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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 Nov 04. 2022

여름은 여름인가봐

짝사랑은 짝사랑이라서 아름다운걸까(여름이었다~)

이건 처음으로 해보는 짝사랑 이야기.

나 정말 혼란스러웠어.


알다시피 안정적이지 못한 사람이야. 작은 일에 쉽게 슬퍼하고, 쉽게 기뻐하곤 해. 애정 전선에도 그런 성정이 당연스럽게 적용되더라.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렇게 쉽게 생기다니. 물론 그만큼 쉽게 사라져서 스스로가 참 줏대없다고 생각했었어. 막상 마음이 생기고 나면 그 대상과 사귀게 되든 말든 상관없었어. 사랑해서 사귄다기 보다는, 사귀니까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많았거든. 그래서 어릴 땐 막연한 죄책감이 들기도 했었네(내가 이렇게 쉬운 사람인가 싶어서). 그치만 점점 머리가 커가고 현실이 바빠질수록 그런 마음은 사라졌고, 누군가에게 호감을가져도 금방 사라지겠거니 생각하면서 크게 신경쓰지 않았어.


근데 내가 갑자기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진거야. 사랑이나 애정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이렇게 사랑에 빠질 줄 몰랐어.


애정과 사랑은 다른 걸까?


저 두 감정은 뿌리는 같지만, 질적으로 달라. 여태까진 사귄 사람들을 다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짝사랑을 해보니까 그건 또 아닌 거 같거든. 일단 아쉬움의 크기가 달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건 아니지만, 이미 명백하게 내 삶의 일부였고. 그런 사람이 없어진다면 가뜩이나 지루한 삶이 더 지루해질 거 같은 느낌이었달까.


편의상 짝사랑 상대를 '걔'라고 표현할게.


걔는 딱히 외모가 엄청 잘난 것도, 내 이상형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었어. 근데 참 다정했어. 다정함이란 건 100퍼센트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미덕이야. 선천적으로 관찰을 잘 하는 사람도 노력할 마음이 없다면 다정해질 수 없거든. 나도 가끔 까먹는 블로그에 쓴 사소한 내용을 기억해주더라. 그 외에도 뭐 예쁘다고 말하거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거나 하는 일들이 마음을 아주 천천히 녹였어. 난 전 연애에서 얻은 미련이나 감정의 부유물들을 차마 다 처리하지도 못했는데. 아마 그래서 내가 몰랐을거야. 모르길 바랐을 수도 있고.


그런 일상적인 다정함을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어.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감정들 투성이네. 걔는 첫인상이 좋지 않았어. 그래서 그때는 신기하게 친해지게 된 이상한 사람정도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걔를 만나는 날이 기다려지더라. 오래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가 산책의 매력도 알게 되었고. 느끼해서 싫어하던 음식도 곧잘 먹게 되었어.


나는 걔랑 있으면 되게 자주 웃는 사람이 되었어.


진짜 웃긴 게 그때까지도 나는 내 마음을 몰랐어. 마침 그때 호감이 있던(지금 생각하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랑 자주 연락하고 만났었거든. 우연히 그 둘을 번갈아 만나게 되었을 때가 있었는데, 나는 그제서야 알았어. 걔에 대한 감정이 다른 사람에 대한 것과는 정말 다르다는 걸.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 너무 혼란스러웠거든.


하지만 사랑과 재채기를 어떻게 숨기겠니. 그 후에는 아마 걔도 내 마음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렇게 따지니까 또 짜증나지네.


걔는 잘 웃고. 재미있고. 편안하지만은 않았고. 그래서 가끔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좋았어. 친구라는 이름이 이렇게 애석할수가 있나. 관계를 한 단어로 정의하는 건 참 박한 일이야. 단어의 범주 내에서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잖아. 넘어서는 안 되는 그런 경계. 나는 사실 함께 걸을 때마다 손을 잡고 싶었고.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고.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글로는 참 쉽다. 쉽게 쓰여지는 게 썩 맘에 들지는 않네. 걔를 향한 편지에 쓰던 단어들이 가끔 둥실둥실 떠올라. 그렇게 떠오른 단어들은 내 머리 위로 올라와서 비라도 된 것처럼 다시 떨어져. 머리를 적셔. 그렇게 흡수된 단어들은 정수리부터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다시 돌아오나봐. 정말 서서히 말이야.


정말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어. 분명 누구에게든 쉽게 애정이 생졌다가, 쉽게 사라졌었는데. 바보같이 자기 마음을 아는 데 너무 오래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시간에 나는 명백하게 사랑에 빠져있었던 거 같아. 앞으로 지낼 일생의 모든 여름에서 이만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사랑은 말 그대로 빠지는 거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무언가(사람, 상황 등)에 의해 사랑이라는 걸  '당한'거야. 나는 이제 애정과 사랑의 차이를 알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애정조차 사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어.


너에겐 차마 말 할 수 없는 여러 일들이 있었어. 그래서 지금은 천천히 마음을 정리하는 중이야. 여전히 걔의 마음은 몰라. 도저히 내 마음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가 없었거든. 뭐 여러 상황이 안 좋니 어떠니 해도 그냥 무서운거지. 클리셰 덩어리. 그렇게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예전 연인들도 결국 자기가 더 소중해서 그렇게 상처주고 떠나갔는데, 걔라고 다를까 싶은 그런 마음 있잖아. 용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내가 어떻게 걔를 탓하겠어.


그래도 궁금하긴 해.


잘 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나에게 애정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내 손을 잡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일상에서 문득 내가 떠오른 순간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


여름은 지나갔고, 이젠 곧 완연한 겨울이야. 그러니까 난 생각날 수 밖에 없어. 나와 걔가 좋아하는 그 가수의 노랫말처럼 말이야.


도대체 그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는지. 걔는 그 모든 걸 받고도 어떻게 돌아설 수 있었는지. 그게 궁금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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