수는 전장에 남았다. 크고 작은 파업과 투쟁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2012년 무려 170일의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무한도전>이 6개월간 방영되지 않던 바로 그때였다. 그 기나긴 투쟁에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악화되었다. 파업 참여자에게 징계 등 인사상 불이익이 가해졌으며, 방송의 질은 점차 하락했다. ² 시청률과 신뢰성, 공정성, 선호도 1위를 놓치지 않던 MBC를 사장 한 명이 단 2년 만에 지상파 최하위에 종편채널 수준으로 떨어뜨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김재철 사장에 이어 김 사장 당시 부사장을 역임하던 안광한 사장이 그리고 MB정부 이후 사건팀장과 국제팀장, 네트워크 부장, 사회1부장, 생활과학부장 그리고 정치부장까지 6개의 부장 자리를 꿰찬 김장겸 씨가 연이어 사장이 되며, ³ 이제는 MBC를 버려야 하지 않느냐는 자조 섞인 탄식마저 흘러나왔다. ⁴
시간이 참 오래도 흘렀다. 그간 법원이 노조의 전보 발령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회사가 파업 참여를 이유로 밀어냈던 기자·피디·아나운서 등 구성원 상당수가 현업으로 복귀하는 등의 진전이 있었으나, ⁵ 본질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있었다. 결국 지난주, 소문으로만 떠돌던 카메라 기자의 개별 성향·등급을 분류한 ‘문화방송판 블랙리스트’가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해당 문건은 카메라 기자 전원을 대상으로 2012년 파업 참여 여부, 노동조합과의 관계, 회사에 대한 충성도 등을 기준으로 개별 성향·등급을 분류했으며, 각종 인사 평가와 인력 배치에 실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⁶ 그러자 카메라 기자 50명이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이미 제작거부에 참여한 <PD수첩> 제작진의 제작거부 선언 기자회견에서 나온 증언은 비통하여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2013년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 때 당시 시사제작국장이 “지방에 있는 병원 하나가 문 닫는 일에 누가 관심이 있겠냐? 노인네들이 병원에서 나가는 방송 해봤자 시청률 안 나온다”라고 말했고, 이에 문제를 제기했던 PD들이 비제작 부서로 발령이 나기에 이르렀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유가족이 우는 장면을 최대한 삭제하라”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2014년 이명박 정부 당시 한국석유공사의 캐나다 하베스트 부실 인수 의혹을 파헤친 방송이 나간 뒤에는 담당 PD들이 스케이트장 등으로 발령이 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⁵ <PD 수첩>과 카메라 기자에 이어, 콘텐츠 제작국 피디 30명과 보도국 취재기자 81명도 제작거부에 동참하였다. ⁹ 제작거부는 노조 차원의 파업과 달리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렵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장에서는 총파업보다 제작거부가 오히려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말이 나온단다. ⁵ 그렇다. 이들은 다시 싸우려 한다. 미약하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fSlY0Cba1g985eAXnyyz-4GBR7RcwXwE4zRR1KAkvfb0ot8Q/viewform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주요 요직에는 전 현직 경영진이 다수 포진되어 있고, 신임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이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의 임기가 무조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며 해임 가능성을 언급했으나, ⁷ 이 또한 적지 않은 수고를 요구할 것이다. 그럼에도 MBC는 돌려받아야겠다. 적어도 방송이라 할만치의 회복은 이루어내야겠다. 이를 돕기 위해서는 이 사태에 대한 정리가 선행되면 좋을 일이다.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이 졸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도움이 될, 한 편의 영화가 다음 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여러 일을 한다. 제목은 <공범자들>이라 한다. 그런데 개봉일이 17일로 잡혀 있으나, 개봉이 확실치가 않다. 김장겸 현 MBC 사장과 김재철, 안광한 전 사장 등 MBC 전·현직 임원 5명이 지난 7월 31일 해당 영화가 "본인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초상권과 퍼블리시티권을 침해한다"며 서울 중앙지법에 <공범자들> 상영금지가처분 심리를 신청한데 따른 것이다. ⁸ 그러면 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할 수 있다.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duxKJjhPuolqmOZAc8pASxitSg_Ik-9PoGvgQwB5q9-YWCPw/viewform
MBC를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참고
¹
- 미디어 오늘, 김도연 기자, 2015년 6월 25일, “MBC의 가짜 주인 방문진, MBC가 산으로 가는 이유”
²
- 한겨레, 김효실 기자, 2017년 8월 8일 자, “기자 등급 분류·요주의 인물…MBC판 ‘블랙리스트’ 있었다”
-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805960.html
³
- 돌마고, 2017년 7월 20일 자, “MBC 김장겸 사장이 사퇴해야 하는 이유”
⁴
- 미디어스, 김완 편집장, 2015년 1월 22일 자, “다시 돌아오지 않을 MBC를 이제 놓아주자, 그만 해체하자”
-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579
⁵
- 향이네, 남지원 기자, 2017년 7월 31일 자, “[정리뉴스] 제작거부 열흘째, PD수첩이 겪은 ‘9년 잔혹사’”
- http://h2.khan.co.kr/201707310700001
⁶
- 한겨레, 김효실 기자, 2017년 8월 8일 자, “기자 등급 분류·요주의 인물…MBC판 ‘블랙리스트’ 있었다”
-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805960.html
⁷
- 한겨레, 김규남, 박준용 기자, 2017년 8월 11일 자, “이효성 “MBC 사장 임기, 무조건 보장해야 하는건 아냐”
-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806524.html#csidxa6a06fb13d134abbdfedec73dea53cd
⁸
- 한겨레, 박준용 기자, 2017년 8월 11일 자, "MBC 취재기자 81명도 “김장겸 체제 뉴스 제작 거부”"
-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806449.html#csidxc48d3aa7d661d5da5538f6b9ee7eb1f
⁹
- 오마이스타, 유지영 기자, 2017년 8월 11df 자, “<공범자들> 상영금지 가처분 결정 이르면 14일, 개봉 불투명”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50308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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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김효실 기자, 2017년 8월 8일 자, “기자 등급 분류·요주의 인물…MBC판 ‘블랙리스트’ 있었다”
-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805960.html
*
- 미디어스, 김수정 기자, 2015년 2월 14일 자, “김재철 사장이 MBC에 저질렀던 일은 역사에 남을 것”
-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962
**
- 미디어 오늘, 금준경 기자, 2017년 3월 23일 자, “우리는 MBC가 세월호를 어떻게 보도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5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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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이네, 사진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제공, 남지원 기자, 2017년 7월 31일 자, “[정리뉴스] 제작거부 열흘째, PD수첩이 겪은 ‘9년 잔혹사’”
- http://h2.khan.co.kr/2017073107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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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스타, 사진 이정민 기자, 이선필 지자, 2017년 8월 9일 자, “"나도 MBC 망친 공범"... 김민식 피디의 대성통곡”
-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49671&CMPT_CD=Ranking_mi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