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한 번째 지난주
“강해지길 바란다.”라는 격려는 화자나 청자, 혹은 양측 모두가 오독한 채 사용하고는 한다. 실의에 빠진 이에게 강해지라고 함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눈에 힘주고 다녀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상황으로 두려움 없이 들어가라는 의미이다. 혹은 그런 의미여야 한다. 수동적인 선택지를 지워나가라는 뜻이다. 혹은 그런 뜻이어야 한다. 결국, 누군가가 그어둔 선 안에서 안온하기보다는 그 선 밖에서 당당하게 기립할 것을 주문하는 말이거나, 말이었으면 한다. 이를테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와 같이 너무 오래되어 시궁창 냄새가 나는 틀을 떠올려보자. 이 틀 안에서 강해져 본들 마주하는 사태들 앞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음’ 앞에 나약할 것이다. 곧 뒤웅박 껍질을 벗어날 수 없음이다. 나는 이를 부수고 달아나는 근육들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틀 안에서 자유를 추구함도 분명 재주이긴 하겠다. 지난주에 미리 만나본 한 편의 영화가 그러하였다. 전체적인 채색은 충분히 아름다웠고, 연출에 있어서는 갈등의 교차를 섬세하게 그려내었으며, 배우들의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무엇보다 재밌었다. 이상의 이유로 관객들은 환호를 보내었다. 그러나 일어설 때 무언가가 머리에, -물론 사실은 마음에- 툭 하고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치 뒤웅박의 껍질 같은…. 이렇게 되면 좋았던 것들만, 혹은 걸렸던 것들만 골라서 이야기할 수가 없다. 차분히 이런저런 영화적 사태를 모조리 짚어야 한다. 자세를 고쳐 앉아, 천천히 감상을 나누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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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흔한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SoulMate, 七月與安生, 2016)>를 다루었습니다.
- 본 리뷰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감상 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아직 개봉 전인 작품을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줄거리 ¹
열셋, 운명처럼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었다.
열일곱, 우리에게도 첫사랑이 생겼다.
스물, 어른이 된다는 건 이별을 배우는 것이었다.
스물셋, 널 나보다 사랑할 수 없음에 낙담했다.
스물일곱, 너를 그리워했다.
14년간 함께, 또 엇갈리며 닮아갔던
두 소녀의 애틋하고 찬란한 청춘 이야기!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심지어는 난해한 결과물들이 예술의 영역에 들어올 때, ‘작품성’이라는 또 한 번의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심지어는 난해한 찬사를 쉽게 받아들고는 한다. 영화의 세계로 한정하자면 흔히 일컬어지는 표현을 빌려 ‘예술 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를 상정해볼 수 있겠다. 이 작품들에는 하나의 면죄부가 주어지는데, 이는 바로 재미라는 가치를 배제하거나 소홀해도 양해하겠다는 일종의 특권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면 일반적인 시장의 특성상 흥행은 기대하기 어려워지는 터라, ‘대중성’과 대척점에 있는 영화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상의 논리 전개에는 어떤 푸닥거리가 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믿음을 유치한 채 고스란히 이와 성격이 다른 영화들을 터부시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게 되면, 그 지점부터는 문제가 된다. 극단적으로는 이 같은 부류의 주장이 있다.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는 예술성이나 작품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다.’ 과연 그럴까?
물론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생각의 흐름이 종국에서 어긋나 보이는 이유는 기실 그 이전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은 상극에 자리한 개념이 아니다. 기준을 경제성으로만 두고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영화를 규정하려는 시도에서 예술 영화를 논하거나, ‘작품성’이 부족하나 많은 이들이 보지 않느냐는 위로의 차원에서 상업 영화를 정의하는 시도는 무책임한 편의주의의 산물일 뿐이겠다. 곧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하여 논지를 전개할 수는 없음이다. 그러니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두고 작품성의 결여를 논하며 아쉬운 작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예쁜 영화다. 소녀들의 우정이어서가 아니다. 우정의 두 주체가 교감하는 방식을 어여쁘게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처음 칠월(마사순 扮)의 집으로 안생(주동우 扮)이 갔던 날의 부끄럽게 교감하던 순간, 만두소를 양보하던 따뜻했던 식탁과 둘만의 기억들을 쌓아나가는 모습들이 제법 낭만적으로 펼쳐진다. 이상의 방식은 어린 두 주인공의 우정을 담아내는 영화의 일반적인 방식으로부터 크게 멀어져 있지는 않다. 다만 성격도 환경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보완하고 닮아가며 공동의 성장기를 집필한다는 감상의 부여는 주목할만했다. 이 시도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달성된다.
하나는 필명이 칠월인 작가가 작품 속에서 회고록 형식의 소설을 써 내려가는 방식을 취했음에 있다. 옛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은 균질할 수가 없기에 어떤 시간은 뭉텅이로 좋거나 나빠서 하나의 시기로 기억되는 반면, 어떤 시간은 잘게 잘게 쪼개서 매 순간을 그려낼 수 있을 만치 상세하게 아로새겨진다. 그리하여 학창 시절 두 소녀가 행복했던 시절은 마을의 숲에서 뛰어노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물론 영화 속 소설인 “칠월과 안생”에서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둘만의 우주에 어떤 존재가 개입한다. 소가명(이정빈 扮)이 끼어든 이후부터 소설의 언어가 섬세해진다. 아마도 그저 좋기만 했던 두 사람의 우정이 아픈 성장기로 대체된 시기였으리라 짐작해본다.
두 번째 차원은 배우의 연기에서 비롯한다. 근래에 들어 배우의 연기력을 공급으로, 이를 소비하는 영화시장을 수요로 놓고 보자면, 거의 지구적 차원에서 양질의 수요가 넘쳐나는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같은 작품을 만나면 이 짧은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진다. 안생을 연기한 주동우는 장이모우 감독 작품인 '산사나무 아래'의 주연으로 데뷔한 이래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애를 안은 바 있으며, 칠월을 연기한 마사순 역시 2012년 '세월무성'이라는 작품으로 제14회 중국영화협회 연기시상식 신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나름의 이력을 쌓아왔다고 한다. ² 그런데 주지하고픈 사실은 단지 연기력의 빼어남에 국한하지는 않는다. 기실 논하고 싶었던 바는 둘 사이의 교감까지 담아낸 연기에 관함이다. 칠월이 안생에게 가명을 처음 소개하던 날 이제 이 둘만의 우주가 온전할 수 없으리라 예감한 안생이 못내 그 표정을 숨길 때, 그리고 안생의 목에서 부처 형상의 목걸이를 발견한 칠월이 짧은 순간에 슬픔과 절망이 교차하는 마음을 안생에게 전하던 순간은 이 성장기가 단지 각기 빼어난 연기력을 지닌 두 주연배우의 연기만으로 달성될 수는 없었음을 깨닫게 한다.
그리고 다시 재미를 생각한다. 이 둘이 최초로 대립한 이후에 주목할 사항은 갈등을 다루는 솜씨이다. 이는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재미와 직결한다. 물론 굉장히 빼어난 연출이라고 할 만한 지경은 아니다. 사실 유사한 스토리를 다루는 우리나라 TV 드라마보다 얼마나 더 빼어난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재미있다. 제법 뒷자리에 앉은 터라 스크린의 빛이 밝을 적마다 관객의 모습을 이리저리 훔쳐보았는데, 이처럼 몰입도가 높은 작품을 최근에 본 일이 아련하다. 그런데 그 재미를 한 꺼풀만 벗겨본다. 역시 두 가지 차원이 등장한다. 그 첫 번째 차원에는 소가명이 서 있다.
극 중 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은 리뷰의 기본일진대, 잠시 망각하기로 한다. 소가명은 결정적인 재미 제공자이다. 잘 생긴 외모와 건강한 신체, 그리고 나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학력의 주인공은 거의 잘못 만든 AI 로봇을 연상시킬 만치 삐걱거린다. 어릴 적에야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할 수 있다고 양해를 하겠으나, 결혼을 앞둔 지경까지 안생 앞에서 흔들리는 눈빛이라니…. 이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는 AI 로봇은 시종일관 달리기만 하는지 대체로 생각이 없는데, 결정적인 장면은 칠월이 결혼식 전날 부여한 ‘결혼식에서 도망쳐라’라는 미션을 곧이곧대로 수용한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걸 또 무슨 자랑이라고 안생에게 말하며 자신의 과오를 탕감하려 들다니……. 영화를 떠나서 이런 남자, 아니 이런 아들이 많음을 잘 알고 있다. 이성애자 여성들은 각별히 주의할 일이다.
두 번째 차원은 다른 장에서 논할 것이다. 결정적이라고 본 탓이다.
우유부단 대마왕 소가명 덕에 극이 흥미진진의 일로를 달려나가는 가운데,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재미를 유지하는 또 하나의, 아니 큰 틀은 다름 아닌 칠월의 엄마이다.
"엄마가 여자는 아무 데나 못 간댔어."
칠월의 엄마가 규정해둔 선은 칠월의 인생을 지배한다. 평안과 자유를 맞바꾼 칠월은 엄마가 정한 안락의 틀 속에서 안온한다. 아쉬운 대로 거친 바깥세상의 소식은 안생으로부터 전해 듣는다. 하지만, 신랑을 결혼식에서 도망시키는 지경에 이르러야 자신의 일탈이 양해를 구할 수 있었던 칠월의 삶을 생각한다. 칠월의 마지막 여행은 너무나도 짧았다. 안생이라고 상황이 나은 것도 아니다. 마을을 벗어난 안생이 좌절을 겪는 지점마다 남자가 있었다. 바람을 피우거나, 제멋대로 이거나, 죽어버렸다. 안생의 여정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가?’ 혹은 ‘남자가 어떤 모습으로 떠나가는가?’로만 정의되었다. 자유롭게만 보이는 안생의 삶도 결국 남성에 의해 결정된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 둘의 우정은 또 어떤가!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가 표면적으로는 여성들의 우정을 논하고 있는 양 보이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볼라치면 어떤 벽과 마주하게 된다. 일생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필요가 없었을 법한 ‘아시아의 흔한 곱게 키운 아들’이 저지르는 우물쭈물 앞에서도 심각한 상처를 받는 우정이 진정한 여성들의 우정인가? 남성 1인의 변덕 앞에 한없이 나약한 우정을 그린 영화가 '여성의 우정을 그린 영화'라고 홍보되는 현실은 또한 타당한가? 속담 하나를 옮긴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
뒤웅박이란 박을 쪼개지 않은 채로 꼭지 근처에 구멍만 뚫거나 꼭지 부분을 베어내고 속을 파낸 바가지를 말한다. 여성의 삶에 비유되고는 하는 이 속담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는 한다. 하나는 뒤웅박의 끈이 떨어지면 어찌할 도리가 없듯이, 여자의 운명은 남편에게 매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해석과 ³ 부잣집에서는 뒤웅박에 쌀을 담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기에 여자가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팔자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쓰인단다. ⁴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그리하여 뒤웅박은 뒤웅박을 쥔 남성의 횡행 앞에서도 여성은 그저 얌전히 있으라는 무형의 틀로써 사용된다. 다시 영화를 본다.
반복되지만 엄연한 사실이기에 또 말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재밌는 영화다. 그러나 뒤웅박이! 머리를 친다. 역설적으로 칠월과 안생을 옭아매는 거대한 뒤웅박은 이 영화를 재미있게 한다. 두 주인공 중 누구 하나, 혹은 두 사람이 우정의 힘으로 이 박을 깨뜨리고 나오는 순간, 이 영화 특유의 재미는 사라져 버린다는 타당한 추측이 이를 증명한다. 곧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재미는 여성의 종속된 불행을 밟고 서 있음이다. 그리하여 재밌으나, 재미없다. 나는 여성이 혹은 여성의 우정이 뒤웅박을 깨뜨리고, 보란 듯이 자신을 발견하는 영화가 훨씬 더 재미있더라! 나는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나 <우리들 사이 (Between Us, Coup De Foudre, 1983)>와 같은 영화를 알고 있다.
글의 초반에 ‘예술 영화’니 ‘작가주의 영화’니 하는 것을 굳이 거론하였는데, 이제는 ‘여성 영화’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광의의 차원에서 여성 영화를 여성 감독이 연출하였거나, 여성 주인공이 주연한 영화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오래되었으나, 영화의 성 평등 평가 방법으로 쓰이는 ‘벡델 테스트’의 세 단계는 이를 부연한다. ⁵
1단계, 이름 있는 여성이 2명 이상 등장하는가
2단계, 그 두 여성이 서로 대화하는가
3단계, 그 대화의 내용이 남성과 관련 없는가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여성 영화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정의해보면 소위 ‘페미니즘 영화’라고 불리는 것과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에 근거한 정의는 <여성영화 재고>(1987)의 저자인,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그것을 빌린다.
여성을 위한 영화, ‘여성에게 말을 거는’ 영화 ⁶
영화 속 여성에게 반드시 투쟁하고 성취하라고 주문할 수는 없다. 그 역시 폭력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을 위한 혹은, 적어도 ‘여성에게 말을 거는 영화’로 여성 영화를 한정할 필요는 있겠다. 그렇다면 물어봐야 한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칠월과 안생에게, 그리고 영화를 본 여성 관객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가? 어찌해야 칠월과 안생의 우정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 이후에야, 이 영화를 ‘여성 영화’ 혹은 ‘여성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호명함이 타당한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계속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목소리가 스크린 안으로도 전해져야 한다. 영화는 나름의 답을 해야 한다. 길고 지루한 대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대화야말로 스크린 밖에 있는 칠월과 안생의 우정까지 지키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참고
¹
- 다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6817
²
- JTN NEWS, 윤보라 기자, 2017년 11월 5일 자,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금마장 여우주연상 공동 수상”
- http://www.jtn.co.kr/culture/view.php?code=1300&idx=45080
- 주동우의 수상내역은 너무 많아 생략함
- 56회 바야돌리드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4회 화표영화제, 제20회 상해비평가협회시상식 신인여우주연상 수상
³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여편-네 (女便-)> 항목 중
- http://stdweb2.korean.go.kr/search/SectionView.jsp
⁴
- 『한국인을 위한 글쓰기 큰 사전』, 편집부 지음, 북피아, 2007
⁵
- 중앙일보, 나원정 기자, 장성란 기자, 2016년 12월 31일 자, “[매거진M] 2016 한국영화 여성들, 안녕하십니까”
- http://news.joins.com/article/21063402
⁶
- 씨네 21, 박강아름 감독, 2015년 6월 23일 자, “페미니즘영화란 무엇인가”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0293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수록 사진 일체
- 다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포토
- http://movie.daum.net/moviedb/photoviewer?id=106817#1185439/Photo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